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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종교 '극소주의'(minmalism) 형성 과정에 대한 소묘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게시물번호 9916 작성일 2017-03-15 19:32 조회수 2326

캐나다는 세계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다문화(multi-culture)가 정착되어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다문화의 성숙도는 바로 캐나다라는 나라 안에 종교를 비롯해서 다양한 문화가 상호 존중을 하면서 공존하고 있다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저의 글에 대해서 GPMAN님께서 저의 글이 어렵다고 조언을 하셔서 추상적으로 논의된 것들 중에서 신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또 어려울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이것이 신학이나 종교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다문화의 한 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글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젠가 여기서 최성철 목사님(앞으로 존칭 생략)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진술했을 때, 여러분은 어리둥절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성철 목사의 설교집이 [깨달음의 하나님]이었으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 말은 나와 떨어진 대상으로서의 신(God)의 개념을 가진 "유신론"(theism)에 대한 부정이긴 한데 그렇다고 이것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atheism)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영어 접두사 "a"는 부정어 "not"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에서 "비역사주의"라는 말을 ahistoricism이라고 하죠. 이와같이 무신론은 신론에 대한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글을 보면, 최성철 목사의 유신론 부정은 무신론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신의 이론, 즉 신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반적으로 유신론은 신과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습니다. 즉 신은 초월적 존재이며 세계는 신이 만든 세계, 즉 피조세계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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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이 바로 전형적인 유신론적 구조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유신론적 구조 중에서 세계를 창조한 신은 유일무이한 신, 즉 하나 밖에 없는 신이라는 주장을 유일신론(monotheism)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일신론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삼위일체"(trinity)를 믿고 있는 있으니까 이슬람에서는 기독교를 세 신을 믿는 삼신론자라고 비판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형태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강조하면 삼신주의가 되고, 삼위격이 한 본질로 나오면 삼위격의 위치가 한 본질로 환원되어 버린다는 양태론(modalism)이 된다는 것이죠. 즉 태양은 하나인데 빛은 세가지 형태, 즉 성부, 성자, 성령으로 유출된다는 것이 양태론의 주장이죠. 이 문제로 인해 초기 기독교는 서로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여 쌈을 참 많이 했고 요즘도 보수기독교에서는 서로 이단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신론을 극단으로 몰고 간 사람이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 (Karl Barth)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긴 하지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고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간파한 사람입니다. 바르트는 신은 전적으로 인간과 세계와 구별되는 타자로서 인간과 신 사이에는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에밀 브르너(Emil Brunner)와의 자연신학 논쟁은 유명하지만, 여기에선 생략합니다. 


* 보충) 칼 바르트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신학자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있습니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4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가 감옥에서 친구한테 보낸 편지글이 나중에 출판되었고 그의 유명한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는 인간의 종교에대한 신의 계시의 초월성과 우월성을 강조한 바르트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인데 바르트의 다른 점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본회퍼의 [옥중서신]에 나타나는 이 용어는 워낙 파편화되어 여전히 해석이 분분합니다. 나중에 이 용어는 신의 죽음의 신학자나 세속화 신학자들에게서 탈취되어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는 개념입니다. 어쨌든 그의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는 당시에 타종교의 문제나 종교학적 이해가 부족한 신학자들의 아전인수격인 해석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신학자들 사이에 애용되는 용어입니다. 특히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 (I am 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는 표현을 해설하는데 남용되는 말입니다. 이런 신학적 용어는 기독교 밖을 넘어가면 별로 효용성이 없지만 인기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이 말은 제도화된 종교와 별도로 영적 경험(spiritual experience)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 표현을 기독교신학자들이 남용한다는 것이죠. 


이에 이러한 유신론을 인정하지만, 신은 세계를 창조하셨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이신론"(deism)이라고 합니다. 이신론에 대한 설명을 신학자 윌리엄 팰리(William Paley)의 시계제작자와 시계의 유비가 유명하죠. 일단 시계제작자가 시계를 만들어 태엽을 감아 두면 시계는 제작자와 상관없이 시계가 째각째각 돌아가듯이, 우주도 신이 만든 다음 관여를 하지 않아도 잘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연법칙이란 신이 만든 법칙이고 뉴턴같은 물리학자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마스 제퍼슨도 바로 이러한 이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유신론의 장점은 신을 자연과 분리시키므로써 자연을 인간이 대상적으로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근대과학의 문을 열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신론은 바로 이런 유신론의 또다른 형태의 변이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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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신은 더 이상 우리의 삶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진보신학자나 교역자들의 신관은 이러한 이신론적 신관을 암묵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아주 편리한 이론입니다. 창조과학회의 지적설계이론도 넓게는 바로 이러한 이신론의 아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팰리의 이론은 초기에 다윈의 진화론적 관념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위의 유신론적 전통과 상반된 신에 대한 이론이 바로 범신론(pantheism)입니다. 점두어 "pan-"이 지칭하듯, 이것은 모든(all), 보편적(universal)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신론이란 신은 세계 어디에든 편재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들이나 존재에서 신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요즘 유신론에 반대하는 뉴에이지 사상 대부분은 이러한 범신론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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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범신론은 매우 편리합니다. 초월적 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자연속에서 신의 속성을 찾을 수 있으니 소위 말해서 도닦는 사람들에게 매우 편리한 도구가 됩니다. 득도를 통해서 자신이 신의 속성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유신론/범신론의 두 대조적인 신관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아래에서 유신론의 결합을 시도한 범재신론을 살펴보기 전에 유신론의 도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암묵적으로 목회자들에겐 퍼져 있긴 했지만, 유신론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영국의 성공회 주교 존 로빈슨 (John.A.T. Robinson)이 처음입니다. 그는 1963년에 발표한 [신에게 솔직히] (Honest to God)에서 저 위쪽에 있는, 즉 공간적으로 하늘 저 너머에(up there or out there) 있는 신의 존재는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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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의 신학은 본회퍼의 종교없는 기독교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존재의 신학을 철저히 급진적으로 몰고 간 것으로서 여기에선 깊이 못다루지만, 그의 이 책은 1960년대 유명한 "신의 죽음의 신학" (Death of God)의 유행을 촉발시켰습니다. 신의 죽음의 신학이란 애초에 유신론적 하느님/하나님은 없을 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유신론적 신의 기능과 역할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사상을 대중화시킨 신학적 유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전적인 책은 읽어보면 재밌습니다. 


이러한 신의 죽음의 신학 운동에 대표적인 인물로는 토마스 알타이저(Thomas Altizer), 폴 반 뷰렌 (Paul van Buren), 그리고 윌리엄 해밀튼 (William Hamilton)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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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의 신학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타임 메거진 1966년 4월판 중의 하나의 표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Is God Dead?. 이러한 현상은 시대의 한 징표이기 때문에 한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이러한 신의 죽음의 신학이나 세속화 신학의 거의 모든 논의를 집대성한 책으로 박봉랑 교수의 [신의 세속화] (1983, 1989)가 있습니다. 이 책은 크라운 판으로 788면에 이르는 대작으로 국판으로 보면 1천 면에 준하는 방대한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이것은 동서양을 망라해서 신의 죽음의 신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연구한 책입니다. 방봉랑교수는 소위 말해서 하바드 신학대학원을 1950년대 나온 분으로서 현각스님의 대선배격이죠. 이 분이 바르트계열 신학자이긴 하지만, 신학적 정치함은 한국신학자 어느 누구보다 정치한 분입니다. 신의 죽음의 신학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 분의 이 책을 무시하고 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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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의 죽음의 신학 이후 유신론을 새롭게 해석하자는 운동이 나왔는데 그런 신학활동의 신관을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an+en+theism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범재신론은 바로 유신론과 범신론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범재신론에서 볼 때 유신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역동적 형태라는 것이죠. 이 사상의 근간은 버트란트 러셀의 절친인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의 과정철학 (Process Philosophy)로서 그의 책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가 유명합니다.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수학원리/라는 책을 함께 저술합니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도올 김용옥 선생으로서 그는 화이트헤드의 성의 의미를 따서 "백두" 선생 즉, 희머리 선생으로 부르면서 자신의 기철학과 가장 어울리는 사상이 바로 과정철학이라고 하곤 하였습니다. 도올에 따르면, 그 동안 철학은 존재(being)의 문제를 물었지 "되어감" (becoming)의 문제를 논파한 사람이 백두선생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백두 선생의 과정철학을 "과정신학"으로 적용한 사람이 미국의 클레어몬트 대학의 존 캅 (John B. Cobb)입니다. 캅은 신은 이신론적 존재로 휴가를 떠난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초월해 있으면서도 우리의 삶의 현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재적인 존재로 해석하였습니다. 그 신론이 바로 범재신론, 즉 신은 초월해 있으면서 내재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캅의 제자가 바로 한국의 유명한 신학자 김경재 선생과 철학자 김상일 선생(한국의 전통사상을 조명한 한사상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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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위의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신은 우주안에서 우리의 삶에 함께 고통하면서도 우주 밖의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이 범재신론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범재신론 조차 한 시대의 유행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존 로빈슨의 지성적 제자이자 같은 영국의 성공회 사제인 인물은 단 큐핏(Don Cupitt)입니다. 그는 미국의 에피스코팔 (성공회) 사제 존 셀비 스퐁 (John Shelby Spong)과 함께 최성철 목사가 자주 언급하는 인물입니다. 큐핏은 사제이면서 다작을 하는 신학자로서 이야기 꾼 중의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책은 숨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글을 재밌게 잘 쓰고 유신론의 종말을 철저히 해체해 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면, 제가 왜 스퐁과 최성철 목사를 종교 "극소주의자"(minimalist)라고 했을까요? 사실 이 개념을 저는 종교학자 브루스 링컨 (Bruce Lincoln)의 책 [성스러운 공포] (Holy Terrors) (2006)라는 책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링컨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종교의 역할은 점점 사회에서 줄어들어 극소화되었다는 것인데, 저는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최성철 목사나 스퐁신부의 신학엔 종교에 대해서 말할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극소주의(minimalist)라는 것이고, 이러한 사상의 근간은 폴 틸리히 신학의 아류격인 로빈슨에서 출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엔 로빈슨은 거의 회자되지 않고 틸리히 신학만 활기차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스퐁은 [변화되지 않은 기독교는 죽어야 한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 (1998)에서 유신론적 신은 사람잡아 먹는 귀신(ogre)과 같은 존재로서 십자가를 진 아들 예수를 죽게 한 신은 경배하기보다는 혐오하겠다고 일갈을 날립니다. 이런 주장이야 괜찮은 편입니다. 보수 기독교에서 그런 신을 숭배하니까요. 스퐁은 전통적인 유신론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하면서 신의 해체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는 1960년대의 신의 죽음의 신학을 단칼로 자르는 단칼주의잡니다. 그는 "유신론의 범주를 벗어나서 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무신론자라고 부를 것이다" (Those who cannot think of God without the categories of theism will call me an a-theist)라고 되뇌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 이해는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히스테리컬하게 변호한다고 해도 결국 죽게 된다." 그리고 [새시대를 위한 새기독교] (A New Christianity for a New World] (2000)에서 스퐁은 "내가 함박 기쁨으로 선언컨대 유신론은 죽었다, 그러나 신은 실재한다." (Theism is dead, I joyfully proclaim, but God is real).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저도 모릅니다. 그냥 그가 얼머부린 것입니다. 


"God" (God)라는 이름은 지난 2천년 동안 유신론의 상징어인데, 유신론은 죽었는데 신은 있다? 제가 비판하면 아마 자신의 깊은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유신론의 한계에 남아있는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스퐁의 선언은 50여년 전 존 로빈슨의 유신론의 죽음의 선언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즉 God라는 말을 사용하는 한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초월한 대상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그냥 무의미한 선언입니다. 그의 이러한 진술은 기독교적 전통을 거의 벗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을 뭉개고 그냥 몇마디 선언한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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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 책일 것 같다고 쓴 [영생: 새비전-종교를 넘어, 유신론을 넘어, 천국과 지억을 넘어](Eternal Life: A New Vision-Beyond Religion, Beyond, Theism, Beyond Heaven and Hell) (2009)에서 자신이 근본주의 신앙인에서 진보적인 신앙인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여러 과학적 사실을 나열하고, 기존 신학을 비판하면서, 칼 융의 개성화개념, 틸리히의 존재의 기반, 힌두교의 베단타사상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음)을 섞어 놓고선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의 자기가 진짜 신이다" (My me is indeed God). 성격의 통합으로서의 자기(me 또는 self)가 신이라는 것이죠. 그는 인간의 개성화(individuation; 이것은 융의 용어임. 그러나 그는 융을 적시하지 않음)는 인간의 전일성을 표현한 것으로 궁극적으로 인간은 우주와 하나로서 불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불멸성 안에 있다" (I am mortal, but I share in immortality). 이것을 설명하면, 간단히 그냥 인간은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서 먼지로 흩어진다는 뜻입니다. "한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죽는다면, 그 [또는 그녀는] 다시 살까요?--내 대답은 그래요,그렇습니다, 그럴거예요!" (If a man [or a woman] dies, will he [or she] live again?--my answer would be yes, yes, yes!)라고 그는 감격하여 외칩니다. 


그가 대상화되지 않은 신에 대한 질무의 해답을 신비주의(mysticism)에서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의 신비주의는 전통적 기독교 신비주의가 아니라 힌두 베단타 사상에서 말하는 "단일론" (monism)과 유사합니다. 단일론이란 이 세상에 하나의 유일한 실재고 인간은 그러한 실재에 참여한다는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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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다문화, 다종교 사회입니다. 종교나 사상을 교류하고 대화하고 차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스퐁의 극소주의는 자신이 전통적인 기독교신화나 상징을 다 제거 하고 난 다음에 한 말이 "신은 실재적이다." (God is real)와 "나는 불명성안에서 타자와 공유한다" (I share in immortality)외에는 별로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극소주의가 신비주의자 마이스트 엑크하르트 (Meister Eckhart)에서 그 해결점을 찾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대상적 존재가 아닌 오직 "경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과학의 비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안전지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형용할 수 없는 신비적 경험입니다. 그런데 궁극적 실재와 나의 결합은 대상성을 상정하지 않는 힌두철학의 범아일여 사상과는 달리 기독교는 신의 대상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퐁의 신비주의는 위의 두 진술 이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상이든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쉽게 차용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힌두교 사상의 위대함은 바로 단일론과 이원론, 명상과 신에 대한 헌신 등 모든 것을 포괄하며, 이것이 서로 배타적이라기보다는 공존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스퐁의 경우, 유신론의 해체 이후 근본주의 신학과 싸움만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스퐁이 미국의 에피스코팔 교회의 뉴저지 주의 뉴억(Newark) 교구의 주교로 1978-1996 동안 교인수가 40% 이상 줄었습니다. 이러한 교세의 급감은 그가 동성애 문제를 용감하게 나선 결과일 수 있기 때문에 그의 공헌을 높이 사야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슈와는 별도로 그의 신학적 해체 이후 재건(reconstruction)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도 없고 돈이 없다보니역사적 교단 건물도 다 팔아먹고 교단 자체가 문을 단아야 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스퐁은 이 문제에 대해서 거의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진보적 "교회"의 생존이라는 개념은 그의 머리에는 없습니다. 그의 책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위한 예수 (Jesus for the Nonreligious](2007)는 바로 교회의 무덤을 딛고 일어선 탈종교적인 선교서입니다. 본회퍼의 "종교없는 기독교" (religionless Christianity)의 확장판이긴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무덤을 의미합니다. 칼 바르트의 제자인 본회퍼가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지는 난감합니다. 원래 종교없는 기독교란 시대의 문화에 흡수되어 버린 기독교를 비판하는 개념인데 이렇게까지 왔습니다.  


이른바 진보적 기독교가 보수복음주의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 전통을 치열하게 성찰하면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한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The Systematic Theology)은 없이, 스퐁처럼 한두줄 틸리히를 인용한다고 해서 스퐁과 같은 진보신학이 재건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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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렇게 진보교회가 사라진 이후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죠. 


"스퐁주교가 의도치 않은 결과" (Bishop Spong's Unintended Consequences)라는 글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글을 마칩니다:  "그동안 우리를 함께 묶어 중재해 준 위대한 중재 조직이 미국에 더 이상 없다는 것은 좋은 소식은 아니디다"(That America no longer has great mediating religious institutions that bind us together is not so good.). 결국 스퐁의 싸움은 자폭같은 것이었고, 미국의 종교적 지형은 보수근본주의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게 되었고, 트럼프같은 인물이 나왔다고 제가 보는 것은 과장되지 않은 해석이라고 봅니다. 진보주의가 다수를 형성한 종교지형(mainline churches)이 죽은 교회지형(deadline churches)으로 바뀐 현실을 우리는 직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진보교회의 무덤에 보수교회와 비종교인(religious nones)이 축제를 벌일 것입니다. 종교는 영원한 것이 없고 생성 소멸되듯이 스퐁의 교단도 곧 소멸의 길을 갈 것입니다. 이것이 스퐁의 잘못은 아니죠. 그는 시대의 아들이고 시대의 요구에 일관되게 충실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 스퐁이라는 현상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의 종교 극소주의는 이 시대의 한 현상임에는 분명하고 그런 징조를 읽어 내야 합니다. 최성철 목사도 바로 이런 맥락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사회적 현실 (social implications)를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고 어떤 면에서 스퐁의 말대로 joyful 한 것입니다. 제 주관적인 글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종교 극소주의에 이른 경과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긴 글 죄송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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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MAN  |  2017-03-1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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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그림까정 그리셔서 이해를 쉽게 하시려고 애쓰신 점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는 누구의 주장이 맞고 틀림을 가리기 보다는 다름의 시각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목사님과 함께 앞으로도 많은 좋은 글 부탁 드립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7-03-15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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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MAN님 댓글 감사합니다. 위의 글은 저의 가치판단이 좀 들어간 글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누구의 글에 대해서 흠집만 찾아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최목사님 글에 대해서 그런 시비를 건면도 많지요. 그와 같이 "나"의 사상을 정당화하려고 남의 신념을 뭉개버리거나 왜곡하면 더 나쁜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상을 비판하려면 그 "내용" (what)에 맞추기보다는 "왜"(why)와 "어떻게"(how)로 그 사상을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신학이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거나 인문/사회과학과 소통을 하려면 지구의 역사에 대한 과학적 결과물(what)을 알려준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말씀이죠. 천국과 지옥은 종교지도자들의 날조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타자에 대해서 언어적 폭력을 감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적 테러행위는 바로 나와 다른 시각을 뭉개는 것이죠. 앞에서 말한, 천국이나 지옥, 그리고 도덕성의 발전의 한 면을 보여주는 "죄"(기독교)나 "고통"(불교)의 이슈가 이른바 역사 종교에서 "왜" (why) 중요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how) 발전되어 나왔는지 그리고 이 이슈가 요즘에는 비판을 받는 것인지 서술하고 (describe) 설명하면 (explain) 되는 것이죠. 그럴려면, 신학은 인문사회과학에 더 소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령, 이런 이슈는 종교사, 종교사회학, 종교인류학에서는 어떻게 이해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수교인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화만 낼 것이고 천국과 지옥은 종교지도자들의 날조라고 말한 이는 의기양양해서 그런 싸움을 즐기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저한테도 해당 되는 것이지만, 어떤 글이든 how와 why는 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위의 글은 가치판단이 좀 들어간 것이긴 하지만, 그런 사상의 계보를 대략 스케치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 게시판에 안식일 교회의 신학, 여호와증인의 신학, 물몬교회의 신학, 장로교와 개혁교회의 신학, 감리교, 성결교와 구세군의 신학, 대승/소승불교의 교리, 이슬람의 교리를 죽 나열해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prosperity  |  2017-03-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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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봄님과 내사랑 아프리카님의 기독교에 대한 여러 글들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신화"의 산물일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저의 판단이 틀릴수도 있겠지만/틀린 판단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상관 하지 않을려고합니다.잘 다니던 교회출석도 중지한 상태 입니다. 예수는 진실이라고 믿고 예수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교회에 출석할 이유를 찾을수가 없어나 역사적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때 몇달만에 한번씩 교회에 출석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잘 다니시는 성도님들은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세월호가 바다속에 잠길때에 부모님들과 많은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피눈물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역시나 하나님의 응답과 기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자연법칙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이 아닌가 생각하여 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7-03-1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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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님, 안녕하세요. 곧 한 번 뵙겠습니다. 저는 작년에 이사를 했고 좀 바빴습니다.

번영님의 고민과 질문은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문제는 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문화적 인간이 되는 것이며 종교는 인간의 실존(existence)의 조건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바꾼다고 해서 바뀌거나 선택한다고 해서 선택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인이라면 종교적 상징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나름대로 상징적 세계 (symbolic world)를 갖게 됩니다. 그런 상징체계에서 신을 상정하는(postulate) 유신론적 종교도 있고 반대로 신을 상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징체계는 당연히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며, 그런 면에서 기독교 성서도 인간의 산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번영님께서 생각하시듯, 신도 인간이 만든 신화의 산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신이 인간의 의미체계에 효력이 없으면 교회를 떠나도 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예수" 또한 해석된 예수지 "역사적" 예수는 없습니다. 그 예수가 나에게 그리스도로서의 효력이 없으면 그 또한 그 예수를 따르는 신자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신화는 가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의미와 방향을 주는 상징들의 결합체로서 그러한 상징을 살면 신화는 살고 그러한 상징을 인간이 살지 않으면 신화는 죽습니다. 그리스 신화가 바로 그러한 신화를 사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에 죽은 (defunct) 신화가 된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인간이 존재(being)인 이상 항상 비존재(non-being)의 도전에 직면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이러한 비존재의 상존(常存)은 유한한 존재로서 짊어지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의심과 회의를 합니다. 이런 회의와 의심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내가 현재 믿는 기독교체계가 회의된다면, 무신론자가 되는 가능성을 언제나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독교의 "하나님"이 의미가 없으면 떠나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 만남이나 책을 통해서 삶의 궁극적 의미를 다시 성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여기 토마님이 소개해 주신 Bob Altemeyer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알테마이어와 그의 동료 고 브루스 훈스버거 (Bruce Hunsberger)가 공저한 [Atheists: A Groundbreaking Study of American Nonbelievers] (2006)라는 주문한 책이 어제 당도하여 읽었습니다. 이 책에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신론자가 된 사람들의 과정을 보면 하루 아침에 무신론자가 되기보다는 상당한 기간동안 탐구를 한 다음에 최종 결정을 하더군요. 크리스챤이 되는 과정도 동일할 것입니다. 그동안 사시면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잃었다가 찾는(lost and found) 비유들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잃었다가 찾아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하는 것(discovery)이 아닐까요?

인생의 후배로서 제가 드릴 말씀은 이 정도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폴 틸리히의 설교집 [The New Being]이 있는데 번영님께 좋은 조언을 주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기독교성서나 신을 문자적으로 보면, 신은 그렇게 경험됩니다. 신은 우리가 경험한 만큼 경험되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좀 더 시간을 갖고 탐색하시고, 그동안 활발히 하시는 노인회와 장학사업에 더욱 매진하시길 빕니다. 종교적 탐구는 고독한 여정(solitary journey)임과 동시에 인생의 벗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만들어오신 관계와 공동체도 바로 신을 경험하거나 신을 버리는 매개이기도 합니다. 저는 번영님께서 기독교 신을 다시 경험하셔도 축하할 것(will celebrate)이며, 사모님의 불교로 귀의하셔도 축하할 것이며, 옛 무신론자로 돌아가셔도 축하할 것입니다. 번영님은 언제나 저의 선배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하시건, 번영님과 동일한 의심과 회의 속에 빠져 있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You are not alone; you are accepted!

도전적인 메시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배 아프리카 올림

elecbee  |  2017-03-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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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 관한 좋은 성찰이 되었습니다

prosperity  |  2017-03-1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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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아프리카님, 위 답글 감사합니다. 종교학, 인문학/사회학에 박식하셔서 아프리카님의 글들을 많은 독자들의 삶의 햋불이 되였습니다. 본래 무신론자 였다가 은퇴하든 해에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을 믿게 되여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 님의 글과 늘봄님의 글들을 읽고 새로운 깨닮음이 생겨 하나님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신화"인 것으로 개인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이 이루지도 못할 이같은 말씀을 실제로 하셨는지. 이런 말씀은 한적이 없는지 대단히 의심 스럽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7-03-1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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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cbee님, 댓글 감사합니다.

번영님, 안녕하세요.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든 우리의 인생에서 결단을 해야 하고 다시 새로운 나그네길을 가야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의 가사처럼 우리의 삶의 여정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황혼 이혼도 하고, 어떤 분은 은퇴 후에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열심을 내고, 어떤 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골이 "결혼해 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해 말아 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짦은 인생에서 아쉽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쉬움 속에서도 "유의미한"(meaningful) 삶을 살려는 의지(will)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의지가 나의 깊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용기일 수도 있고, 신을 향한 궁극적 물음을 묻는 여정일 수도 있고, 삼라만상이 주는 허무에 아스펜나뭇잎의 전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소박한 판단에 번영님께서는 최선의 삶을 사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사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평생 물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해답을 쉽게 찾으면 좋으련만, 때론 그런 질문이 마음의 가시가 되어 평생을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은 언제나 해답을 지향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는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성서 구절 역시 단번에 해답을 찾기 보다는 기존의 문자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좀 더 비판적인 성서읽기를 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성서구절은 낱말을 찾는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 동안 쌓인 지구의 지층처럼 의미의 지층을 벗겨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아직 한번도 성서읽기나 성서공부에 지친 적이 없습니다. 너무 쉽게 단답형을 찾지 마시고 성서의 전체 맥락을 보시면 그 의미가 더 생생히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사복음서 중 마태, 누가, 요한의 어느 저자도 모릅니다. 즉 이 복음서의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서 누가 이 성서를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성서가 생산된 자리 또는 이 성서를 공유한 공동체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입니다. 성서가 필사되어 각각의 공동체에서 이러한 성서 구절들이 회중 가운데 낭독되었을 때, 당시 그 회중들은 얼마나 신나고 감동했을 것인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마태공동체 역시 여러 사람들의 증언들의 모음집이 낭독되었고, 그러한 낭독의 순간 예수를 회상했을 것이며, 그러한 회상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presence)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공유된 경험은 지금 우리의 공동체에서 다시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번영님께서 예수 선생님에 대한 증언을 알아 교회에 다니셨고 또 여러 교우들과 교류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지나간 순간들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여정을 가고 싶으시면 짐을 챙겨 여행을 떠나십니다. 저는 멀리 여행은 가지 않고 주로 책 속을 헤맵니다. 저는 책읽기가 저의 명상이며, 기도이며, 염원이며, 신앙이며, 그리고 부활과 영생의 경험입니다. 마치 맑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제 기억의 하늘 속에 언어의 별들이 촘촘히 박히고 있습니다. 그 언어의 별이 제 상상의 하늘에 박히기 (constellation) 전에 제 생도 다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동안 쌓아온 성서의 메시지, 타종교와의 만남, 나그네 길에서 만난 벗들, 그리고 나무, 별, 하늘, 들, 커피, 음악, 이 모든 것들이 제 삶의 상징적 우주(symbolic cosmos)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상징적 우주를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하느님께서 제 생이 다 한 후에 한 권의 책으로 선물해 주지 않으실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인생의 물음을 묻는 벗이 되시길 기대하며...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brandnew  |  2017-03-1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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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때로는 이해 안되는 부분이 더 많지만 그래서 더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예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갈려고 노력합니다

때로는 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많지 않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보수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현대 신학의 진보적인 관점을 배척하고 무시하기 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목사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성경의 말씀 한 구절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비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수적 복음적인 신앙은 내 자신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구나는 자각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가 없이는 내가 무엇 하나 깨달을 수 없구나 하는 우주의 크기를 날마다 느끼는 것이 저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영님도 성경을 읽으시고 제가 알고 만난 하나님을 한 번 더 만나보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프리카님 앞으로도 시간 나실 때 이번 글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시겠지만 좀 더 쉬운 글로 기대하는 많은 분들을 즐겁게 해 주시면 어떨까 염치없는 부탁을 드립니다

한 권의 책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7-03-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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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new님, 안녕하세요.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개종이론 (conversion)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가 고상하거나 성서 이야기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social bond)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가듯 교회에 다니면서 크리스챤이 되기도 하고, 이민자들처럼 정보를 얻으려고 가기도 합니다. 나중에 개종의 이유를 물어 보면, 친구따라 교회 나오거나 사교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 때문이라고 증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교회 구성은 “순수한” 신앙인의 모임이 아니라 다양한 목적과 신앙적 이해를 가진 죄인들(sinners)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합지졸처럼 보이지만, 집단적 결속력이 강한 것이 종교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신앙의 질이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 관용하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죠. 교회는 운동단체가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생활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유신론, 무신론의 문제는 교회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기보다는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고 기다려주는 배려의 마음이겠죠. 좀 어려운 표현이긴 하지만, 신정통주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위에 언급된 칼 바르트는 신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어 서로가 소통이 되려면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좀 전문 용어를 쓰면,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라고 합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운 듯하지만, 신을 아는 방법은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을 믿는 신앙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의 구조는 무신론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인간과 질적으로 차이가 나서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전적인 타자로서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즉 신을 인간이 만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신을 알 수 없습니다. 신의 우리 식의 형상을 만들면 우상이 되겠죠.

그러면 전적인 타자로서의 신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신의 죽음의 신학처럼 신이 우리의 삶의 현실에 경험되지 않는데, 그러면 신은 죽은 것인가요? 신은 없는 것인가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약간 어려운 주제이긴 하지만, 철학자 Richard Kearney는 그의 책 [재유신론: 신 이후에 신으로의 귀환](Anatheism: Returning to God after God) (2010)에서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위의 anatheism은 희랍어 ana (re/again)+theism의 복합어입니다. 신을 다시 요청한다, 유신론을 다시 묻는다는 뜻입니다.

https://www.amazon.com/Anatheism-Returning-Insurrections-Critical-Religion/dp/0231147899/ref=sr_1_1?ie=UTF8&qid=1489726192&sr=8-1&keywords=anatheism

그러면 우리가 신을 다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키어니는 중요한 예로 “낯선이/타자를 사랑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다” (Loving your Other is more divine than loving your own)라고 주장합니다. “낯선이는 간단히 말해 주인인 우리가 머물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머물지 못할 초대받지 않은 자다” (The stranger, in short, is the uninvited one with nowhere to lay its head unless we act as ‘hosts’ and provide a dwelling).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히 낯선 타인을 환대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그것은 상상과 신뢰를 요한다” (Hospitality to the irreducibly Other does not come naturally. It requires imagination and truth).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에게 완전히 낯선이를 수용하지 못하듯, 우리 역시 신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믿었다고 하는 신은 사실 나의 삶에 길들여진 신, 옷을 맞춰 입듯이 우리의 옷에 맞는 그런 신 만을 골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신을 도킨스, 해리스, 히친스 등의 신무신론자들(New Atheists)이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 키니어의 주장입니다. 이와 함께 위에 소개된 스퐁이나 최성철 목사 등도 이런 유신론, 즉 지금까지 믿어온 유신론적 신을 비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미에 맞게 길들여졌거나 우리의 품새에 맞추어진 신 (tamed or tailored God)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면 그 신은 죽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번영님의 신도 번영님의 상상과 경험의 한계 안에 길들여진 하나님입니다.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면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이름이 아니라고 하듯이, 이미 나의 상상력으로 형성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와 공통분모가 전혀 없는 완전히 낯선이 (stranger)를 나의 이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마도 거의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낯선 사람도 손님으로 받아들여 환대(hospitality)를 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낯선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의 손님으로 받아 들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 기독교적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그 사랑의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낯선 사람을 환영하여 잠잘 거처를 마련해 주고 멋을 것을 주지 못한다면, 이미 우리는 낯선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낯선 타자를 환대하며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또 만났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the uninvited Guest)입니다. 낯선 사람조차 우리가 환대하지 못하는데, 전적으로 낯선 손님인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imagination)과 감정이입(empathy)의 고갈입니다.

키어니는 이 책에서 언어학자 에밀 방브니스트(Emile Benbeniste)를 인용하여 “낯선이”(the strandger)에 대해서 주인인 우리가 갖는 “양가감정” (ambivalence)의 예로 어원이 같은 “적대”(hostility)와 “환대”(hospitality)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기는 하지만, 낯선 이가 적으로 보여 적대감을 가질 것인지, 반대로 손님으로 보여 환대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낯선이가 마음이 들면, 손님이 되고, 적대적으로 보이면 적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매락에서 무신론은 우리의 신에 대한 경험을 더욱 낯설게 해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렇게 신을 낯설게 해서 멀어지게 하는 상황은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직면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의 영향으로 낯설게 된 신을 다시 초대하는 것, 이것이 Ana-atheism, 즉 신을 다시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앞으로도 계속 고뇌해야 할 일입니다. 그 전에 낯선 이를 손님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깊이 되새겨 봐야 할 일입니다.

위의 이야기가 좀 난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제 탓이 아니라 키어니의 글이 워낙 난해합니다. 그를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 책은 문학, 해석학 등이 종횡무진 인용되고 있거든요. 그래도 보면 볼수록 흥미롭군요.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westforest  |  2017-03-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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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쉬움 속에서도 "유의미한"(meaningful) 삶을 살려는 의지(will)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의지가 나의 깊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용기일 수도 있고, 신을 향한 궁극적 물음을 묻는 여정일 수도 있고, 삼라만상이 주는 허무에 아스펜나뭇잎의 전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소박한 판단에 번영님께서는 최선의 삶을 사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사시리라 생각합니다. "


아프리카님 안녕하세요?
제가 인용한 님의 글이 마음에 참 와닿습니다. 이성적인 치열함과 감성의 섬세한 반응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공감을 가졌습니다.

님의 글은 본글보다는 댓글이 더 쉬우니 앞으로 댓글로만 글을 쓰심이.. ㅋㅋ 농담이고요.
정말 이 번 글 본문과 댓글을 잘 읽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글들도 함께 잘 읽었습니다.
좋은 사색의 시간이 되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늘봄님이나 아프리카님이나 구도와 성찰의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기에 삶의 큰 맥락에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깨달음의 과정 말입니다. 인간은 흔히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에 이르고자 함이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행복할 수 있다고 믿지요.

신을 만났느냐의 문제는 결국 완전함에 이르는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근래 믿게된 바 바른 삶의 태도란 신과 일대일 맞짱을 뜨면서 "내가 인류의 대표"라는 자각을 하며 인간의 문제에 마주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존엄한 존재로서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즉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죠. 예수나 모하메드나 부처님이나 다 그런 분들 아닐런지요.

사실 종교는 필요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기에 이런 논쟁은 보편성이 좀 떨어지기도 하고 물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설명들이라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제가 이 댓글의 모두에 소개한 님의 글에 감명을 받았듯 일반적으로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사색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서의 의미는 있겠지요.

내사랑아프리카  |  2017-03-1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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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림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요. 이제 알바하러 가야 하는데, 댓글 감사합니다. 그렇죠. 생각의 차이는 서로 자극을 주는 것이라 좋죠. 다문화사회에서 같음과 다름을 경험하는 것은 행운입니다.

행복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벌써 30년은 넘었군요. 빅터 프랜클의 글을 좋아 했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에 와서 영문판으로 그의 책 2권을 다시 읽었습니다. 역시 프랜클은 재밌습니다. 어느 글에선가 아레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 반대하여, 그는 행복은 삶의 부산물이라고 하더군요. 마더 테레사가 행복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은 아니겠죠. 그녀는 평생 신에 대한 고뇌를 앓은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지만요. 저는 아쉽긴 하지만, 달라이 라마께서 지나치게 서구 개인주의자들의 영성에 맞춰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행복” 전도사의 역할을 많이 하셨습니다. 티벳 불교인들의 고행과 수행이 개인적 심리로 환원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떤 특정 심리적 면을 영성의 정수로 보는 것을 “본질주의”(essentialism)이라고 하는데 달라이 라마는 행복의 본질주의로 티벳불교를 서구에 판다고 보구요. 물론 티벳이라는 나라를 떠나 exile로서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긴 하지만요. 저는 자신이 불행해질 줄 알면서도 고통의 세계로 들어가는 대승불교의 보살정신 또는 보살행을 좋아합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는 종교 창시자들을 이상적인 모델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함마드(마호멧), 고타마 시타르타, 예수, 공자 등 이런 인물들은 이상적인 존재이고 그 이후 제도화된 종교는 전통의 외피를 입힌 것으로 무시당하곤 합니다. 창시자의 정신을 왜곡했다는 것이죠. 종교심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이런 입장을 가졌습니다. 종교창시자들이 진짜 순수한 이상적인 종교경험을 했었고 그 제자들이나 제자의 제자들은 창시자들의 순수한 경험을 외피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또 다른 편견이죠. “역사적 예수”나 “역사적 붇다”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바로 윌리엄 제임스의 관점을 따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찾아 새로운 종교운동을 하자는 것 자체의 과거 인물의 이상화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가 보는 역사적 예수는 이미 해석된 초기 종교공동체의 예수상입니다. 역사적 붇다의 경우, 신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고 보지만, 사실 역사적 붇다는 신을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붇다 이후 신은 사라지고 순수한 깨달음의 이슈가 등장했었죠.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는 신학운동과는 별도의 역사학의 대상이지 신학운동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신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상화된 종교인물들에 대해서 좀 회의적입니다. 종교창시자 중에 사기꾼도 많습니다. 교주가 사기꾼이었다고 해도 추종자들이 교주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갈고 닦는 경우도 있습니다. 윗물은 더러워도 아랫물이 맑으면 물이 정화될 수 있는 것이죠. 종교의 창시자 또는 교주를 이상화시켜서도 안되고, 종교의 제도화를 타락으로 봐서도 안됩니다. 그저 종교 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죠. 먼 수천년의 종교 교주들은 오직 영롱한 진주 같은 찬이슬 먹고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 종교 교주들은 오물만 먹고 살까요?

이런 이슈로 저는 한동안 깊은 트로마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트로마에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죠. 상담자가 피상담자(내담자)와 사랑에 빠져서도 안되고 미워해서도 안되죠. 그런데…휴우~

부족한 글에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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