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자작수필) 고봉밥의 추억_ 灘川 이종학(소설가, 에드먼튼)
 
우리 부부는 요즘 새로 유행한다는 다이어트 식이요법에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건강에 특효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딸들의 절대 강권에 두 손 번쩍 들고 절에 간 색시 꼴이 되었다. 효심의 발로이거늘 어찌 마다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 저탄수화물 고담백질 다이어트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습관이 되어 버린 오랜 식생활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당혹스럽기는 해도 식탐이 줄어드는 노령이라서 오히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루 세끼를 잡곡밥에 김치, 국과 된장이 중심을 이룬 식탁으로 살아왔다. 가끔 빵이나 분식 따위 별식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경우도 있지만, 역시 주식은 밥이다. 이민생활 30년임에도 이런 식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이민 초기에는 의식적으로 양식을 기웃거려도 봤지만 마음뿐이었다.
딸들이 들고나온 새로운 다이어트 식단은 이러하다. 오전 9시에 채소와 과일(케일, 사과, 토마토, 키위, 바나나) 그리고 5곡 미숫가루와 청국장 가루를 섞어 믹서로 가른 생즙을 마신다. 12시경에 버터나 올리브유를 두른 두 개의 달걀후라이 혹은 채소와 휘핑크림을 곁들인 달걀오므라이스에다가 약간의 삼겹살이나 베이컨, 소시지를 아침 겸 점심으로 먹는다. 저녁 식사는 인디카쌀(안남미) 한 공기에다가 삼겹살과 김치, 어패류 야챗국의 성찬이다. 밤참도 빠지지 않는데 약간의 견과류가 전부다. 성인병을 앓는 사람들이 송충이 보듯 해야 하는 동물성 기름기나 달걀 노른자위, 가공육 등을 예사로 먹는 파격적인 식단이다.
이런 식단이 처음에는 낯설고 어설펐지만, 오래지 않아 어느 정도 입맛을 챙겼다. 무엇보다도 먹고 나서 전연 포만감을 느끼지 않고, 늘 무지근한 노구(老軀)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가 흔히 안남미(安南米)라고 부르는 인디카쌀밥에 있었다. 처음에는 불면 날아갈 듯 가볍고 푸실푸실한 밥알은 입안에서 겉돌았다. 찰기가 없는지라 수저로도 잘 떠지지 않아 아예 물이나 국에 말아야 한다. 밥에 진가가 조금도 없으니 밥이 아니라 쌀튀밥 대하는 기분이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안남미밥에 얽힌 추억이 되살아난다.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대학을 다닐 때 하숙집에서는 거의 안남미밥이 나왔다. 원조 받은 쌀이다. 한창때인지라 소식하는 나도 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허기증이 생겼다. 안남미밥은 위에서 소화할 겨를도 없이 방귀 서너 번이면 날아가고 말았다. 쌀이 귀했던 시설이다.
나는 여러 남매 틈에서 자랐기에 젖배를 곯은 편이다. 분유가 귀했던 터라 암죽이나 다른 유모의 젖을 얻어먹어야 했다. 그래서 위장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는지 먹는 양이 아주 부실한 편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공깃밥이나 뚜껑 달린 작은 주발밥을 면치 못한다. 음식이 많이 먹히지 않으려니와 어쩌다 좀 과식했다 싶으면 소화제를 찾아야 한다. 이런 처지인지라 음식을 잘 많이 먹는 식성 좋은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이든 누구든 남의 집에 가 머물기를 꺼렸다. 식사가 문제였다. 친한 손님이 왔다고 상에 고봉밥이 나오거나 닭고기 국수를 가득 담은 왕대접이 밥상에 보이면 나는 초장부터 난감해진다. 먹고 남기자니 결례가 되고 그렇다고 억지로 다 먹자니 뒤탈이 무서웠다. 설상가상으로 반찬이 변변치 않아 그러느냐고 미안해하거나 많이 먹으라면서 아직 가득 남은 밥그릇에다가 국이나 물을 부어주는 지경에 이르면 아예 초주검이 되고 만다.
고봉밥을 먹어 봤으면, 부러운 눈길을 보낸 적이 여러 번이다. 밥그릇에다가 밥을 퍼서 산처럼 쌓아 올리는 아낙네의 재주는 가히 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걱을 든 손은 사발에다가 연신 밥을 퍼 담으면서 다른 한 손은 조각하듯 밥을 이리저리 매만져 쌓아올린다. 무게의 중심을 제대로 잡아야 한쪽으로 기울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기술과 정성이 깃든 작품이다. 여인네의 고봉밥은 일하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고봉(高捧)밥은 한 그릇 다 채우고도 모자라 그 위에 봉우리 하나를 더 아슬아슬하게 수북이 얹는 밥이다. 장정밥, 일밥, 감투밥이라고도 한다. 이걸 폭식(暴食)과 대식(大食)의 주범처럼 언짢은 표현을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김치와 된장국 말고는 부식이 별로 없는 밥상을 받고 고봉밥이라도 먹는 건 행복이다. 또한, 이렇게 먹지 않고는 중노동을 감당하지 못한다. 나는 어려서 고봉밥을 보면서 참 신기하다 여겼다, 그 고봉밥을 먹는 숟가락질은 더욱 기똥찼다. 삽으로 땅에 구멍을 파듯 숟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밥봉우리부터 파먹듯 하는데 삽시간에 그 큰 밥봉우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릇 하나에다가 밥을 위태롭게 담지 말고 두 그릇으로 왜 나누어 담지 않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봉밥은 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기분에 빠지는 나 자신이 좋았다.
아이들이나 여인네들은 고봉밥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진기가 없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으로는 고봉밥을 만들 수 없다. 채반소쿠리이나 양푼 심지어 바가지에 담아 먹었다. 식량이 부족했던 어려운 시절에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느냐?” 예사로 이런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식단은 양보다 질을 찾는다. 고봉밥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밥그릇의 크기 또한 달라져 점점 작아지는 추세다. 흰쌀을 피하는 현실은 쌀 소비량이 해마다 줄어드는 것으로 입증한다. 육류와 어패류 등의 영양가 높은 부식이 식탁에 오르고 간식도 자주 하는 편이니 당연한 결과다.
사실 노인들에게는 음식의 선택 여지가 없다. 자연스럽게 식욕 부진현상이 나타난다. 좋아하던 음식이 달라지고 좀처럼 입맛이 돌아오지 않는다. 음식 맛이 채찍 같다. 진수성찬이든 천하의 다이어트 식단이든 입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경중미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영양 불균형이나 영양실조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이런 노인들에게 다이어트 식이요법은 별 의미가 없다. 어떤 음식이든 입맛이 돌아오면 무조건 먹어야 한다. 동의보감은 약보(藥補)보다 식포(食補)가 우선이라고 가르친다. 영양가 있는 좋은 음식, 입에 당기는 음식은 무엇이든 먹는 게 건강의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기사 등록일: 2017-05-26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2026년 캐나다 집값 사상 최.. +1
  앨버타 집값 내년까지 15% 급..
  고공행진하는 캘거리 렌트비 - ..
  캘거리 교육청, 개기일식 중 학..
  캐나다 한인, 대마오일 밀반입 ..
  첫 주택 구입자의 모기지 상환 ..
  앨버타 유입 인구로 캘거리 시장..
  캐나다 첫 금리인하 6월 ‘유력..
  로블로 불매운동 전국적으로 확산..
  에드먼튼 건설현장 총격 2명 사..
댓글 달린 뉴스
  2026년 캐나다 집값 사상 최.. +1
  개기일식 현장 모습.. 2024.. +2
  <기자수첩> 캐나다인에게 물었다.. +1
  캐나다 무역흑자폭 한달새 두 배.. +1
  캐나다 동부 여행-네 번째 일지.. +1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