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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9774 작성일 2017-01-21 20:21 조회수 1250

10여년 전,내가 캐나다연합교회의 앨버타 연회에 속한 레드디어 노회장을 지낼 때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해 쓰리힐즈 연합교회에서 정기노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동네 식당에 갔습니다. 주문을 기다리며 메뉴판을 보고 있던 우리에게 다가 온 식당 여주인은 먼저 주문을 받기도 전에 우리에게  당신들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쓰리힐즈가 바이블벨트로 소문난 동네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캐나다연합교회의 안수목사들인데 이런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 서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 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누군가로부터 이와 비슷한 질문으로 생각되는 교회 나갑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지 않으며,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지 않으며, 동성애자들을 이성애자들과 동등하게 대하며,자연과 생태계와 다른 생명들을 인간의 생명과 동일하게 대하며, 삼층 세계관을 버리고 우주진화 세계관을 인식하며, 하느님은 물질적이고 인격적이고 하늘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사랑, 정의 평화, 평등,자유라고 인식하며 이것을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평범한 삶을 통해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과 심지어는 다른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정죄했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과 믿음체계가 주장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업신여겼습니다. 뉴톤 이후에 과학시대가 시작되고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믿음체계가 강요하는 성서의 권위와 예수의 신성과 자연의 법칙을 깨트릴 수 있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성서비평학이 생겨났고,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주류 신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서 근본주의를 배척하며 성서를 해방시키자는 것이 성서비평학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진화하면서 시간이 흘러갈수록 초자연적인 신/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효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내세에 대한 꿈도 쇠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패러다임에 메어달리는 기독교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고령화는 세계적인 추세이며 얼마나 더 생존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20-30년 내에 카톨릭의 바티칸은 관광코스로 전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교회의 교리적인 믿음체계가 주장하는 내세적이며 이분법적인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믿기보다, 교회를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 - 비인격적이고 비물질적인 정신(spirit), 깨달음(enlightenment, awakening, awareness), 통합적인 현실/현상/사건/실제(實際 reality), 사랑, 평화, 정의 를 탐구하려고 합니다. 또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믿음체계의 교회는 여전히 이런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정죄합니다.

 

나는 초자연적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소위 무신론자입니다. 이 무신론을 연합교회에서 20년 동안 목회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나를 무신론자 또는 유신론자 라고 부르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명칭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이냐 유신론자이냐의 논쟁은 아무 의미없는 시간낭비입니다. 기독교 교회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와 성서의 권위와 믿음체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 이단, 이방인 으로 정죄하고 추방했습니다.오늘날 기독교 교회들은 죽어가는 교세를 보호하기 위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믿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선포하는 용감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우주진화 세계관의 21세기에 삼층 세계관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아무리 기도 열심히 한다고 하늘 위에 하느님이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물론 그런 하느님은 없을 뿐만아니라 현대인들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대신에 하느님과 인간과 생명과 종교와 신앙과 믿음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면서 온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인종차별,종교차별, 빈부차별을 추방해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며 오늘 기독교인의 신앙입니다.

 

나는 예수가 나의 첫 번째 그리스도라고 확신하며,나도 그리스도가 되어 살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인입니다. 신학자Gregory J. Riley가 자신의 저서 "One Jesus, Many Christ"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의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가 탄생하기 훨씬 전에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했던 말이며, 로마제국의 황제가 독점했던 칭호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다른 말로 메시아, 구세주 라고 하는 데 사도바울이 황제에게만 부칠 수 있었던 호칭을 예수에게 옮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국의 반역자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이란 고백은 예수를 하느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1세기 초에 크리스챤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모습들을 보고 그들이 예수를 닮았다고 해서 크리스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나의 구세주인 것은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지 않고 천국으로 가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과거의 패러다임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시켰고 나의 생애를 180도 뒤집어 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나의 주님인 것은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영원함을 체험하며 생기가 넘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나의 구세주이고 주님입니다. 내가 예수를 따르는 이유는 그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고대 성서의 기록 때문이 아니라, 그의 평범한 삶 속에서 비상한 통찰력과 지헤와 가치관과 세계관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 또는 유신론자라는 구구한 명칭이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하느님이란 말의 새로운 의미를 살아내는 무신론적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직 초자연적인 하느님만을 믿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물론 기독교는 예수를 초자연적인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도 아닙니다. 역사적 예수는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교리는 후대 교회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아 넘어갔는데 다윈의 진화론 발표 이후부터 사람들은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마커스 보그의 말대로 과거의 렌즈를 버리고 새로운 렌즈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또는 하나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즉 고대의 삼층 세계관의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의 하느님입니다. 21세기의 하느님은 다른 말로 '우주적 통합, 통합적 실제, 조건없는 사랑과 화합, 정의/평화/평등, 공평한 분배의 정의, 생명'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적이고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내면으로부터 느끼고 깨달아 아는 실제(實際 Reality)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지난 1700년 동안 기독교 교회는 삼층 세계관의 하느님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출현으로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죽었습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이 하느님은 인간을 설득하거나 강요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죽어가기 시작했고 이미 유럽의 기독교 교회는 관광코스로 전락했습니다. 북미의 교회 세력도 사회에 아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그대신 인도주의 즉 자연주의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인도주의자들입니다.초자연적이고 기독교인만을 구원하는 이분법적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을 무신론이라고 규정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기독교인 되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죽은 후 천당에 올라가는 것이라는 구원론은 더 이상 설득력도 없는 비상식적인 말장난일뿐입니다.교회에 참석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생명체,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관계를 발전시키고 우리의 후세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21세기의 새로운 하느님을 탐구하는 것이 무신론과 회의론이라고 하면 용감하게 무신론자와 회의론자가 되는 것이 온 인류를 위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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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  2017-01-21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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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나가느냐 안나가느냐 가 그렇게도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교회 안나가면 하느님의 징벌을 받고 나가면 축복을 받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 나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분증인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라 예수처럼 사는 것일뿐이다. 구원론이니 축복론이니 내세론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믿음체계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상업적인 수단이고,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이런 수단들이 종교, 신학, 신앙, 믿음을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었다.

21세기의 종교와 신앙의 핵심은 Simplicity(간소함)와 Minimalism(덜 가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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