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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드림 이민수기 우수상 수상작1 ) 떠나기_글 : 이중화 (캘거리 교민)
 
그날 아침은 사무실에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며칠간의 무리한 스케줄에 과음과 수면부족이 겹쳐 있었다. 잠깐 눈을 부칠 요량으로 소공동 롯데호텔 사우나로 향했다. 호텔 로비를 무심코 지나가는데 모 이민 대행사가 캐나다 이미 박람회를 준비 중이었다. 사우나를 마치고 수면실에서 잠깐 누워 있으려니 조금 전 플래카드에 쓰여있던 ‘캐나다 이민’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이민이나 가볼까?’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던 탓에 부랴부랴 옷을 입고 로비를 빠져나오려는데 조금 전 보았던 이민 박람회 입구에 있던 직원 한 명이 설문지를 건네었다. 그저 약간의 호기심에 조사에 응한 내게 “지금 당장이라도 신청하면 독립이민 가능하세요! 100% 장담합니다!” “네? 이민은 무슨… “ 말 꼬리를 흐리며 무심코 건네받은 그 직원의 명함과 캐나다 관련 팸플릿을 가방에 넣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날 난 무엇엔가에 당첨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날부터 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정당성을 찾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첫째, 내가 소속된 회사의 미래가 불투명했다. 모 일본 상사의 한국지점에 다니던 나는 외국인 회사라는 당장은 멋진 그림으로 보일지 모르는 조직에 있었으나 언제 어떤 식으로 정리될지 모르는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둘째, 다문화 가정의 가장으로서 공평한 생활환경을 꿈꾸고 싶었다. 내 아내는 일본인이다. 유학 중에 만나 우여곡절 끝에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 했다. 그녀는 일본의 가족과 친구와 직장을 떠나 나 하나만 믿고 한국으로 왔다. 세 살이 된 아들과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딸과 함께 불편할 수밖에 없는 서울 생활을 막 시작한 때였다. 매일매일 업무와 접대에 찌들어 살던 내 눈에는 항상 안쓰럽고 미안했다.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3국에서의 삶은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게 된 건 그다지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다.

셋째, 언젠가는 조그마한 사업체를 내 힘으로 일구며 살고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첫 직장을 다닐 때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곳이 사무실 바로 밑에 있던 ‘쿠로코쇼’라고 하는 경양식집이었다. 회사와 집 이외엔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던 나는 저녁마다 그곳에 들러 주인아저씨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고 그 당시 어렴풋이 나도 언젠가는 이런 가게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저런 막연한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자격증 시험에 응모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캐나다 독립이민 신청을 했다. 이민이 결정되더라도 취소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 당시 담당자의 얘기로 일 년 정도 걸린다고 했기에 가족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였다. 그 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이민 대행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류심사에 문제(?) 가 생겨 고객님 이민 서류가 벌써 통과되었습니다. 이제 신체검사만 받으시면…..” 너무나도 갑자기 다가온 ‘이민’ 이라는 내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난 무엇인가에 끌리듯 그 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내에게 내 결심을 알리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출국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에 돌입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대와 아쉬움,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다발로 밀려왔다. 오랜 시간 외국생활 해온 나는 타국에서의 생활 자체는 부담이 없었지만 이번엔 나 혼자가 아닌 내 가족이 함께 할 새로운 삶이었기에 걱정도 많이 앞섰다. 드디어 출국 당일, 우리와 함께 갈 짐들을 넣은 이민 가방과 캐나다행 편도 티켓을 챙겨 일찌감치 공항으로 향했다.
고국을 떠나는 출국 수속은 의외로 간단했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게이트를 향하며 아내에게 애써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있으면 탑승할 비행기를 보며 마냥 신나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인생에서 그저 잠시 살았던 아빠의 조국이 이다음에 어떤 식의 기억으로 남을지 잠시 상상하던 차에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2001년 5월… 우리는 그렇게 대한민국을 떠났다.

먹고 살기
내 삶의 또 다른 선택인 캐나다로의 이사는 여러모로 많은 수업료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예를 들어 한국에 동유럽의 조그마한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의 어느 백인 가족이 이민을 와서 그것도 서울 부산도 아닌 강릉 어디 메쯤에 정착하여 그들의 나라에서 유행하는 음식을 가지고 식당을 열었다고 상상해보라. 캘거리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우리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민 와 5개월 만에 시작한 식당을 비록 장소는 바뀌어 왔지만 여전히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결심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있지만 돈벌이는 만만치 못하다. 2001년에 가게를 열 때만 해도 스시집이라고는 다운타운에 몇몇 곳에 지난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극 소수의 사람들이 날생선을 즐길 뿐, 이곳 산골마을의 대다수 카우보이 들은 이제 겨우 서투른 젓가락 솜씨로 캘리포니아롤을 그것도 소스에 듬뿍 버무려 모든 소재를 간장 맛으로 먹기 시작하던 때였다. 다운타운도 아니고 고급 주택가도 아닌 아주 오래된 동네의 조그마한 상가에 자리 잡은 우리 가게는 외로운섬 이었다.
의욕에 불타던 나는 스시뿐만 아니라 돈가스 등 다른 요리를 접목시킨 도시락을 전략상품으로 내놓았고 그것은 너무 앞서가다 못해 아무도 따라오기 힘든 트렌드를 혼자서만 이끌어 가고 있는 꼴이었다.
사람들이 고요함을 만드는지 아니면 동네의 적막함이 침묵을 만드는지 인적이 드문 저녁의 동네 어귀를 밤마다 한숨을 쉬며 바라보는 나날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먹고사는 일은 여전히 힘이 든다. 지금도 매상이 조금 오른 달이다 싶으면 냉장고든 환기구든 무엇인가 가 고장이 나서 목돈이 나가는 일이 발생하고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잘 되던 가게가 느닷없는 홍수로 오랜 기간 문을 못 여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등 아직도 ‘안정된 삶’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요식업이라는 힘든 일을 계속 하고 있는것을 보면 내가 제공하는 요리와 서비스가 손님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느낌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것이 분명하다.

혜택 누리기
한국에 계시는 아버님 팔순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고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호주에 사는 여동생 가족들까지 합세하여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소중한 만남을 가졌다. 캐나다로 돌아오기 며칠 전에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대학 병원의 건강검진 센터를 들렀다. 그리고 심방세동이라는 병명으로 즉시 약물치료를 시작할 것을 권유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심장에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 당시 의사의 진단으로는 아주 심한 운동을 하지 않는 한 별 이상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살면서 가끔 병원에 가서 청진기를 가슴에 얹을 때 마다 의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었지만 나는 오히려 별거 아니라며 그들을 안심 시키곤 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최첨단 건강 센터는 내 몸 안의 이상기운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심장검사 결과에서 잡아낸 구체적인 병에 대한 소견과 그밖에 내 몸 안 이곳저곳에서 꿈틀대는 온갖 성인병에 대한 얘기까지 마지막에 만난 의사선생님은 단호하면서도 심각하게 내게 겁을 주었다. 그리고 당장 캐나다에 가면 의사를 찾아가라며 검사 결과에 대한 두꺼운 분량의 영문 소견서와 초음파 검사 기록이 담긴 DVD까지 건네받았다.
오랜만의 고국방문은 그렇게 무겁고 무서운 서류들과 함께 끝이 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난 이미 암 선고를 받은 환자가 되어있었다. 아직 할 일도 많고 해보고 싶은 일도 많은데, 재수 없으면 캐나다의 시골마을 어느 조그마한 식당의 주방 안에서 돈가스 튀기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유서라도 써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페밀리 닥터는 노르웨이 이민자이다. 단지 집에서 가까운 이유로 이민 오자마자 우연하게 인연을 맺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같은 진료소에서 우리 가족의 가정의가 되어주고 있는 고마운 이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난 닥터에게로 달려가서 떨리는 마음으로 대학병원의 진료기록을 건네었다.
닥터가 서류를 검토하던 십여 분 은 내게는 열시간도 넘게 느껴졌다. 서류에서 내게로 눈을 돌린 닥터는 웃으며 두세 장 정도의 기록만 빼고 나머지는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우선 한국의 검사시스템에 대해 높게 평가하며 하지만 몇몇 항목 이외에는 사실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 그의 소견이었다. 마치 당장 수술대에 올라가야 하는 사람을 ‘그냥 하루에 사과 하나씩만 먹고 심호흡만 잘하면 된다’ 는 식 같아서 몇 번이고 내가 걱정되는 부분을 돼 물었으나 다른 건 문제될 것이 없고 심장에 관련된 사항도 이곳에서 다시 검사를 해보도록 조치를 취하겠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닥터는 그 자리에서 심장전문의를 소개해 주며 나의 진료기록 등을 우편으로 보내었다. 며칠 후 심장병 센터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때부터 나는 캐나다 무상 의료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되었다. 의 상담은 물론 각종 피검사에 초음파 와 심전도 검사까지 모든 것을 무료로 받는 것을 시작으로 심장 센터와 심장 주치의, 그리고 페밀리 닥터를 잇는 삼각 구도가 구축되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오늘까지 의사가 정해주는 약값 이외에 2주에 한 번씩 받는 피검사와 심장 전문 센터에서의 여러 가지 검진 및 의사와의 상담 등에 관련해서 공짜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감사하게 생각되는 것은 내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철저히 관리하며 막아내면서 내가 안심하고 살수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페밀리 닥터의 존재이다. 가끔 우리 가게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러 오기도 하는 관계로 발전한 우리는 지금도 내가 “오십견 인지 어깨가 뻐근하다"라고 하면 팔을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리라는 우리 어머니도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처방을 해 준다.

보통으로 살기
“아빠 토모다찌또 (친구하고) Movie 미니(보러) 가니까 Pick me up at 10 OK?” 아이들이 내게 하는 말은 항상 이런 식이다. 아내와는 연애시절부터 일본어로 대화를 해 왔지만 이곳에 오면서 아이들에게만큼은 아빠 엄마가 각자 한국어와 일본어로 대화하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모국어’라는 말은 있어도 ‘부국어’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하루 종일 엄마와 아이들이 부대끼며 소통하는 일본어는 어느새 자연스러워지는 반면, 아이들에게 유일한 한국어 연습 상대인 아빠는 귀가시간이 터무니없이 늦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치레로 “아이들이 3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좋겠다.”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모든 언어가 어정쩡하게 쓰인다. 나만 하더라도 아내와의 연애시절 때부터 가슴속 깊이 간직한 감정의 표현을 일본어로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것은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지금 아이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아빠가 이러려고 너네들 키운 줄 알아?’ ‘당신은 집구석이 이 모양이 될 때까지 뭐 했어?’ 라든가 하는 직설적이면서도 잔인한 감정이 드러나는 표현이 다행히도 서로에게 잘 전달이 안되는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크게 싸운 일이 없다.
학교와 아르바이트로 바쁜 스케줄 가운데 소속되어 있는 축구나 럭비팀에서 정신없이 땀을 흘리는 아이들은 평범한 캐나다의 십대로 성장하고 있다. 이리저리 접시를 나르며 가게 일을 돕는 아내는 주말의 일본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밤늦게까지 아이들의 숙제나 시험을 채점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삶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다시 시작하여 정기적으로 이곳 노인홈을 방문해 공연하는 일과 가게에서 개최하는 음악 이벤트 등의 준비를 위해 매일밤 가족들의 귀를 괴롭히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곡이 있다. ‘지구라는 별에 잠시 들른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오래 머물 줄이야…’ 라며 지구에 사는 외계인의 입장에서 부르는 독특한 노래이다. 처음엔 내가 복이 참 많아서 이렇게 멋진 곳에 이민을 왔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빛이 그늘을 만들듯, 기쁨이 슬픔을 낳고 행복이 고난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걸 어느 정도 알게 된 지금 나는 드디어 이곳 캐나다의 보통의 존재가 되어간다. 지구의 어디에 살든 그건 내 삶의 또 다른 선택일 뿐, 가장 소중한 한 가지는 보통의 존재로 살아가며 보통의 희망을 품고 사는 일 이 아닐까.
우리집에는 한국에서 보내온 멸치와 고춧가루, 일본에서 보내온 우매보시와 녹차가 냉동고의 비좁은 공간을 다투고 있고 낫또에 미소국이 놓이는 아침 밥상은 저녁이면 삼겹살과 소주로 탈바꿈 한다. 오늘도 TV Japan 의 아침드라마에 몰입되어 있는 아내와 그 옆에서 무언지 모르는 심각한 얘기를 영어로 주고받는 아이들 사이에서 난 어제 배달 받은 정유정씨의 신간 소설을 넘기고 있다. 끝


기사 등록일: 2017-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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