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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승려 의천_오충근의 역사기행
 


정치와 종교
정치와 종교는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이상적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상부상조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 이슬람, 불교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다. 불교가 조선시대 이후 힘을 잃고 나서는 속세를 떠나 참선, 기도만 할 것 같아도 고려 이전만 해도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왕자들 중에 머리 깎고 출가는 왕자들이 있었다. 고려를 대표하는 승려 대각국사 의천도 왕자로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종은 넷째 아들과 여섯째 아들을 출가 시켰다. 왕자가 머리 깎고 출가하겠다는 것은 불심이 돈독해서 혹은 아들 중 한 명을 불제자로 보내면 부처가 믿음을 갸륵하게 여겨 왕실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미신적 믿음에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왕자를 통해 불교를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왕자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승려가 되면 최단 시일에 불교계 최고 지위에 오른다. 의천은 10살에 승려가 되었는데 불과 2년만에 불교계 최고 지위인 승통이 되었다. 문종의 여섯째 아들 왕규도 승통으로 속리산 법주사에 기거했다.
도생승통 왕규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다. 법주사에 기거하던 도생승통은 예종 때 역적모의 했다는 죄명으로 거제로 귀양 갔다 거기서 죽었다. 도생승통은 언제 태어났다 언제 죽었는지 기록이 없고 문종 24년(1070년)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에 비해 의천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족적을 따라 가 볼 수 있다.

12살에 승통이 된 의천
요즘 태어났으면 초등학교 5-6학년쯤 되었을 나이에 문종은 의천에게 우세승통 지위를 부여했다. 달라이 라마가 환생을 하는 것도 아닌데 12살 나이에 승통이 된다는 건 왕자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천은 송나라 화엄종 고승인 정원법사와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이왕이면 송나라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문종은 의천이 송나라 가는 것을 반대했다. 승려이기 이전에 고려의 왕자인데 고려 왕자가 송나라에 가서 있는다는 것은 요나라(거란)와 외교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요나라는 고려가 송나라와 연합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문종이 죽고 순종이 왕위에 올랐다. 순종은 문종의 장남이니 의천에게는 큰형이다. 그러나 순종은 왕위에 오른지 4개월도 못되어 죽었다. 순종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두고 둘 째 국원후와 셋째 계림공이 경쟁을 하다 국원후에게 왕권이 돌아갔으니 그가 선종이다.
둘째 형이 왕이 되자 의천은 송나라 가서 불경 공부하겠으니 보내달라고 청을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거란과 관계를 들어 “그거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겁니다.”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자 의천은 선종와 모후에게 편지 한 장 남기고 밀항을 해 송나라로 갔다.
왕명을 어기고 밀항 하는 것은 죽어 마땅한 죄지만 의천은 왕자이자 왕의 동생이라 처벌은커녕 선종이 관리를 파견해 의천의 시중을 들게 했다.

소동파와 의천
당나라 송나라 때는 문화 인프라 구축에 많은 힘을 써서 특히 인문학 발전을 가져왔다. 당송팔대가라는 8명의 문장가도 당, 송 시대 사람들로 8명의 문장가 중 소순 소식 소철은 부자 형제 사이로 이들을 3소라고 하는데 소순이 아버지이고 소식 소철은 형제인제 소식이 적벽부로 유명한 소동파다.
소동파는 뛰어난 문장가로 고려에서도 흠모의 대상이었다. 먹물께나 든 사람들은 물론 먹물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도 소동파는 널리 알려진 유명인물로 이소룡, 장국영, 등려군 을 합한 것 보다도 더 인기 있었을 것이다. 입시 준비생(과거를 앞둔 선비)의 최대 소망이 과거 합격하면 소동파 시 읽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소동파는 대표적 혐한파로 고려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었다. 고려는 거란의 앞잡이로 송나라 사정을 거란에 누설한다고 사신 오는 것도 막았고 고려 사신 접대비로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게 낫다고 상소 올리고 고려가 송과 국교 맺는 것은 고려의 국익을 위한 것이므로 수교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의천이 송에 밀항 한 때가 소동파가 항주태수로 있을 때인데 고려 왕자를 수행해 황제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후 의천은 일년 동안 송에 머물며 화엄종 정원법사를 만나 설법을 듣고 천태종 고승들을 만나 강론을 들었다. 귀국 직전에도 천태종 창시자 지자대사를 방문해 고려에 천태종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했다.
의천은 귀국해 흥왕사 주지가 되었는데 정원법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 조문을 했다. 조문 길에 인예태후가 금탑 2개를 기증했다. 그러나 항주 태수 소동파는 고려가 정식 외교 통로를 거치지 않았다 해서 의천의 제자들을 감금하고 금탑은 돌려보냈다.
“오랑캐는 선물을 받고 답례를 하지 않으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답례를 하는 것은 오랑캐 계책에 넘어 가는 것이다.” 소동파는 지방관 재량으로 처리하겠다고 황제에게 상주하고 금탑을 돌려보내고 의천의 제자들도 추방하다시피 고려로 돌아왔다.

왕권과 골육상쟁
고려시대에는 아들뿐 아니라 동생들도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문종이 죽고 순종이 왕위에 올랐다 4개월도 채 안되 죽자 선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 때도 국원후(선종, 문종의 둘째 아들)과 계림공(문종의 셋째 아들) 사이에 왕권 다툼이 있었으나 국원후에게 왕권이 돌아갔다.
계림공은 조선의 수양대군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권력욕이 대단했으나 형 들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선종과 권력 다툼에서 밀렸으나 포기하지 않고 왕권을 노렸다. 선종도 동생 계림군의 권력욕을 알고 있어 일찌감치 후계자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선종 5년 왕은 동생들과 왕실의 친인척을 태자궁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후계자는 동생이 아니라 아들에게 있음을 알린 것이다. 그러나 계림군은 포기하지 않고 세력을 키워 심복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소태보가 이부상서로 인사권을 쥐었고 상장군 왕국모가 군권을 쥐었다. 계림군의 장인 유홍은 판병부사로 무신의 인사권을 쥐었다.
수양대군은 고려사를 읽으며 “나도 계림군처럼 하면 권력을 쥘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선종8년부터 왕의 병세가 심상치 않아졌다. 그러자 계림군 계열의 인물들이 조정에 늘어났다. 그러나 계림군 견제 세력도 있었다.
왕의 병세가 깊어지자 계림군은 입궐해 왕을 만나려 했다. 왕을 만나 압박을 해 왕권을 차지할 생각이었으나 왕의 비서 곽상은 “정식 절차를 통해 면회 신청을 하라”고 돌려보냈다. 선종은 1094년 5월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조선시대 단종에 해당하는 헌종이었다.
헌종은 나이가 어려 모후 사숙태후가 섭정을 했다. 그러나 계림공 세력에 비해 사숙태후 세력은 미약했다. 의천이 천태종을 창건한 것은 계림공을 위해서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 인예태후는 불심이 깊어 아들 의천이 있는 화엄종의 경전인 화엄경을 베껴 쓰는 작업을 했고 친정동생 소현이 속해 있는 유가종의 서적 편찬을 후원하기도 했다.
왕실의 최고어른으로 이편도 저편도 들 수 없었으나 의천은 화엄종에 속해 있으면서도 천태종을 세워 계림군을 후원했다. 의천은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불교계가 계림공을 왕으로 추대하는 작업을 하다 형수인 사숙태후 눈 밖에 나 흥왕사 주지에서 밀려나 해인사 주지로 좌천 되었다.
그러나 의천은 해인사에서도 불교계를 규합해 적극적으로 계림군을 도왔다. 헌종을 위해 충성하는 세력은 모후 인주 이씨뿐 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주 이씨 세력은 위축될 때라서 계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계림군은 헌종과 사숙태후가 알아서 물러가 주기를 바랐으나 인주 이씨가 세력을 강화하려 하자 선수를 썼다.
헌종이 왕위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실력행사에 나서 인주 이씨 세력을 제거하고 병권을 쥔 왕국모가 대궐을 점령했으니 수양대군 계유정난 훌륭한 전례였다. 계림공은 중서령에 취임했다. 중서령은 백관의 으뜸으로 명예직이고 실권은 문하시중에게 있으나 계림공은 중서령으로 실권을 행사했으니 이것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후 영의정이 된 것과 똑같다.
조정은 계림공 쪽 사람들이 모두 차지했다. 이런 가운데 나이 어린 헌종이 왕위에 있는 것은 바늘 방석 위에 있는 것이다. 헌종과 사숙태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재위 5개월만에 삼촌 계림공에서 선위하고 물러났으니 계림공이 왕위에 올라 숙종이 되었다. 헌종의 시호 헌(獻)은 받들어 바친다 라는 뜻이니 왕위를 바치고 물러난다는 아름답지 못한 시호다.
고려사에는 왕이 선위 하니 계림공이 두 세번 사양하다 마지못해 받아들였다고 했으나 의천의 기록에는 헌종을 폐주라고 기록했으니 실제로는 선위가 아니라 강제로 빼앗고 왕을 폐위 시킨 것이다. 계림공이 사양 한 것은 진심이 아니라 의례적인 사양인 것이다.
헌종은 부왕 선종이 태자 시절 기거했던 홍성궁에 살기를 원했다. 숙종(계림공)이 허락하자 홍성궁으로 옮겨 살다 불과 14세 나이에 죽었다. 헌종은 숙종 일파에게 살해 당했을 것이 확실하나 숙종은 송나라 요나라에 헌종이 질병으로 죽었다고 알렸다.
의천은 아버지가 왕이요 위로 형 셋이 모두 왕이었으니 조선시대 아버지와 동생을 왕으로 둔 양녕대군 비슷한 사람이다. 그러나 양녕대군과 달리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개혁을 통해 왕권 강화에 이바지했다.
의천은 셋째 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흥왕사 주지로 복귀했다. 그는 불교 통합으로 왕권 강화를 도왔고 화폐의 유통을 주장했다. 동전 유통을 통해 이익을 창출해 국고를 충실하게 하자는 것으로 동전 유통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 사고였다. 의천은 동전유통뿐 아니라 신법 개정을 주장해 왕권 강화에 이바지 했다.

기사 등록일: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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