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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땅굴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의 체 게바라'
작성자 clipboard     게시물번호 9714 작성일 2016-12-28 18:16 조회수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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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연합군간의 두 번 째 = 마지막 지상전이 이 작은 섬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끔찍했다. 

23 만 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 12 만 명은 오키나와 주민들이었다. 


연합군측 피해 역시 막심했다. 

2 만 명이 전사하고 5 만 5 천 명이 부상당했다. . 

2 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 전멸하고 5 개 사단 병력이 전투불능상태에 빠진 셈이다. 

하루에 대대병력 하나 씩 죽어나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작은 섬을 점령하기 위해 연합군이 동원한 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항공모함 40 척, 구축함을 비롯한 전투함선 1,600 척, 수송선 342 척이 섬을 포위했다.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 

30 일에 걸쳐 작은 섬 구석구석에 약 3 만 여 발의 각종 포탄이 날아들었다. 

1 천 7 백 척의 각종 함선에 미국군 제 5 함대와 제 10 군단을 주축으로 18 만  3 천 여 명의 대병력이 탑승하고 

섬의 북쪽 해안에서부터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상륙군 병력은 25 만 여 명까지 늘어났다.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연합군에 맞서 

일본 육군 제 32 군 산하 약 11 만 6 천 여 명이 83 일간 옥쇄항전을 벌였다. 


당시 전황도를 포함한 기록을 보면 

버마(미얀마)부터 필리핀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전선은 남방군 산하 제 17 방면군이 담당하고 있었으나, 

오키나와 주둔 제 32 군은 도쿄 대본영의 직접 지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5 년 6 월 22 일, 

사령관 우씨지마 마쓰루 중장을 비롯 참모진과 지휘관 전원이 사령부 지하벙커에서 자결한 것을 비롯, 

예하 부대 병력 거의 전원이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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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중에는 조선출신 학도병과 민간인 수 백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인 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징용자와 위안부들이었다.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해 '한국인 위령탑공원'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사망자 명단이 새겨진 비문에는 그 명단이 함께 적혀 있었다.  


'83 일간의 지옥여행'을 한 미국군은 기진맥진했다.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경험한 끔찍한 기억은 그들로하여금 일본 본토 진공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도쿄를 점령하는데만 미국군 수 십 만 명과 일본 민간인 수 백 만 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비밀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미국은 본토 상륙을 포기하는대신 두 발의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실행했다. 

일본 본토 두 도시에 대한 원폭공습으로 최대 24 만 여 명이 죽었다. 

사망자 절반은 피폭 당일 사망했고 

나머지 절반은 피폭 후유증으로 4 개월 안에 사망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두 도시에 대한 원폭투하와 

일본 본토 상륙 중 

어느 쪽이 희생을 줄이는 선택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이 질문은 수리적 계산 뿐 아니라, 

윤리 딜레마 'Trolley Problem' 을 연상하게 하는 철학적 고민을 함께 수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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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해군사령부 지하방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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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원에서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는 마지막 일본군 부대가 집단 자결한 구 해군사령부 방공호를 방문했다. 


이 방공호는 인류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집단 자살극이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당시 오키나와 주둔 해군사령관이었던 '오타 미노루 소장의 마지막 텔레그램'이 여행자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다수의 일본인들과 여행자들에게 오타 미노루의 마지막 텔레그램은 

마치 쿠바에서 체 게바라 편지처럼 감동적인 전설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타 미노루에 대해 한국어로 된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오키나와가 연합군에게 함락되기 직전, 

오타 미노루는 도쿄 해군성 차관에게 보내는 마지막 텔레그램을 타전했다. 

그는 이 전보에서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접은 채 

'오키나와 현민들이 이 전쟁에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싸웠으며 

풀한포기마저 재로 변해버린 이 섬에서 주민들이 얼마나 비참한 고난을 겪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상세하게 써 내려갔다. 


오키나와 현민에 대해서 후세에라도 일본 정부가 특별한 배려를 해 달라는 부탁이 담긴 장문의 텔레그램을 도쿄로 전하고나서 며칠 후, 

사령관 집무실에서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전쟁실패에 대한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자기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사령관실에 있던 참모들도 차례로 사령관의 뒤를 따라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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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호 안에 있는 오타 미노루의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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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텔레그램을 타전하기 전

참모들과 마지막 작전회의 를 주재하고 있는 하고 있는 오타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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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과 사령부 참모들이 자결하자 각급 지휘관들 역시 the officers board room 에 모여 수류탄으로 집단 자결했다.

벽에는 아직도 그 때 터뜨린 수류탄 파편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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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해군사령부 방공호 기념관 앞 뜰에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탑 아래에는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생화가 가득 놓여있었다. 


상당수 일본인들의 대동아전쟁에 대한 인식은 한국인들의 일반적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유럽과 미국의 아시아 팽창전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 전체를 방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인식이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극우정치세력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 중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역사인식과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국일본시대를 반성하라'는 요구자체가 씨가 먹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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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해군사령부 참호 게시판에 여행자들이 남긴 스티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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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있는 4.3 평화기념관에 이런 스티커, 다시말해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한 스티커를 붙여놓을 수 있을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물론 전쟁 성격은 다르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민간인 학살이었던 반면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사건은 전쟁에서의 패전이었다. 


자국 군대가 전멸하고 섬주민 12 만 명의 사망을 초래한 전쟁을 기억하고자 지은 기념관에는 

일장기와 당시 적국 국기인 성조기를 교차해 놓은 그림이 붙어 있었다. 

도쿄에서 여행 온 어느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었다. 


미국이 은인인 줄 알고 집회때마다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일부 얼빠진 한국인들이 있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미국이 일본의 은인이 될 그런 식의 역사적 사건은 없었던 나라, 

일본의 어린 아이에게 저런 그림을 그리게 한 동기는 무엇일까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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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일간의 전투 중 도시의 90 퍼센트가 잿더미로 변한 나하시 

온 도시를 뒤덮다시피 한 수 만 구의 시체 위에 재건된 이 도시를 

섬 사람들은 '나하의 기적'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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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 기념박물관에서


체 게바라를 쿠바의 오타 미노루라고 부르면 쿠바 사람들이 펄쩍 뛸 것 같다.

참고로, 체 선생은 쿠바 사람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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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부록

오타 미노루가 자결하기 전 

유언으로 남긴 마지막 텔레그램 (영어)


Sent at 20:16 on the 6th of June, 1945:

"Please convey the following telegram to the Vice-Admiral.

While the Governor should be the person to relay this report on the present condition of the Okinawa prefectural inhabitants, he has no available means of communication and the 32nd Division Headquarters appears to be thoroughly occupied with their own correspondences. However, due to the critical situations we are in, I feel compelled to make this urgent report though it is without the Governor's consent.

Since the enemy attack began, our Army and Navy has been fighting defensive battles and have not been able to tend to the people of the Prefecture. Consequently, due to our negligence, these innocent people have lost their homes and property to enemy assault. Every man has been conscripted to partake in the defense, while women, children and elders are forced into hiding in the small underground shelters which are not tactically important or are exposed to shelling, air raids or the harsh elements of nature. Moreover, girls have devoted themselves to nursing and cooking for the soldiers and have gone as far as to volunteer in carrying ammunition, or join in attacking the enemy.

This leaves the village people vulnerable to enemy attacks where they will surely be killed. In desperation, some parents have asked the military to protect their daughters against rape by the enemy, prepared that they may never see them again.

Nurses, with wounded soldiers, wander aimlessly because the medical team had moved and left them behind. The military has changed its operation, ordering people to move to far residential areas, however, those without means of transportation trudge along on foot in the dark and rain, all the while looking for food to stay alive.

Ever since our Army and Navy occupied Okinawa, the inhabitants of the Prefecture have been forced into military service and hard labor, while sacrificing everything they own as well as the lives of their loved ones. They have served with loyalty. Now we are nearing the end of the battle, but they will go unrecognized, unrewarded. Seeing this, I feel deeply depressed and lament a loss of words for them. Every tree, every plant life is gone.

Even the weeds are burnt. By the end of June, there will be no more food. This is how the Okinawan people have fought the war. And for this reason, I ask that you give the Okinawan people special consideration, this day for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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