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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를 보며_ 기자수첩
 
-대한제국 군대해산-
나라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외교력, 군사력, 경제력이 필요하다. 조선 말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1905년 을사늑약이었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 다음 조치가 군대해산이었다. 군대해산은 1907년 7월31일 순종황제가 군대 해산 조칙을 내리고 8월1일 시행되었다. 조칙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이등박문이 미리 작성해 놓은 것에 허수아비 황제가 서명만 하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문제에 대해 간섭하는 나라가 없어져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나 마지막 장애물이 조선 군대였다. 당시 조선군 병력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울과 서울 인근 시위대가 약 15,00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대 해산을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병무, 법무대신 조중응 등 매국세력과 일본은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일본에서 중화기로 무장한 여단 병력 약 6,000명이 진주해 배치했다. 해산 명령에 조선군이 반발할 것을 대비해 조선군 무기고와 탄약을 일본군이 관리하게 규정을 고쳤다. 군인들의 외출 외박을 금지해 일반백성들에게 군대해산 소식이 펴지지 못하게 조치했다.
사전준비를 마친 후 8월1일 동대문 밖 훈련원으로 비무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미리 소문을 듣고 있던 군인들이 훈련원으로 모이지 않아 절반도 안 되는 인원들이 모였다. 중무장한 일본군이 훈련원을 둘러 싼 가운데 군대 해산 조칙이 내려지고 은사금을 나눠주었다. 하사는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정은 50원, 일년 이하 근무한 병정은 25원이 지급되었다.
-시위대 반발, 남대문 전투-
군대해산 소식이 전해지자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군인이 되어 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도 하지 못했으니 죽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2연대 1대대 중대장이던 오의선 정위도 자결했다.
훈련원으로 출발하려던 1대대는 대대장 자결소식을 듣고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를 했다. 2연대 1대대도 봉기에 합류했다. 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직위해제 되었다는 소식에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옆에 대대에서 함성과 총성이 일자 대대는 장교들 명령에 따라 무기고를 부숴 반납했던 무기로 무장했다.
이에 일본군은 13사단 51연대2, 3 대대가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전투에 필요한 무장을 갖추었고 당시로서는 대량살상무기라고 할 수 있는 기관총을 3문 갖고 있었으나 조선군은 이미 무기를 반납한 부대도 있어 무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고 탄약도 부족했다.
조선군 시위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인 곳이 남대문으로 남대문 전투라고 한다. 남대문 전투에 관한 소식은 프랑스 신문 르 푸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려 유럽에도 알려졌다. 르 푸티 주르날은 1894년 9월3일자 신문에서 “조선, 일본, 동부 차이나 지도”라는 제목으로 지도를 실었는데 이 지도에는 독도가 조선령으로 표기되어 있어 독도가 일본 침략 이전에는 조선 영토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남대문 전투의 역사적 의의-
남대문 전투는 한양이 수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벌인 시가전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시가전 벌릴 틈도 없이 선조가 피난을 결정했고 이괄의 난 때에는 무악재에서 전투가 벌어졌지 사대문안에서 시가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이방원의 왕자의 난이 시가전은 시가전인데 개성에서 생긴 일이다.
남대문 전투는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군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전을 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에도 9 중대장 가지하라를 비롯해 일본군 40명을 사살했다. 우리측은 68명이 전사했다. 우리측도 중화기를 갖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통제해 실전배치를 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다.
-독립운동가가 멸시 당하는 나라-
군대가 해산 된다는 것은 외부에서 적이 침입해와도 대항할 수단이 없이 그저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식민지가 되었고 35년만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새로 조직된 정부에서는 군대도 조직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로 군 지휘관들은 물론 군 경험이 없는 사람도 아는 사실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 오랜 원정과 사막의 열기, 내려 쪼이는 뜨거운 태양으로 프랑스군은 기진맥진했다. 나폴레옹은 지친 병사들을 모아놓고 딱 한 마디 했다. “5천년의 역사가 제군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그 말 한 마디에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혁명을 경험한 병사들의 역사의식이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조직된 한국 군대는 나폴레옹 군대처럼 역사의식이 없었다. 역사의식은커녕 조국독립에 나섰던 독립군들은 창군에서 제외되거나 푸대접을 받았고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에 충성하고 독립군 향해 총 뿌리를 겨누던 일본군 출신들이 한 점의 반성도 없이 창군 주역이 되어 요직을 독차지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그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때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추천서를 내게 되었다. 추천인은 광복군 출신인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으로 이종찬의 부친 이규학의 동지요 친구였다.
면접관은 생도대장 이용 준장과 참모장 대령이었는데 둘 다 일본군 사병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매우 위압적인 태도로 물었다.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을 어떻게 아는가?” “저희 집안과는 중국에 살 때부터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집도 소위 독립운동을 했다는 그런 집안인가?” 매우 경멸적인 말투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죄 지은 사람처럼 대답했으나 내심 불쾌했다.
이종찬은 시험성적 때문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이유로 떨어질 것이란 생각에 실망이 컸다. “일제 때 일본군에 들어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던 자들은 득세하여 장군이 되었고 나 같이 해외에서 목숨 바쳐 싸우던 후손은 오히려 멸시를 당하는 이런 비리를 우리 세대에서 잡아보자.”고 회고록에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자주성을 상실한 군대-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6.25때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한 후 미군이 갖고 있었다. 그 후 환수 노력이 있어 평시 작전권은 김영삼 대통령 때 환수 했다. 그 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노력도 있었으나 지난 10월24일 전작권 회수를 2020년 이후로 연기한다는 발표를 했다.
국군통수권은 국민의 위임을 받아 대통령이 행사하고 이 권한을 대통령은 국방장관에게 국방장관은 합참의장과 참모총장에게 위임해 군정권은 참모총장이 군령권은 합참의장이 행사한다. 원래는 참모총장이 군정권, 군령권을 모두 행사했는데 권한이 한군데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리되었다.
군령권인 작전통제권과 작전지휘권은 합참의장이 행사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 전시작전통제권은 합참이 아니라 한미 연합사에서 행사한다는 것이다. 한미연합사령관은 미8군 사령관과 주한 미군사령관을 겸하므로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군에게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사 부사령관은 한국군 대장이 맡고 지상 구성군 사령관도 겸한다. 또한 참모의 절반이 한국군이므로 기술적으로 미군이 마음대로 미군 유리한대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국방 관련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평시/전시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갖고 있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던가? 1968년 1월21일 김신조 일행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공격 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보복공격을 하려 했다. 그러나 작전통제권 갖고 있는 미군이 움직이지 않고 자제하라고 해서 보복공격을 할 수 없었다.
이틀 후 푸에블로호가 납북되었다. 미국은 전투기 군함 동원해 무력시위에 들어갔다. 물론 푸에블로호는 돌려받지 못했고 무력시위는 무위로 끝났으나 두 가지 사건을 보면서 작전통제권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면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4년 전 지금쯤 연평도에서 포격사건이 있었다. 한국군도 대응사격을 하긴 했는데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전시작전통제권은 자위권보다 하위 개념으로 한국군 단독으로 보복작전이 가능하다”고 국회에서 말했으나 곧 거짓말임이 탄로났다.
한미 연합사 정보작전부장 죤 맥도날드 소장은 “나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었다. 신생 이라크 군대도 자기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는 알아서 판단해 행동한다. 그런데 연평도 포격사건이 났을 때 합참에서 매시간 매분 수도 없이 전화가 왔다. 이거 해도 되느냐 저거 해도 되느냐는 문의 전화였다. 한국군이 이라크군 만도 못하다 말인가?”
이라크 군은 내전으로 붕괴되어 나토군이 훈련 시켜 재건했으나 아직 군대라고 하기는 미흡해 IS 같은 무장조직과 전투도 감당 못하는 수준이나 한국군은 국방비, 군 병력, 무기수준에서 세계 10권에 들어간다.
역사의식은커녕 자립의지마저 없는 한국군은 덩치는 레슬링 선수지만 정신연령은 아직 미성숙하다. 북한 핵무기 때문에 전작권 환수를 연기 했다지만 만약 이 상태에서 북한을 흡수 통일 했다는 가정 하에 전작권 환수 할 수 있을까? 두만강 압록강 너머에는 북한 핵보다 훨씬 강력한 중화 인민 해방군과 러시아 군대가 있는데. (끝)

기사 등록일: 201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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