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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천당가는 문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9777 작성일 2017-01-22 08:22 조회수 1425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이래로 전 세계의 과학자, 예술가, 신학자, 종교학자, 철학자, 문학가들은 기존 기독교 종교체제가 만든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믿음체계를 거부하면서 신선한 대안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하느님, 예수, 교회, 생명과 죽음, 인간, 종교를 제시해왔다. 또한 종교와 과학의 상호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이것을역사적 예수운동이라고 한다. 특히 지난 30년 동안 예수살기 운동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섰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미국의 신학자 로버트 펑크, 쉘비 스퐁,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영국의 돈 큐핏, 뉴질랜드의 로이드 기링, 등 예수 세미나 학회(www.westarinstitute.org)에 속한 400여 명의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종교문맹퇴치를 위해 21세기의 새로운 신학과 신앙의 물결을 일으켰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고대 성서를 신중하게 읽어야 진실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신약성서의 마가복음서는 로마제국의 혹독한 치하에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암흑시대에 살던 예수 공동체 구성원들이 생명의 밝은 빛을 보았던 체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마가복음서 9:2-9) 복음서 저자 마가는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수가 가까운 친구들과 위에 올랐을 때에 그의 모습이 휘황찬란하게 변화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전에 등장하는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간 것을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고대인들에게 높은 산은 신과 인간이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얇은 (Thin Place)으로 상징된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꼭대기에 올라 장엄한 경치를 만끽하면서 맑고 신선한 공기를 심호흡했다. 삶의 희망과 기쁨을 잃고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던 제자들은 정신이 맑아지고 의식이 새롭게 되면서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을 내면으로부터 깨닫고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예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 경건한 베드로는 이러한 신비스러운 체험을 놓치기 싫었다. 그대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선생님, 저희가 영원히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다 초막을 짓고 우리 끼리만 선생님을 모시고 싶습니다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의 망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심없이 예수를 따르는데 있어서 기독교인과 교회의 눈을 가리는 장애물로 교회건물이나 교인수에 대한 유혹도 있겠지만 심각한 것은 교인들의 신앙상태가 혼돈에 빠지는 것이다. 기독교인과 예수의 관계는 천당과 지옥 또는 징벌과 보상의 관계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 새로운 교회의 의미, 새로운 인간의 의미에 대해 깨달음의 길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은 깨달음의 길이고, 예수의 삶의 모습은 진리와 생명에 대한 구체적인 길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아니었더라면, 하느님은 사람들의 내면에 그리고 관계들 속에 함께 있다는 진리를 새롭게 깨달아 없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등지고 꼭대기에서 내세지향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때에 예수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세상으로 내려가라고 단호하게 명령한다. 하느님은 꼭대기에서 즉 거룩한 교회 안에서 감성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손을 높이 쳐들고 노래부르며 찬양하는 존재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가슴으로 느끼고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영적 실제(實際 Reality) 즉 삶의 방식이며 표현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위에서 황홀하고 환상적인 체험을 가진 이야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서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예수의 신성을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고 잘못 해석하게 되며, 세상을 도피하여 교회 안에 안주하게 되고, 죽은 후에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이 믿음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읽고 일요일예배, 성경공부, 각종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는 목적은 이 세상을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와 인간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고 삶의 용기와 지혜와 비전을 갖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독점물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세상에서 예수의 정신에 따라 사심없이 정의롭게 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각종 모임들을 가진 후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일하게 머물고 싶었던 형이상학적인 위에서 불편하고 위험하고 세속적인 세상으로 내려가야 한다. 위에서의 황홀하고 기이하고 놀라운 체험이 세속적인 세상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오늘도 예수는 기독교인들에게 거룩한 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세속적인 세상으로 내려가라고,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도전한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기독교교회는 세상을 도피하여 숨어 있다가 죽은 후에 천당으로 가는 문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고 있는 두껍고 높은 교리적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하느님을 세속적인 세상의 평범한 속에서 느끼고 드러내야 한다. 하느님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성숙케하는 창조성과 자율성과 가능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수의 모습이 변했듯이 기독교인들도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이 변해야 한다. 산 위에서 홀로 외롭게 고고하게 자기만족에 빠져 살고 있었다면 이제는 세속적인 세상으로 내려가 더러운 사람과 깨끗한 사람을 분리하지 말고 모두를 포용하며 상호의존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두려움과 편견과 이기심을 가지고 살아 왔다면 이제는 이것들을 용감하게 내려놓고, 죄악으로 물들고 더럽다고 정죄한 세상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새롭게 보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진정한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이렇게 살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신바람나고 기쁨이 넘치게 되며,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항상 햇빛처럼 밝은 표정을 지을 있다. 개인적인 내면과 외부의 변화없이 가정이나 교회나 세상의 공동체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 사람의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을 있고 하느님을 느낄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목적이다.

 

기독교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상업적이고 타율적이고 교리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기 보다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내면의 깨달음에 이르고 그것이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 즉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알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 만이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 있다. 기독교교회의 선교는 세상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처럼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교회 안에 안주하지 말고, 교회와 세상의 경계를 허물고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예수가 것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참 믿음이고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독교교회는 세상을 도피하는 노아방주도 아니고,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불치병이 기적처럼 일어난다는 무당집도 아니고, 천당가는 문도 아니고, 오직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이다. 이것이 오늘 죽어가는 기독교교회가 새롭게 변화되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예수의 급진적인 도전이며 불편한 진리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참고 자료]

로이드 기링,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존 캅, 교회 다시 살리기,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Shroyer, Danielle, The Boundary-Breaking God, Jossey-Bass, 2009

예수 세미나, www.westarinstitute.org

한국기독교연구소, www.historicaljesus. co.kr

마커스 보그, 기독교의 심장,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Borg, Marcus J, Jesus in Contemprary Scholorship,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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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  2017-01-2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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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인들은 진화영성과 함께 과거에 오랜 세월동안 이해했던 교회, 인간의 본성, 하느님, 신앙과 전통, 생명과 죽음, 고대성서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과거의 패러다임 즉 삼층 세계관적 교회를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우주진화적 교회를 다시 새롭게 세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왜 주일마다 열심히 교회에 가는지에 대해 그 의미와 목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오늘날 세상에 꼭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무엇때문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그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자아도취 내지는 자기만족 이라면 시간낭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가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삶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온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길을 모색하려고 교회에 가는 것 아닙니까? 교회는 죽은 후의 다른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 현세적인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와 천당과 물질적인 축복의 꿈은 개인적인 것이 될 수는 있어도 교회의 꿈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꿈은 지금 여기에 하느님의 나라가 구현되는 것이었습니다.

늘봄  |  2017-01-2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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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은 기독교의 해체가 아니라 온전한 복원입니다. 교회는 맹목적인 예수숭배의 장소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되찾고, 예수의 신앙과 삶을 따르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답답한 성서문자주의 신앙, 경직된 교조주의 신앙,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복음주의 신앙, 그리고 저질 기복신앙을 넘어서서 함께 고민하고 방황하고 치열하게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진리에 한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는 삶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깨어나야 합니다.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은 타성에 젖은 묻지 마 신앙과 중고품 신앙을 아낌없이 버리고,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른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해 자율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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