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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을 헤치고_2, 글 : 류지성(캘거리 교민)
본 내용은 CN드림 신문 16호(4/4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정글을 헤치고_두번째


해외 건설현장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1년을 가족과 떨어져서 하루도 쉬지않고 매일 똑같이 일만하는 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좋은점은 우선 쉬는날이 없다 보니까 지출이 적고 수입은 늘고 국내처럼 공사가 끝나면 또 다른 현장을 찾아 떠돌아다닐 염려가 없고 그러다 보니까 가계의 계획경제를 실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폭염 속에서 밤낮없이 일하다 보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집 생각, 가족생각에 머리가 거의 회전(?) 해버리는데, 6개월이 지나면 내리막이 시작되니까 이때부터 시간은 족쇄 채운 발목이 된다. 그래서 오전 끝나면 달력 날짜 난에다 이렇게 / 긋고 저녁 먹고는 반대로 긋고 해서 하루를 X로 마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해외현장에서는 기술보다는 탕수가 우선이라고 전에 언급을 했는데 같은 탕수일때는 귀국일자 적게 남은 사람의 말빨을 애교로 세워준다. 많은 사람들이 순서대로 귀국했다가 재계약을 하고 얼굴이 탈색이 되서 오곤 했는데 귀국하는걸 보고 그렇게 부러워 했다가 한달 후에 다시 오면 첫인사가 그랬다. "다음 휴가가 언제입니까??라고.

한 용접공이 있었는데 용접할 때 쓰는 짙은 플라스틱 보안경을 몇개 빼돌려서 귀국인편으로 집에 보냈는데, 부인이 보니까 영어로 쓰여있고 생긴 건 약간 이상하지만 최신 모델이라 생각하고 잘 보관하고 있었다. 드디어 이 친구가 귀국하는 날 김포공항에서 가족상봉을 하는데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부인께서 그 용접안경을 끼고 폼을 잡고 있더라는거다. 당황한 이 친구는 동료들이 볼까 봐 다급히 소리친게 "당신 빨리벗어"라고 하니까 부인은 부인대로 이 양반이 아무리 외국물을 먹었다지만 여기서 뭘 어쩌자는거냐 하며 황당해하고 이 친구는 계속 벗어라 했다는 이야기 덕에 우리는 용접안경을 [벗어 안경]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온갖 고생 참아 가며 조금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묵묵히 일하는 반면, 일부 garbage 같은 인간들도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이 이제 막 들어서면서 국민들에게 인심 좀 얻어보려고 전과 3범 까지 인가는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던 것이다.

여기에 편승해서 나와서는 안될 인간들까지 묻어나왔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폭력 전과자들이다. 주먹을 제대로 쓰면 그나마 국내조직에서도 받아주겠지만 그런 자격조차도 없는 것들이 해외현장에 나오면 일하기는 싫고 기술도 없고 돈은 쉽게 벌고싶고 그래서 점 찍는게 직원들이다. 어떻게 해서든 괴롭히고 건드려서 따귀라도 한대 맞게 유도를 한다. 그런 다음 중도귀국을 하는데, 6개월이내에 귀국을 하면 왕복항공료를 본인이 부담해야 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직원집에 밤낮없이 찾아가 부인과 애들을 괴롭히며 요구하는 엄청난 액수의 합의금을 결국은 다 주어야 한다. 당신남편의 폭력때문에 현장생활을 못하고 인생을 망쳤으니 보상해 내라고 심야고 새벽이고 찾아와 행패를 부리면 눈물로 쓴 부인의 편지를 받고 이역만리에서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그 직원은 더운데서 고생한걸 이름모를 garbage 한테 다 뜯기고 마음고생하는 그런 사례도 종종 있었다. 나도 여기에 걸렸다가 숙소를 세번이나 몰래 옮겨다니는 수모를 겪었다.

새벽녂에 자는데 내 몸을 올라타고 목을 조르는데도 그 수법에 말리지 않고 인내로 도망을 다녔다. 해외 6탕인 고참 과장의 충고이자 지시를 받아들였기에 그나마 거기서 끝날 수 있었다. 결국 그놈은 딴 직원을 골라서 목적달성을 하곤 어느날 현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후부터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경우에 어긋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바늘 끝 만큼도 자비를 베풀지 않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현장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직원 인사위원회를 열어 얼마동안 일을 못하게 하는 camp stand by라는게 있다. 숙소에서 정해진 일정기간동안 대기해야 하는데 그래도 물론 기본8시간은 준다. 자주있는건 아니지만 이걸 한번 먹었다 하면 그 회사와는 영영 끝이다. 모두가 다 일 나가고 혼자 잠이나 자다가 밥때되면 밥 타먹고 저녁에 동료들이 일 마치고 와서 오늘은 얼마를 벌었네 하며 자랑하는걸 듣자면 감옥이 따로 없다는거다.

대신에 땡볕에 땀 흘리지 않고 시원한 에어콘 아래서 며칠이고 푹 쉬니까 얼굴도 몰라보게 달라지고 체중도 늘고 그러니 꼭 보약을 먹은것 같다고 해서 스텐바이라 하지않고 모두들 보약이라고 불렀다.

한 보약 환자가 있었는데 그달 송금액이 현저히 줄어 부인한테 편지쓰기를 이달엔 스텐바이를 일주일간 먹어서 수령액이 전번 달하고 차이가 날테니 힘들겠지만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그래도 스텐바이 덕분에 몸이 확실히 좋아지고 피로도 덜 느끼게 됐다고 추신을 달았다. 얼마후 부인의 답장이 왔는데 돈 몇푼이 중요한게 아니다, 우리걱정은 조금도 하지말고 그런데 그 스텐바이란게 그렇게 효과 있는거라면 돈걱정 말고 당신을 위해서 꾸준히 잡수도록 하시고 혹시 귀국때까지 드시다가 남으면 친정아버지 드리게 좀 가져오라는 주문도 함께 왔다고 한다.

현장 작업조건이 혹독하다보니 담당기사인 나에게 오만가지의 주문과 요구가 다 들어오는데 오랫동안 한솥밥을 같이 먹다보니까 누가 꾀병이고 누가 진짜인지를 금방 알게되었다. 꾀병이다 싶으면 나는 항상 그랬다. 그렇게 힘들어 하시면 제가 보약을 한재 지어드릴테니 우선 일주일만 드시고 그래도 차도가 없으면 한달분을 더 먹도록 합시다. 그러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갔다. 역시 보약이 좋은 약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더운데서 하루종일 그 사람들하고 같이 웃다가 싸우다가 뒹굴다가 그럭저럭 1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오랫동안 노가다한 그사람들의 눈에 비로서 내가 정식 현장기사로 비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사는 현장의 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지? 해병대서 부임첫날 무장간첩 잡아오라고 엄동설한에 산골짝으로 내 몰릴때 나를 보던 소대원들의 그 불안해 하는 눈빛들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2년후 고참이 되서 또 간첩작전을 나갔을때 나를 보는 대원들의 안도의 눈빛과 여유있는 표정 또한 잊을수 없고.. 시간은 모든것을 해결한다는 진리를 그때 배웠던것이다.

휴일이 다가오자 마음은 벌써 한국에 가있었는데 가봐야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지만 괜히 마음이 설레였다. 새까맣게 탄 얼굴이며 팔을 바꿔보려고 더운데도 긴소매를 입고 볼일도 없는 도면으로 햇볓을 가리고 다녔다.

인부들은 인사가 "기사님 이제 얼마 안 남았죠?" 하며 마치 자기들 일처럼 관심을 가져주었고 정말 1년이 이렇게 갔구나 하는 생각에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자 만감이 교차했는데 처음 이곳에 올때의 그 막막함, 호텔에서 재탕, 삼탕한테 당한일, 그리고 현장생활등. 내 스스로를 봐도 자신이 쑥 커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귀국해서 입사동기인 군대동기생들과 주로 어울렸는데 그사이에 대부분 결혼을 했거나 하려는 친구들이라 마시다가도 집에있는 집사람들을 더 의식하는것 같았고 물론 몇몇은 그래도 며칠씩 함께 밤을 세워주며 객고를 푸는데 동참해 주었지만, 3년이상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고 친형제 이상의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동기생들이 불과 몇 달 안된 배우자에게 비중을 두는걸 볼때 마음이 암연히 수수로웠다.

회사조직에 하루라도 빨리 흡수되어 제 위치를 찾으려는 어색한 몸부림을 치는 친구들도 있었고 놈들은 마치 초겨울 물먹은 땅이 꾸덕꾸덕 얼어가듯이 그렇게 사회인으로 바꿔지고 있었다.

그 당시 국내초봉이 20만원대였는데 우리는 해외수당, 상여금 등등으로 약 4배가량을 받았다. 그무렵 서울아파트 분양가가 평당 100만이 훨씬 못 미쳤으니 한달에 약 1평씩을 봉급으로 받은셈이 된다.

여기에 융자받고 조금 빌려 보태고 하면 해외 한탕에 20평형 아파트 하나를 장만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그러나 그건 결혼을 했거나 재테크를 하는 친구들 이야기이고 나는 한달동안 다른 방향으로 거의 다 소진을 했다.

신촌으로 강남으로 때론 영등포도 다니면서.. 재미있는건 술집도 수준에 따라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더라는거다. 예를 들면 영등포쪽의 이름들이 순정.못잊어. 모정. 갈대 이러면 신촌쪽은 약간 업그레이드 되어 비서실.우산속. 무인도 등 그런식이었고 강남쪽은 이름에서부터 벌써 기품(?) 이 풍겨 나왔다.

현궁. 가야. 서진. 대풍 그 뜻을 알듯말듯한 하여간 아리송한 이름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면은 또 1년인데 초탕땐 몰라서 이런가보다 했지만 그 내막을 아니까 얼마나 지겨울까 그래서 마시고 또 마셔댔다. 결혼한 친구들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해서 소중한 휴가를 의미(?) 있게 보내고 아무도 전송 나오지 않는 김포공항을 떠났다.

비행기 날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불안도 희망도 기대도 하질 않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나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다음 휴가가 언제입니까?" 말레이지아 편 끝

다음 호는 사우디 아라비아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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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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