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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_ [최성철의 계심정 2]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종교가 마치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을 바라는 무당집이나 점쟁이집처럼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21세기의 참 종교의 의미와 기능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종교의 목적은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부자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불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종교의 기능은 거룩한 교인과 벌레만도 못한 죄인,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교리적인 도덕이 아니며, 성속의 경계를 초월하는 삶의 방식이다; 종교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 처하더라도 참 인간됨과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종교는 내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영원함을 추구하는 현세적인 삶의 길이다; 종교는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기 보다, 모든 개체들의 우주적인 통합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종교는 타자 또는 중개인이 만든 공식과 교리와 형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거나,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체험을 통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종교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단 또는 회의주의라고 정죄하던 시대는 이미 끝이 났다.

결론적으로 종교는 평범한 삶의 언어와 행위이다. 종교는 특정 교리와 전통에 순종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Religion’ 이란 말이 최초로 동양에 들어왔을 때 번역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으며, 결국 종교(宗敎)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못된다. Religion 이란 말의 어원은 ‘relationship’(관계)이다. 종교는 두려움과 편견과 우월주의와 배타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개체들이 통합하여 전체를 이루어 온전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종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 다시 말해 전체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인간의 성숙한 삶을 위한 지혜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종교이다. 특히 종교는 타율적인 복종이 아니라, 자율적인 깨달음이다.

종교는 교회나 신전이나 사찰을 찾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행위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또한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분리시킬 수 없다.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나 자신을 위한 시간과 내 이웃을 위한 시간을 따로따로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숨쉬고 움직이고 사는 모든 것이 종교이다. 사고하는 호모싸피엔즈 인간은 종교적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난 100년 동안에 인류사회는 엄청난 격동과 변혁을 가져왔다. 첨단과학의 발달은 물론 신학, 철학, 예술, 문화의 분야가 초고속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이 거대한 지구촌이 이제는 하루 생활권이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지난 100년 동안에 수없이 많은 전쟁과 테러 사건들이 있었다. 큰 전쟁들만 열거해도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 발칸반도전쟁, 걸프전쟁, 이락과 아프가니스탄전쟁, 등으로 수 천만 명이 죽었으며, 아흐슈비츠포로 수용소 대학살과 9/11 뉴욕의 테러사건과 북아일랜드, 아프리카, 캄보디아, 팔레스타인, 등 세계 도처에서의 테러들로 인해서 무고한 생명들이 수 백만 명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전쟁과 테러는 종교적인 분쟁들이었다.

더욱이 동물과 식물과 함께 사는 인류의 집인 지구의 생태계가 이렇게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때가 없었다. 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경고하기를 이대로 가면 지구는 멸망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오직 유일하게 지구뿐인 데 지구가 죽으면 갈데올데 없이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경고다. 지구는 땅과 물과 공기와 불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광물의 생명줄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죽으면 모두가 죽는다. 인간 만이 홀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세상은 심판받아 멸망할 세상이라고 못본체 하거나, 버려두고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없다. 오직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아프리카와 호주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땅(지구)을 성스럽게 생각한다. 원주민들은 땅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땅과 함께 산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땅과 사람은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성서의 고대 히브리인들도 땅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에 7년마다 한해 동안 땅에게 안식년을 주었다. 그리고 50년마다 땅을 원소유자에게 돌려 주었다. 땅은 원래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없고, 다만 청지기로써 맡아서 잘 돌보는 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또한 원주민들은 땅 위에 사는 동물과 식물도 성스럽게 생각한다. 사냥을 할 때에도 일용할 양식 만을 사냥하며, 동물을 죽일 때에도 미안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시하고 식량으로 삼는다. 땅 만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땅과 함께 사는 모든 생명들이 성스럽다. 왜냐하면 위대한 영을 모든 만물을 통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도 위대한 영의 숨결이라고 믿는다.

영국의 신학자 로열 루는 자신의 저서에서, 종교는 인간에 대한 것이지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쉽게 말하자면, 종교는 인간이 살고있는 세계와 자연을 존중하고 아름답게 보존하는 것이지, 하늘 밖의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스러운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와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느님 따로 있고, 인간세계 따로 있고, 자연세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 하느님이 있고, 자연 속에 하느님이 있고,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다. 종교와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을 위해 사는 것이고, 인간을 해치는 것은 하느님을 해치는 것이다. 다른 인종들과 종교인들과 생태계를 해치는 것은 하느님을 해치는 것이다.

참 종교는 인간의 본능에 영향을 미치어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정의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종교적인 전통이란 마치 바이올린의 활처럼 인간의 본능이라는 줄들 위를 오가며 사람들과 사회와 자연이 상호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한다. 종교는 항상 이러한 상호작용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에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라고 도전한다. 기독교인들이 살고있는 사회적인 제도와 경제적인 구조에 대해 민감하고 심사숙고하기를 요청한다. 예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불평등 사회에 도전하고 있다. 예수는 억울하게 피해를 받는 순진한 사람과 교묘하게 이익을 챙기는 약싹빠른 사람이 생기는 불공평한 사회에 도전한다. 예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챙겨서 이것을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도전한다. 예수는 멕시코와 남미와 중국의 농장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하루에 버는 임금에 비해서 북미의 기업들은 엄청난 수익을 챙기고 있는 불공정한 시장구조에 도전한다. 예수는 기독교 정복자들과 이민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전 세계 도처에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거나 교묘하게 헐값에 사들이고 정복한 후에, 하느님이 축복하신 땅이라고 그리고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자랑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곧잘 대기업들의 CEO들과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는 남미와 아시아와 동유럽나라들의 나이 어린 직공들이 하루에 1불도 안되는 임금으로 만든 수 백 불짜리를 걸치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이 어린 직공들은 불공평한 경제구조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는 하느님을 위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땅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위한 종교이다. 특별히 예수는 하느님과 교리와 성전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기독교교회는 지난 1700년 동안 교회와 하느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형상을 입은 순진한 사람들을 악마로 정죄하고 탄압하고 살해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나의 신앙과 교회와 심지어는 하느님을 포기하더라도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가?

나눔의 정의와 양심과 정직과 사심없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과 생명들과 상호의존관계를 이루어 사는 것이 종교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기타치고 드럼치며 양손을 높이 쳐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을 부르는 것이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불교 국가, 회교도 국가, 힌두교 국가에 잠임해서 불법으로 다른 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 성경책에 메어달리고 기도하는 것만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기독정당을 만들고 기독교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살아 있나? 하느님이 살아있는 징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생명들과 자연 사이에 생명의 망이라는 깊은 관계가 살아있는 것이다. 인종과 종교 넘어 사람들 사이에 연민의 사랑의 관계가 없으면 하느님은 죽은 것이다. 이러한 상호의존관계가 죽어있는 교회와 종교는 이미 죽은 것이다. 하느님과 나와 다른 사람들 중에 누가 가장 중요한가? 하느님이 나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중요하게 되면 죄의식과 편견과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며, 내가 다른 사람과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면 이기심과 거짓과 착취와 탄압이 따른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건이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 예수가 전개한 하느님나라 운동과 한국 근대사에 동학농민운동으로 일어났다. 1860년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모든 사람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 안된다)과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의 사상을 전개하여 신흥종교 동학(東學)을 창건했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이며,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비전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과 평등사상이다.

기독교의 역사적 예수도 성전종교와 로마제국의 혹독한 탄압에 항거하여 인내천과 천심즉인심을 하느님나라 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 예수는 하느님과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정확히 공평하게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예수의 정신에 기초한 기독교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정직과 양심과 공정한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현실적이며 현세적인 종교이며, 조건없는 포용과 사심없는 사랑의 종교이다. 21세기의 종교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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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사계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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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enza, Joseph, God On Your Own, Jossey-Bass, 2006


기사 등록일: 2017-02-17
늘봄 | 2017-02-24 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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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저의 칼럼 끝부분에 본 칼럼과 관련된 문헌들을 소개합니다. 혹시 더 폭넓게 읽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본 칼럼이 나오기까지 소개된 참고문헌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대부분(90%이상)의 문헌들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다지 많지 않지만 간혹 어떤 문헌들은 절판되었거나, 희귀본으로 값이 대단히 높아서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본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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