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교황 발전의 제도 _ 간략한 기독교 역사 17
1. 교황의 시작 수도원 운동과 더불어서 중세에 통일성과 지속성을 제공했던 것은 교황제도였다. 원래 "교황"(pope)이라는 단어는 "아버지"(father)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초기에는 모든 중요하고 존경받는 감독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교황"이나 혹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교황"등을 언급한 문서들을 볼 수 있다. 즉 서방에서는 단지 로마의 감독들을 가리키는데 국한되었으나 동방에서는 계속하여 보다 널리 사용되었다. 어쨌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교황"이라는 칭호의 기원이 아니라, 과연 어떻게 하여 로마 감독이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권위를 누리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로마 감독제의 기원은 지금까지도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학자들은 대부분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곳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2세기 말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로마초기 감독들의 각종 명단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 기독교 초기 시대의 숫자적 성장은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안디옥이나 알렉산드리아 등의 교회들이 로마의 교회보다 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방에서도 교회의 신학적 지도력은 터툴리안, 키프리안, 그리고 어거스틴등의 인물들을 배출한 북아프리카에서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교황의 권위가 크게 강화되었다. 동방의 제국은 1000년 가량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법과 질서 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의 유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교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방에서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감독, 즉 로마의 감독이 침략자들에 의해 무너진 통일성을 회복하는 핵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는 가장 전형적인 예는 흔히 "대 레오"(Leo the Great)라고 불린 인물인 바, 그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인물이다. 레오는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 침략될 때마다 야만족과 대화를 통해서 여러 차례 로마를 보호하였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레오는 로마시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개인적인 재능 때문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세속 관리들의 능력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레오는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교회가 건축되는데 기초석으로 삼으셨으므로 베드로의 직계 후계자인 로마의 감독들이야말로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확신했다. 이에 따라 우리들은 레오의 기록 속에서 그 후 교황이 절대적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전통적 이론들을 발견할 수 있다. 2. 교황제도의 확립 - 그레고리 그레고리야말로 역사상 교황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는 540년경 전통적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로마 출신이다. 그레고리는 로마의 감독이 되기 전부터 로마가 파괴, 전염병, 혼란 등 여러가지 어려움에 시달리던 것을 경험하였다. 처음에는 로마교회의 감독직을 사양하였다. 하지만, 로마 감독이 되어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레고리는 자신을 종교 지도자로 생각했다. 그는 로마의 여러 교회에서 계속 설교를 행하면서 신자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는 이탈리아 전체가 규범화되기 시작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실질적으로 지키지 않았던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보장키 위한 조처들을 강구했다. 또한 그레고리는 로마의 감독이라는 직위를 서방 교회 전체의 통치자로 생각했다. 그레고리는 고대의 여러 위대한 선배들, 특히 성 어거스틴이 이미 가르치지 않은 내용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큰 자랑을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힙포의 위대했던 감독의 제자로 생각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와 그가 존경했던 어거스틴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그레고리는 미신과 맹신과 무지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시대의 영향으로 어거스틴을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어거스틴은 끊임없는 탐구를 가지고 문제들을 제기하며 연구하였는데, 그레고리는 이것을 오히려 확정된 진리로 받아 들였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은 죄 중에서 사망한 자들을 위해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 죄를 정화시키기 위한 장소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추측을 기초로 하여 이러한 장소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단정함으로써 그 후 "연옥의 교리"가 발전될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구원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그레고리는 어거스틴의 교훈을 변질시켰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레고리는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예정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를 도외시하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은 죄에 관하여 하나님이 만족하실 만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가에 보다 큰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고행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설명하였는데, 고행은 진정한 회개(contrition), 고해(confession), 그리고 실제의 처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덧붙여서 사제로부터의 사죄가 첨가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용서를 추인하는 행위이다. 교회와 계속 교제하는 가운데 사망한 신앙인이 만약 자기의 지은 모든 죄에 관한 속죄를 제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최종적 구원을 얻기 전에 연옥으로 가게 된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은 연옥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미사를 올림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레고리는 미사 혹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가 새로이 희생된다고 믿었다(그가 미사를 드리는 도중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전설도 있다). 이와 같은 희생으로서의 미사라는 개념은 그 후 서방교회의 표준적 교리로 정립되었다가 16세기에 비로소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부인되었다. 그레고리는 죄 중에서 죽은 어떤 수도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수도원장 - 그레고리 자신 - 은 그를 위하여 매일 미사를 드리도록 명령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30일 후에 다른 수도사에게 나타나 이제 자기가 연옥에서 해방되어 천국으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이 이야기, 혹은 이와 비슷한 전설들은 그레고리가 조작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당시의 분위기와 일반적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기독교 교사들이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서 미신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는데 반해,그레고리는 당시에 널리 유포되던 여러 전설들을 마치 기독교 신앙을 반영하고 인정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그레고리의 후계자들 이후로 교황청은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5/6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5-24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캐나다 소득세법 개정… 고소득자..
  앨버타 집값 내년까지 15% 급..
  첫 주택 구입자의 모기지 상환 ..
  로블로 불매운동 전국적으로 확산..
  에드먼튼 건설현장 총격 2명 사..
  개기일식 현장 모습.. 2024.. +2
  해외근로자 취업허가 중간 임금 ..
  앨버타 신규 이주자 급증에 실업..
  앨버타 주민, 부채에 둔감해진다..
  연방치과보험, 치료할 의사 없어..
댓글 달린 뉴스
  2026년 캐나다 집값 사상 최.. +1
  개기일식 현장 모습.. 2024.. +2
  <기자수첩> 캐나다인에게 물었다.. +1
  캐나다 무역흑자폭 한달새 두 배.. +1
  캐나다 동부 여행-네 번째 일지.. +1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