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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 세계관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 [최성철의 계심정 6]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대 성서의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과학책 또는 역사책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저자(들)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 준 책이 아니다. 즉 성서 저자들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는 말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의 뜻은, 성서는 인간들이 평범한 삶 속에서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험한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 즉 자율적으로 깨달아 알게 된 궁극적인 진리를 하느님으로 표현한 순수한 인간의 작품이다. 물론 성서저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와 지식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를 극복하기 위해 시와 신화를 이용하여 은유적으로 기록했다. 성서는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책이다. 다시 말해, 성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인간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책이다. 결론적으로, 성서는 애당초 은유적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서저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형식과 목적으로 성서를 기록했는지에 대한 성서비평(역사비평, 양식비평, 문학비평, 편집비평, 전승사비평. . .)이 필요하다. 성서비평은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성서를 새롭게 다시 읽을 수 있다. 교회의 성경공부반은 교인들에게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히고, 교리를 주입시키는 타율적인 교육 보다 성서비평을 통해 교인들이 스스로 성서의 진리와 지혜를 탐구하는 자율적인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편, 창조론을 믿는 극소수의 과학자들은 구약성서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두 개의 서로 다른 창조 이야기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고대의 성서 저자들은 현대과학과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에 대해 상상도 못했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이란 말과 그 개념은 17세기 이후 뉴톤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 고대 성서는 과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직 세속적인 세상에서의 체험적인 삶을 시적으로 기록한 신화적인 책이다. 21세기에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는 삼층 세계관적으로 믿고, 세상에서는 우주진화적으로 사는 이중적인 믿음은 큰 모순이며, 자신과 세상을 기만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해가 된다. 니케아 신경이 로마제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이후 지난 1700년 동안 이러한 이원론적 신앙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과학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다. 성서를 신화들의 모음집이라고 생각하고, 은유적으로 읽는 것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불신앙도 아니다. 오히려 성서에게 솔직하고, 21세기에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에 대해 심층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성서의 역사비평은 이렇다: 창세기 1장의 천지가 창조된 이야기(참고: 창세기 2장의 인간이 창조된 이야기는 1장의 이야기보다 먼저 기원전 1000년 경에 기록되었다.)는 대략 바벨론 유배시기(기원전 587년) 전후이다. 바벨론 제국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민족의 새로운 정체성과 민족이 단결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했다. 따라서 성서를 재편집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정립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이다. 물론, 창조주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오직 기독교 성서에만 있는 유일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형태의 신화(神話 Myth)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학형식이었다. 고대인들은 자연현상들과 삼라만상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로움과 황홀함을 표현하기 위해 신화라는 문학적 장르를 사용했다. 창세기의 삼층 세계관은 당시 고대 중근동의 수메르 지역에 거주하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보편적인 신화적 세계관이었다. 또한 수메르 지역은 고대 중근동 신화들의 고향이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향이 수메르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우르였다.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 온 후에도 후손들은 여전히 당시 중근동 지역에서 보편적이었던 삼층 세계관에 기초한 신화적 문화 속에서 살았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뿌리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삼층 세계관의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관과 종교 역시 중근동 지역의 삼층 세계관과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기원후 1-2세기에 기록된 신약성서도 삼층 세계관의 로마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변으로부터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교회의 미래가 있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외면할 수 없다. 또한, 21세기의 우주진화 이야기에 근거하여 오직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과학시대에 기독교의 미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희망적인 미래는 무엇인가? 기독교교회는 우주진화 이야기를 기초로 인간과 생명체들을 포함한 세계적 문제와 자연과 생태계의 위기를 새로운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현세를 버리고 내세로 가는 것이 기독교의 미래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첨단과학시대의 기독교는 이러한 질문과 도전을 외면하기 보다 이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더 늦기 전에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삼층 세계관을 버리고, 우주는 한 몸이며,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는 우주진화적 세계관을 포용할 때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고대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실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5세기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학의 골격을 이루어왔다. 사도신경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고백한다. 그리스도론의 성격을 결정한 사도신경의 세계관은 갈릴레오 이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삼층 세계관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잉태했다는 것은 바로 삼층 세계관에서 가질 수 있는 필연적인 표현이다. 즉 신들이 살고 있는 상층의 하늘로부터 인간이 살고 있는 중간층으로 사람의 몸으로 내려온 하느님이 예수다. 여기에서 성육신 또는 임마누엘 사상이 생겼다. 성육신한 예수는 인간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형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층 세계관에 의하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 우편에 앉아 있다가 최후심판을 집행하러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 모든 인간들을 상층(천당)행과 하층(지옥)행으로 심판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종말론은 지극히 삼층 세계관적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성서보다 훨씬 전에 기록되었고 고대 세계에서 보편화된 고대 그리스 신화와 대단히 흡사하다. 오늘 호메로스(호모 기원전 8세기)의 일리어스(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오디세이)를 문자적으로 읽고 그 서사시가 실제적인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가장 심각한 영향은 이분법적 구원론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에 대한 꿈이다. 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생각하기를, 상층에서 영생하는 신들이 땅과 하늘 사이를 마음대로 오르락 내리락하고, 중간층에는 유한한 생명의 인간들이 산다고 상상했다.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상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따라서 사도신경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삽입했으며, 영생의 길을 만들기를,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 는 공식을 암기하고 입술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간단하면서도 대단히 위협적인 공식이다. 그러나 우주진화적 세계관에서 사람의 생명과 생애를 산다/죽는다, 구원받는다/징벌받는다 는 이원론적 표현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 각 사람의 삶은 한 인간의 현상 또는 한 인간의 운명의 현상 또는 한 인간의 존재의 현상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서 우리의 생명과 생애를 인간에게만 국한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138억 년 전 빅뱅 이후부터 우주의 모든 개체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개체들은 소중하고 성스러우며, 어느 한 개체를 무시하거나 제외시킬 수 없다. 개체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것이 우주이기 때문이다. 한 개체의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 전체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삼층 세계관적 신앙이 주장하는 최후의 심판은 오직 인간의 삶과 죽음에 국한하며, 심지어 선택받은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으로 분리한다. 또한 죽는다는 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땅 아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죽었던 몸이 부활해서 다시 살아나 상층인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진화 세계관적 신앙은 세계를 상중하 층으로 분리하지 않기 때문에 종말론적 최후심판은 없으며, 이 세계(물질세계)와 다른 세계(영적세계)로 분리하지 않는다.

갈릴레오에서 시작되어 뉴턴에 이르도록 심한 갈등을 겪어온 삼층 세계관은 아인슈타인에 와서 아무 쓸모 없는 낡은 휴지로 전락했다. 따라서 우주적 세계를 상중하의 층없이 물질이라는 것이 활동하는 광활한 공간과 시간으로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주세계는 한 몸을 이루는 유기체와 같다. 오늘날 우주진화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 가운데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을 전제로 하는 사람은 없다. 생물과 무생물의 한계도 없어졌다. 세계관을 생각할 때 교리적 종교나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지 않고 과학에 근거한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은 초자연적 하느님의 창조질서로서 가치관이나 윤리규범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리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써 두려움과 욕심없이 자유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선포했다.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돌아보면, 예수는 삼층 세계관의 종교와 문화 속에서 살면서도 그의 철학과 사상과 신앙은 당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넘어 우주진화적이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하는 예수는, 승리자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패배자로서의 예수,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예수,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 소위 죄인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예수, 문제가 없는 아흔 아홉 마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문제가 많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예수, 섬김을 받으려는 예수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예수, 2% 지배층을 위해서가 아니라 98% 민중을 위해서 존재하는 예수, 생존하려고 몸부리 친 예수가 아니라 죽음으로 뛰어든 예수이다. 이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구원받아 죽은 후 천당으로 올라간다는 이분법적 교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늘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 나의 이웃을 위해 실천적으로 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며 또한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진화적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서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 처형 후에 몸이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부활한 예수는 갈릴리 민중들의 가슴 속에 나타났다. 다시 말해, 제자들의 내면과 그들의 삶 속에 예수의 정신이 부활한 예수로 드러났다. 성서 저자들은 이 사실을 은유적으로 오순절의 성령강림이라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즉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잃었던 예수의 정신을 가슴으로 되찾았다는 뜻이다. 세상으로 나간 예수의 제자들은 다른 종교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예수의 말이나 그의 신성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우주적이고 비이분법적인 삶의 모습을 증언했다. 역사적 예수, 즉 우리의 삶의 지평에 성속 넘어, 종교 넘어, 믿음 넘어 서 있는 인간 예수를 증언하고, 그가 살았던 것처럼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의 핵심이다.

삼층 세계관적 신앙과 달리, 우주진화적 신앙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그렇다고 인간중심의 생명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에서 특히 인도에 원초를 둔 불교에서는 생명을 모든 생명체들에게 확대시킨다. 우리는 죽은 후 다른 세계로 갈 것이니, 말없는 생물들을 다 정복해 버리고 인간 중심적 사고로 내가 살기 위해 다 먹어치운다면, 생태계가 깨져서 인간도 살 수 없게 된다. 놀랍게도 바울에게서 우주진화적 신앙을 볼 수 있다. 로마서 8장 18절 이하에 생명의 지평을 인간영역을 넘어서 모든 생명체들에게 확대시키고, 우주적인 생명, 우주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이 신음하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당하면서 인간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은 우주진화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온 인류의 구원의 길이다.

<더 읽을 책> *이 책들 중 어느 한 권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로이드 기링,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마커스 보그, 성경 새롭게 다시 읽기,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존 쉘비 스퐁,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_________, 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_________, 성경을 해방시켜라,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캘빈 S. 홀,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 도서출판 거암, 1990
존 도미닉 크로산, 역사적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_________,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로버트 펑크, 예수에게 솔직히: 새로운 밀레이엄을 위한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사회평론, 2004
Dennett, Daniel C., Breaking the Spell, Penguin Books, 2006
Robinson, John A.T., Honest to God, SCM Press, 1963
Feuerbach, Ludwig, The Essence of Religion, Prometheus Books, 2004
_________, The Essence of Christianity, Prometheus Books, 1989
Schleimacher, Friedrich, The Christian Faith, Fortress Press, 1976
_________, On Religion,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4
Teilhard de Chardin, Pierre, Christianity and Evolution, Collins, 1971
_________, The Phenomenon of Man, Perennial, 1975
Cox, Harvey, How to Read the Bible, HarperOne, 2015
Charpentier, Etienne, How to Read the Old Testament, SCM Press, 1988
_________, How to Read the New Testament, Crossroad, 1987
Jung, Carl G., Man and His Symbols, Laurel Book1964,
Geering, Lloyd, Christianity without God, Polebridge Press, 2002
Swimme, Brian, The Hidden Heart of the Cosmos: Humanity and the New Story,
Wilber, Ken, The Integral Vision, Shambhala, 2007
Campbell, Joseph, Primitive Mythology: The Mask of God, Penguine Books, 1987
Greenberg, Gary, 101 Myths of the Bible, Sourcebooks, 2002
Mack, Burton L., The Christian Myth, Continuum, 2001
Funk, Robert W. (ed), 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Polebridge
Press, 1993
Funk, Robert W., The Acts of Jesus: What Did Jesus Really Do?, Polebridge Press, 1998
Krentz, Edgar, The Historical-Critical Method, Fortress Press, 1988
Flanagan, Owen, The Problem of the Soul, Basic Books, 2002

기사 등록일: 2017-03-17
cajoo | 2017-03-21 0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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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 준 책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30권이 넘는 참고 도서를 제시하고
귀하는 일반 시민이 박사학위 논문 쓴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것 같은데 글을 쓰려면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설명하던지 글이 너무 어렵고 일반 독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 생각됩니다.그리고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처음으로 정독해 보았는데 스스로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려는 것보다 독설과 아집으로 가득찬 것 같아 다시는 귀하의 글을 읽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귀하가 이 글을 왜 쓰는지 부터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파적인 글을 신문사가 실어도 되는지 편집하시는 분들도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늘봄 | 2017-03-21 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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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철입니다. cajoo 님께서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책들을 소개하는 것은 책자랑이나 지식자랑이 아닙니다. 다만 저의 칼럼이 저의 개인적인 망상이 아니라, 주류 학계 즉 사상 철학 신학 종교 과학에서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생각해보아도 책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독자들께서 책 제목들만 보아도 오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저의 칼럼이 너무 어렵다고 하셨는 데, 제가 20년 목회(1992-2012년)에서 하던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시무했던 교회들의 교인들도 저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거나, 오랫동안 믿어왔던 믿음체계가 무너지는듯한 두려움과 분노로 인해 거부감이 생기고, 마음을 닫고, 귀를 닫기 때문에 어려운 말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고 어려운 이야기를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과거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면, 어려웠던 이야기가 쉬운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어렵더라고 계속해서 읽어 주시고 생각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의 칼럼이 일방적이고 독설적이고 아집으로 가득하다는 말씀에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다시 말해, 저의 신학과 세계관과 가치관이 과거의 패러다임과 비교한다면 일방적이고 독설적이고 아집으로 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저의 칼럼이 과거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분노를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저도 캐나다에서 신학을 처음 공부할 때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서근본주의자였으며, 삼층 세계관의 내세를 철저히 믿었습니다. 신학교 첫 해에 교수들로부터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듣고, 우주진화 세계관을 들었을 때 저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3년 후 졸업할 때에 저는 180도로 변화된 새로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저의 칼럼을 실는 신문사는 편파적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의 칼럼은 다양한 생각들 중에 하나이며, 요즘 떠도는 생각들 중에 가장 새로운 생각들 중에 하나일뿐입니다. 씨엔드림 신문사는 어느 특정 종교단체의 뉴스레터가 아니라 다원주의 사회의 언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칼럼은 한인사회 어느 언론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글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인류의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자는 소리는 어디에선가 들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안주하고 거기에 머물러 살 수 없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의식주 생활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미래지향적입니다. 그런데 종교적 믿음은 2천 년 전에 머물러 있으니, 이것은 큰 모순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2천 년 전에 살고, 세상에서는 21세기에 사는 것은 사회를 분리시키는 잘못된 일입니다.

님의 생각을 나누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운영팀 | 2017-03-24 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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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joo님께..
우선 계심정 칼럼은 신문에 실리지 않고 인터넷판에만 올라감을 알려드려요. 그리고 이 칼럼을 편파적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편집부에서는 편파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양한 기독교 세계관중 하나라고 볼 뿐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서구에 비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이 짙습니다. 이제는 다양성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운영팀 | 2017-03-24 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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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joo 님께
그리고 이 칼럼은 벌써 6회째입니다. 이것 하나만 읽고 이분 글의 모든것을 판단하시는건 이르다고 보여집니다.

그분에 관련된 기사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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