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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Elizabeth Keith
작성자 안희선     게시물번호 10315 작성일 2017-08-23 15:48 조회수 1960

마음으로 그린 90년 전 한국과 한국인

 

엘리자베스 키스

1887-1956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도서관에 들렀다 우연히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란 책을 발견하고 놀라 마지않았던 벅찬 감동으로 이 그림들을 소개합니다.

 

그림들은 인터넷 아트 갤러리인 hanga gallery(http://www.hanga.com)에서 스크랩했으며, 그림 설명은 주로 위 책에 실린 엘리자베스 키스의 육성을 그대로 옮겨 전합니다(큰따옴표로 처리). 무단 전재하여 저작권자에게는 죄송하지만, 이 책이 더욱 많은 독자들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책 소개는 글 말미에.

 

  Marriage Procession, Seoul_1921 혼례 행렬

 

이 그림은 혼례 행렬, 정확히 말하면 신부 행차입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ㆍ을밀대ㆍ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달을 쳐다보는 데 최고로 좋은 집>”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Temple Interior 절의 내부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사당은 전쟁의 신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 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White Buddha, Korea_1925 흰 부처

 

이 그림의 흰 부처는 현재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 있는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A Game of Chess_1936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New Year's Shopping, Seoul_1921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Young Korea_1920 한국의 어린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 두루마기에 예쁜 꽃신을 남자아이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Country Wedding Feast_1921 시골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Wedding Guest_1919 결혼식 하객

 

결혼식 하객으로 온 이 부인은 머리에 장식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다음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 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리자베스 키스, 로버트슨 스콧 지음 l 송영달 옮김 l 책과함께 l 2006-02-06

 

무릇 책이란 돌려 읽고 놓아 주어야 할 때는 놓아 주어야 한다는 게 평소 저의 지론입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같은 책입니다. 누군가 이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되돌아올 때까지 노심초사하게 될까봐 차라리 한 권 따로 사서 선물할지언정 선뜻 빌려주지 않을 것 같네요~~

 

엘리자베스 키스와 로버트슨 스콧 자매의 <Old Korea>를 완역한 이 책은 키스의 그림과 여동생 스콧의 기행문으로 구성됐습니다. 이 책에 실린 키스의 그림은 비록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畵) 분위기가 나지만, 한국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과 풍광을 대단히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해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마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고 할까요? 이처럼 이 책은 화집으로서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그린 생활사 복원의 역할도 맡고 있으며, 이 책이 독자들을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키스의 여동생 스콧의 기행문은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3개월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보고 들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스콧 역시 단순히 사람과 풍속, 풍경 등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조선 현실을 상세하게 보고하는 한편 일제의 야만적 지배에 대한 분노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잠시 글을 소개합니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

배유안 지음 l 책과함께어린이 l 2008-12-05

 

“한국 여자들은 뼈대가 작으며 얼굴 표정은 부드럽다. 인내와 복종이 제2의 천성이 된 듯하다. 하지만 온순하기만 한 한국 여자들에게도 의외로 완고한 구석이 있다. 가령 이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강요한다든지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신조를 바꾸려 든다면, 차라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들 허물어 옮기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선의 방법은 오직 한국 풍습을 존경하며 끈기와 친절로 대하는 것뿐이다.”

 

"학교에서 루스라고 불리는 이 여학생은 반질거리는 까만 머리를 등 뒤로 땋아 내렸다. 기품이 고고한 얼굴이었고, 치아는 하얗고 뺨을 불그스레했으며 새까만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슬픈 표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희에 넘친 표정이었다. 여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가했는지 또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말했다. (…) 동정을 구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었다."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 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 경찰이 남자 죄수들을 끌고 가는 행렬을 보았는데, 죄수들은 흑갈색의 옷에다 조개 모양의 삐죽한 짚으로 된 모자(용수를 가리킵니다)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이처럼 자매의 글과 그림은 한결같이 조선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으며,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인간의 따듯함과 의젓함을 저버리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을 경탄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을 만나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옮긴이 송영달 선생의 노고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전적으로 송영달 선생 혼자만의 노고로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1962년 유학길에 오르며 한국을 떠난 후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정치학ㆍ행정학 교수로 30여 년간 근무한 후 은퇴했는데, 우연히 엘리자베스 키스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자료를 수집한 그의 고군분투가 눈물겹습니다.

 

참, 같은 출판사에서 학생용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도 출간하였는데, 동화작가 배유안이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주제별로 나누어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내놓은 책으로 이 또한 소장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관련 기사 하나 붙입니다.

- 아래 기사에서 루스(Ruth)라고 나오는 여학생이 바로 유관순 열사입니다.
3.1 운동 이후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면회를 간 것이네요...


                                                                                                                             - 희선,


[O2/구한말 조선을 바라본 ‘긍정의눈’]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한국, 한국인

[동아일보]
1919년 3월 28일,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독립만세운동이 한창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 이미 이 운동을 알고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현장의 비극을 직접 피부로 느꼈다. 어느 날, 그는 일본 헌병에 끌려가는 한국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죄수들은 짚으로 된 삐죽한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6척 또는 그 이상 되는 장신이었는데, 그 앞에 가는 일본 사람은 총칼을 차고 보기 흉한 독일식 모자에 번쩍이는 제복을 입었지만 덩치가 왜소했다.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독립운동 하다 감옥에 갇힌 여학생

3월 운동 기간에 키스는 무엇보다 남자 못지않게 싸우는 여성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과거에는 담 밖의 세상을 엿보기 위해 마당에서 널뛰기를 했던 여자아이들이 독립만세운동 때는 비밀문서를 전달하며 지하조직에 참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화학당 교장인 앨리스 아펜젤러(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아펜젤러의 딸·이화학당 교장을 지냄)와 함께 감옥에 갇힌 여학생을 면회하러 갔다.

“(감옥의) 구멍이 어찌나 작은지 이쪽저쪽으로 머리를 움직여야만 여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루스(Ruth)라고 불리는 이 여학생은 반질거리는 까만 머리를 등 뒤로 땋아 내렸고 기품이 있는 얼굴이었다. 여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 말했다. 동정을 구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었다. 선생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었지만 루스는 조용하고 침착했다.”

키스는 한국 사람들의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인의 정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구한국 군인 제복을 입은 무인을 그릴 때는 멸망한 조국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은 한국인의 내면을 다음과 같이 포착했다. “그는 이 제복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하면서 작대기도 올바르게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무인은 자신이 차고 있는 검에도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다.”

옛 궁정관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시대의 우울을 느꼈다. 그는 집주인과 어떠한 깊이 있는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다. 집 안의 음울한 분위기로 보아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한국인들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는지, 무슨 책, 무슨 신문을 읽는지 일본에 일일이 보고하는 것은 자기 집 안에서 족쇄가 채워진 것과 같았다.

한 젊은 의사는 그에게 “한국이 일본보다 정신적으로 더 풍요롭다”는 역설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일본이 서구에서 배운 것은 오직 물질문명이었지 정신적으로는 파탄이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신적 바탕 위에 건립되지 않은 나라는 결국 재난을 당합니다.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진실로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일본은 정신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를 절대로 건설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해낼 겁니다.”

한국에 와서 일본에 대한 인식 바꿔

키스가 한국에 있는 동안 교류했던 앨리스 아펜젤러는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느낀 일본과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일본의 악선전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성품이나 공적은 폄훼되었고, 온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실상인 양 믿었습니다. 일본은 줄기차게 한국 사람들을 무식하고 후진적이라고 악평을 해댔지요.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았고, 2400만 한국 사람들이 강인하고 지성적이며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목판화 기법을 배우며 동양적인 정취에 흠뻑 빠져 있던 키스는 한국에 와보고 나서 일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꿨다. “그동안 서구는 ‘군기가 엄하고 부지런하며 싹싹한’ 일본이 한국을 문명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구는 일본을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처럼 한국의 문화와 미술을 존경하고 일본의 무력통치를 반대하는 인사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교육계와 기독교계에 몸담고 있거나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본 내에서 핍박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떤 인사는 “일본인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선천적으로 용감한 듯하지만 도덕적인 용기는 별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키스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주자 그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우리 군부는 미친개와 같아서”라고 탄식했다.

20여 년 동양 여행하며 그림 그려

키스와 동생 엘스펫은 1919년 3·1운동 직후에 한국을 여행했다. 1915년 동생 부부가 일본에 정착할 때 키스도 동행해 함께 살게 됐다. 그는 20여 년 동안 한국 외에도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판화 수채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동양의 색채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판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키스는 평생 미혼으로 살며 그림을 그리다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동생이 함께 만든 책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책과 함께·2006년)는 한국인의 내면을 조명하면서 부당한 식민지의 현실을 고발하는,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키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단호했다. 책에는 ‘정치적 성명서라기보다는 한편의 시 같은 느낌’이라면서 3·1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우리가 아는 독립선언서와는 다른 듯)의 한 구절이 소개돼 있다. ‘거룩한 단군의 자손인 우리들/온 사방에는 우리의 적들뿐/우리는 인류애의 깃발 아래 목숨을 바친다/구름은 검어도 그 뒤에는 보름달이 있나니/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약속하도다.’

박수영 작가 · 건국대 겸임교수       

Arirang - 나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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