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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수필) 정원에서 만난 겨울비 _ 灘川 이종학<소설가, 에드먼튼>
 

비가 내린다. 한겨울에 비가 시원하게 내린다. 비를 즐기는 나를 알기라도 한 듯이 비가 조용히 내린다. 미국 천사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레스(LA)는 올겨울에 비가 자주 내리는 편이다. 엘니뇨 현상으로 5년이 넘게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연중 사막성 기후인지라 3월~11월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고 12월~2월에나 겨울비가 10여 차례 오는 게 고작인데 그나마 비 소식이 드물었다. 물 부족으로 비상이 걸렸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140년 이래 최악이라고 했다. 이대로 가뭄이 계속한다면 큰 재난을 겪어야 한다고 염려했는데 애타게 기다리던 비가 왔다. 이런 비를 우리말에서는 단비, 약비, 꿀비, 복비라고 아름답게 표현하며 반긴다. “비가 오지는 않지만 한 번 오면 쏟아진다.(It never rains but pours)라는 미국 속담이 생각나게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꽤 많은 비가 내린다. 섭씨 18° 정도인지라 날씨가 포근하고 바람도 없다. 빗발이 장대비보다는 가늘고 보슬비보다는 더 잘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이다. LA 딸네를 찾아온 나는 행운의 겨울비를 만나 가슴이 다 설렌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 뒷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잘 자란 각종 관상목과 화초들로 둘러싸인 정원 풍경이 싱그럽다. 과연 이곳은 ‘개인 정원 천국’이라 불릴만하다. 사람이 자연과 공존하는 이치를 아는 나라이다. 일정 수고비를 지불하면 자격 있는 가드너를 비롯한 청소부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다. 매주 한 번 정원의 잔디와 초목을 아름답게 가꾸어 주고 야외 수영장과 정원 전체를 청결하게 손질해 준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물을 공급하도록 스핑쿨러도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다.

나는 한바탕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나서 정원용 라탄테이블과 의자를 들고 차양(캐노피) 맨 끝 언저리에다 놓고 앉았다. 얼굴 앞으로 바싹 다가선 빗줄기에 자칫 빗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강력한 자력(磁力)으로 작용한다. 심호흡하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이번에는 후각이 작동한다. 비에서 비린내와 풀 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냄새가 풍긴다. 비에서 냄새가 나는 이유는 물이 수증기로 기화되면서 하늘에서 액화가 될 때 온갖 먼지나 내음 분자들과 결합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빗물 속에 내음 분자들이 포함되어 나는 냄새라는 게 물리학적 해석이다. 나는 비 냄새를 바로 생명의 냄새라고 말하고 싶다. 잉태와 성장을 재촉하는 힘의 원리를 내뿜는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흔히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물도 짭짜름하고 비릿하다. 그래서 생명의 냄새는 소리를 낸다. 비 냄새와 빗소리는 동의어와 같은 감수성의 실루엣을 풍긴다.
눈을 뜬 나는 금세 땅을 내려다보는 소리, 소리들의 조용한 아우성에 이끌리고 만다. 말하는 비에 직면했음이다. 강낭콩 모양의 야외수영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제일 크게 들린다. 퐁당 퐁퐁 당당~~ 빠른 음정의 현을 켜듯 소리의 높낮이가 선명하다. 탁 타닥 탁! 이번에는 둔탁한 소리의 연속이 가세한다. 비가 수영장 둘레의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다가 딱딱한 바닥을 치는 빗소리는 이내 나뭇잎을 흔들며 떨어지는 소리와 장단을 맞춘다. 탁 타닥! 투 뚝 투투뚝!……. 아기곰이 앙증맞게 난타하는 북소리와 비슷하다. 이 부지런한 난타에 수줍어하며 화답하는 소리가 있다. 바로 잔디에 주저앉는 감미로운 빗소리다. 사락사락 맛난 소리를 내면서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비가 포근히 내리면 커피를 마시며 명상에 빠지는 사람,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푹 파묻고 흥얼거리는 사람, 폴 베를랜느의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같은 시에 몰입하는 사람, 낮잠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듣기도 한다. 이 모두가 일상의 긴장에서 놓여나 삶의 리듬을 즐기는 모습이다. 나는 은근히 출출함을 느낀다. 부침개도 좋고 컬컬한 막걸리는 더욱 환영이다. 비가 먹보를 불러오는 까닭도 따질 게 못 된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생생한 생명의 소리는 강한 에너지장을 필요로 한다. 오늘따라 삭신 타령을 하지 않는 늙은 아내의 손길이 바빠진다. 아내도 입맛을 되찾은 모양이다. 비는 오래지 않아 촉촉한 만물 위에 화려한 햇빛을 불러올 것이다. 또 다른 생명력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기사 등록일: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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