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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계산 가능한 비극과 계산 불가능한 비극_오충근의 기자수첩
 
다시 찾아온 6월

6월은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다. 민족 비극의 전쟁은 6.25 사변, 6.25동란, 6.25전쟁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간단히 줄여 6.25라고도 부르고 외국에서 Korean war라고 부르는 걸 직역해서 한국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 전쟁은 다양한 용어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전쟁이다.
모든 전쟁은 참혹하고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이지만 6.25가 더욱 비극인 것은 전쟁 일어난지 67년이나 되었는데도 분단된 조국은 통일의 길이 요원하다는 데 있다. 북한 식으로 말한다면 ‘조국해방전쟁’인데 조국을 해방 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 시켰고 그 분단이 외세에 의한 분단일지라도 남 북한 당사자의 입장이 중요한데 남 북 모두 통일보다는 분단을 권력강화에 이용하고 있으니 그게 더욱 비극인 것이다.


나막신 장사와 우산장사

6.25의 특징은 지상전에서는 북한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밀리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대대적인 폭격으로 맞섰다.
2차대전 때 독일 일본 폭격으로 학습효과를 얻은 미군은 철도 항만 교량등 인프라 파괴를 통해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을 저지했다. 미군은 본토에서 22폭격전대와 92폭격전대를 오키나와에 전개해 북한 공습을 강화했다. 북한 전역의 군사시설, 산업시설이 폭격의 대상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 하게 포격 당한 곳은 산업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원산이었다.
원산에는 남 북한 통털어 두번째로 큰 기관차 수리 제조 공장이 있었고 동북부 최대 철도 기지인 원산 조차장이 있는 3대 간선철도의 중심지였다. 한반도 최대의 정유공장이 있고 항만의 조선소에서는 선박을 제조했다.
전쟁 기간 동안 내내 무차별 반복 포격을 당한 원산은 도시 모습을 상실하고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원산폭격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원산과 하등 관계가 없는 남한의 군대, 경찰, 학교에서 군기잡기 일환으로 실시된 가혹행위 ‘대가리 박기’를 ‘원산폭격’으로 불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북한은 낮에는 폭격을 피해 숨어 있다 밤이 되면 전시철도복구 대대를 동원해 파괴된 철도, 교량, 도로를 보수했다. 특히 철도는 전쟁수행에 필수 인프라로 전투 수행중인 60개 사단의 생명 줄이었다. 낮에 미 공군이 파괴한 시설을 밤이 되면 인력을 동원한 북한이 복구하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비가 오거나 날이 궂어 폭격이 없는 날은 북한으로서는 살판 나는 날이었다. 대신 남한에서는 비가 오거나 날씨가 사나워 폭격을 못하게 되면 발을 동동 굴려야 했으니 전쟁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성경이 틀린 말은 아닌 것으로 신이 있다면 비 오는 날은 나막신 장사하는 아들 걱정, 맑은 날은 우산 장사 아들 걱정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피난민 1호의 건국 아버지

전쟁이 시작된 일요일 아침 이승만은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덕궁 반도지에서 낚시에 몰입해 무아지경에 빠진 건국 아버지에게 경무대 김장흥 총경이 달려와 전쟁이 일어났음을 고했다. 국무회의를 주재한 후 이승만은 발 빠르게 긴급명령1호를 발표했다.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그것으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9.28 수복 이후 수많은 시민을 부역자로 몰아간 법령이었으니 이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는 적을 막는 것보다 적에 협조할지도 모르는 국민을 더 의심하고 두려워했으니 국민을 잠재적 적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 날 이승만은 무초 미국대사를 만나 “내가 공산군에게 잡히면 나라가 곤란해지니 피난을 가야겠다.”고 운을 떼었다. 무초 대사는 “그야 잡히게 된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래도 서울을 지켜야 한다.”고 잔류를 권고했다. 국군 통수권자이자 최고사령관이 전시에 수도 서울을 지켜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회에서도 의원들이 모여 서울 사수를 결정해 경무대에 알리러 갔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은 서울에 없었다. 국부께서는 피난을 고집해 6월27일 새벽3시 피난민 1호로 서울을 빠져 나갔으니 임진왜란 일어났을 때 백성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할 것을 궁리한 선조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단 바람에 대구까지 달려온 국부는 “내가 너무 멀리 왔나” 싶어 대전으로 발길을 돌리는 웃지 못할 연극을 연출했다.


국민 속이는 건국 아버지

6.25 당시 KBS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유병헌에게 경무대 김장흥 총경이 찾아와 충남도지사 관사로 데려갔다. 도지사 관사 응접실에는 이승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기를 이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저녁 9시에 내가 이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 전국에 중계해서 전 국민이 듣게 하라. 4.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에서 녹음했다 밤에 여러 번 재방송하라. 5. 누가 묻던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것을 발설하지 마라. 6. 대통령이 방송한다는 것을 미리 누설해서는 안 된다 고 다짐 받았다.
유병헌은 이승만 지시에 따라 방송준비를 하고 서울 중앙방송국 조종실까지 중계선로를 개통했다. 김장흥은 권총을 빼 들고 앉아 있었다. 유병헌은 중앙방송국 왕종현에게 이유는 묻지 말고 방송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승만은 천연덕스럽게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고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인데도. 이 방송을 듣고 안심한 서울시민들은 피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앉은 자리에서 부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부역자 색출, 또 다른 동족 상잔의 비극

6.25는 같은 동족인 남북이 총을 겨눈 동족상잔의 전쟁이나 동족상잔의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남남간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의 골은 더욱 깊었다.
이승만은 9월29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승만이 서울에 돌아와 한 일은 부역자 처단이었다. 시민들 기망하고 도망한 죄를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할 사람이 거꾸로 시민들을 빨간 물 들은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 그러나 피난 안간, 혹은 못간 사람들은 “동요하지 말고 가만 있으라”는 정부와 군의 말을 믿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 기회를 놓친 사람들로 정부 말을 믿은 죄 밖에 없다.
그러나 군, 경찰, 반공단체에서 전시라는 특수상황에서 부역자로 낙인 찍힌 희생자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적법한 재판 없이 처형되었으니 학살이라는 게 옳은 표현이다.
고양군 홍제리(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주둔해 있었다. 1950년 12월15일 마포 형무소 경비대 소속 군인들이 포승줄에 묶인 죄수들을 트럭에서 내린 후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무릎 끓인 후 소총을 난사해 살해했다. 그 중에는 초등학생 어린이도 2명 있었다. 다음 날 35명의 죄수가 또 끌려왔다.
이것을 잔인한 전쟁범죄로 규정한 영국군은 경비대 병력을 무장해제 시켰다. 브로디 여단장은 이런 일이 더 생긴다면 경비대에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경고해 학살을 중단 시키고 병력을 파견해 더 이상의 학살을 막았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 학살은 전국 방방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부역자 학살의 대부분은 억울한 희생자들이다.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진짜 부역자들은 후퇴하는 인민군 따라 월북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들, 계산 불가능한 비극

6.25가 남긴 외형적 비극, 총 사망자가 몇 명이라던가 파괴된 기간시설이 금액으로 따져 얼마라던가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가 몇 명이라던가 이산가족이 몇 명 생기고 등등 그런 외형적 비극도 비극이지만 계산할 수 없는 비극도 존재한다.
6.25 직전인 5월30일 치러진 2대 총선에서 이승만이 총재로 있는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의석은 14석, 신익희가 위원장으로 있는 민주국민당은 24석, 윤치영이 당수로 있는 대한국민당은 24석을 차지했다. 나머지 60%는 무소속 당선자로 이승만 정권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지 증명되었다.
인기가 땅에 떨어져 정치생명이 위태로운 이승만을 살린 것이 6.25로 결국은 김일성이 이승만을 살린 것이다. 전시 계엄 상황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이승만은 반공을 앞세우며 부산 정치파동, 발췌 개헌으로 억지를 부려 기사회생 할 수 있었으니 이승만은 6.25때 살아남은 최대의 수혜자라고 볼 수 있다.
계산 불가능한 비극은 또 있다. 6.25로 인해 친일파 정리가 동력을 완전히 잃었다. 친일파 처리에 미온적인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6.25가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리는 격이 되었다. 친일파 정리해서 민족정기 살렸다는 북한으로 인해 일어난 6.25가 남한에서는 친일파에 면죄부를 주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반공이라는 우산 밑으로 친일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친일이라는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더욱 극성스럽고 악랄하게 타도 공산당을 외쳐 살아남아 한국 사회의 주도세력, 기득권 세력이 되었으니 이들이야말로 6.25의 수혜를 톡톡히 입은 자들이다.
6.25로 일본의 2차대전 전범들도 살아남았다. 패전국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태도는 분명했다. 일본이 재무장 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고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으로서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교두보로서 일본의 역할을 재조정해야 했다.
A급 전범으로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기시 노부스게를 비롯해 전범들도 살아났다. 기시 노부스게는 형무소에서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미, 소 냉전이 격화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된 것이다. 6.25 끝난 후 석방된 기시 노부스게는 자민당 주축세력이 되더니 나중에는 일본 총리가 되었다.
살아난 전범들이 평화헌법을 무시하고 우경화 되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심어주고 여성을 성 노예로 삼은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우기고 있으니 6.25가 빚어낸 보이지 않는 비극, 계산 불가능한 비극이다.

신문발행일: 201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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