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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 벽두에 생각나는 것 _ 기자수첩
명성왕후와 을미왜변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는 10의 천간(天干)과 12개의 지지(地支)의 조합으로 동양에서 천도의 운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역법을 만들 때 남녀가 혼인할 때 보는 사주에도 쓰인다. 이 조합은 60년을 주기로 돌아 60회 생일을 환갑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갑자가 돌아 왔다는 것이다.
십간십이지에 의하면 올해가 을미년으로 양력 1월1일 되었다 해서 을미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고 설날이 되어야 을미년이 시작된다. 올해는 설날이 2월19일이니까 여태까지는 을미년 예고편이자 갑오년 종편(終篇)이라고 할 수 있다.
을미년 하면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오르는데 120년 전 명성왕후 민씨가 일본 낭인(깡패)들에게 시해 당한 해다. 한국 땅에서 태어나 학교에서 역사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역사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민 왕후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명성황후로 추존되었으나 대한제국은 제국다운 면모는 없었고 일부 지식인들이 자주의식을 갖고 청나라와 관계청산 하고 명실상부한 독립국 지위를 꿈 꾸기도 했으나 대한제국이 성립된 것은 일본과 서구제국이 정략적으로 청나라가 조선에서 손을 떼게 조치한 것으로 일본의 식민지 야욕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왕권의 상징인 대궐에서 왕비가 남의 나라 깡패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하는 백성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민주국가의 대통령 부인이 죽어도 국모가 죽었다고 전 국민이 근신하며 슬피 우는데 전제국가의 왕비가 죽었는데도 슬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대원군과 민 왕후의 만남
고종이 즉위했을 때 나이가 어려 생부 이하응이 섭정을 했다. 원래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조 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하는데 형식상으로만 수렴청정을 하고 대원군에게 왕을 보필하라고 권해 실질적으로는 이하응이 섭정을 했다. 이하응은 조선 최초로 살아서 대원군이 되었고 왕의 생부로서 섭정을 했다. 이하응은 왕을 무시하고 왕후의 친정에서 권력을 잡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절감한 사람으로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며느리 고를 때 일부러 한미한 집안에서 택했다. 원래 안동 김씨 쪽에서는 김우근의 딸을 밀었고 조 대비는 조 대비대로 안동 김씨를 견제할 목적으로 친척인 조면호의 딸을 밀었으나 풍양 조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혐오한 대원군은 아버지도 없고 남자 형제들도 없는 민자영을 며느리로 택했다.
민 왕후의 집안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친정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6대 손이나 가난했고 가까운 친척들도 없었다. 그러나 민비는 영악했고 권모술수가 뛰어났고 권력욕과 이기심이 남달리 심했다. 민 왕후에게 가까운 친척은 없었지만 권력유지를 위해 먼 친척까지 등용하는 족벌정치를 시작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던 대원군의 노력은 도르래미타불이 되었다.
대원군은 사람 보는 능력, 지인지감이 뛰어난 사람으로 며느리가 어떤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데는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제한된 지면에 가설을 소개할 수 없어 유감이다.
원수가 된 시아버지와 며느리
고종은 민 왕후에게 장가들기 전에 궁인 이씨를 총애했다. 그 후 민 왕후와 결혼을 했는데 궁인 이씨가 아들(완화군)을 낳자 대원군은 왕실이 반석 위에 올라 섰다고 좋아했다. 그 때 명성왕후가 몹시 섭섭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명성왕후가 원자를 낳았는데 항문이 막히는 항쇄증으로 며칠 만에 죽었다. 명성왕후는 임신했을 때 대원군이 산삼을 너무 많이 달여준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해 대원군을 미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원수가 된 가장 주된 이유는 권력다툼이었다. 고종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고종과 왕비는 대원군이 행사하는 권력을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을 사이에 두고 반목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암투로 인해 결국 며느리는 죽음을 맞는다.
대원군이 시행한 정책 중에는 잘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는데 잘한 것 중에 하나는 서원철폐와 양반들의 면세특권 폐지다. 서원은 당쟁의 근원지였고 면세특권을 누리며 재산을 늘렸고 지방 양반들은 기득권을 이용해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해 백성들을 한없이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원철폐와 면세특권 폐지로 기득권의 발판을 잃은 유생들과 양반계급은 대원군을 원수로 삼았다. 영악한 민 왕후는 유생들을 이용해 대원군을 공격했다. 대원군 실각에 결정적 역할을 한 최익현은 민 왕후의 사주를 받고 대원군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원군은 9년10개월만에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듯하다.
김씨 세상에서 민씨 세상으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뒤에서 권세를 휘두른 것은 민 왕후였다. 고종은 왕후의 앞잡이에 불과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민씨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민씨들은 넘쳐나는 권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력 독식, 권력 남용, 부정축재가 성행했다. 민씨들의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오히려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 민씨의 권력독점의 예를 들어본다.
지방관 중에서 노른 자위는 평양감사라고 하는 평안도 관찰사다. 만주와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 많아 물산이 풍부하고 산천이 넓고 깊어 진귀한 보화가 많고 평양은 고구려 때부터 번영했던 도시다. ‘평양감사도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도 있듯 평양감사는 관리들은 누구나 한번 해보고 싶은 자리다.
조선 중기 이후 평양감사는 집권당 노론의 전유물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남인이 평양감사 지낸 것은 채제공이 유일하다. 광해군 이후 몰락한 북인은 말할 필요도 없고 소론은 서염순 이후에 단 한번도 평양감사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물러난 1874년 이후 20년 동안 평양감사는 민씨가 독차지 했다. 민영위, 민응식, 민영준, 민병석 등이 번갈아 평양감사를 했다. 평안도 사람들은 “평양 선화당은 민씨 사랑방이냐?”면서 빈정거렸다. *선화당은 감사의 집무실이다.
민 왕후의 사치 낭비도 가뜩이나 힘든 조선의 국력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미신을 좋아하는 민 왕후는 치성을 드린다고 무당을 시켜 전국적으로 굿을 하며 수만금을 퍼부었다. 왕실의 개인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는 민 왕후의 사치 낭비로 텅텅 비어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다 썼다.
대원군이 국고에 쌓아놓은 재물은 일년도 안되 모두 없어졌다. 그래도 돈이 부족한 고종과 민 왕후는 매관 매직으로 뇌물을 받아 사치 낭비에 충당했으니 백성들이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가까운 친척에게도 예외 없이 돈 받고 벼슬을 팔았다
고종-민 왕후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윤치호 조차 “영악하고 이기적인 왕후가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섬겼으면 왕실이 안전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 왕후는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 생겨도 좋다”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 세 사람은 고종, 왕후, 세자를 말한다.
왕후의 죽음, 누구 책임인가?
민 왕후는 일본 깡패들 손에 죽었지만 아무리 조선의 국력이 허약했다 해도 남의 나라 깡패들이 대궐에 난입해 왕후 죽이는 것을 못 막을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았고 국내에 동조세력이 있다. 국내 동조세력이 일본을 이용해 왕후를 시해한 것이다.
윤치호는 유길준을 지목하며 그가 일본 깡패들은 배후에서 지휘했다고 쓰고 있다. 유길준은 개화파 인사로 세계일주를 하고 ‘서유견문’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유길준은 민 왕후를 혐오하고 증오해 ‘영국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 마리 앙뜨와네뜨를 합해 놓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여자’라고 혹평했다.
대원군도 배후인물로 지목된다. 갑오개혁이 일어나던 1894년 민 왕후는 개화파를 일거에 제거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대원군의 첩보망에 걸려 들었고 민 왕후를 폐위 시키려던 대원군은 일본과 의논해 민 왕후를 제거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대원군이 일본의 협력을 얻은 것은 실수였다고 지적하며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도 민 왕후 시해 배후 인물로 대원군을 지목한다.
부정부패, 국가경영의 최대의 적
서재필은 해방 후 귀국해 민 왕후에 대해 술회했다. “당대 최고의 지략가는 김옥균이었다.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도 그에 못지 않은 지략가였다. 세상사람들은 거기에 나까지 다섯 사람이 합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다섯 사람이 민비 앞에 나가면 말 한마디 못하고 뒤통수만 긁적거리다 돌아서기 일수였다”면서 민 왕후의 명민한 두뇌에 탄복했다.
민 왕후는 그런 명민한 두뇌를 국가경영과 복리민복에 쓰지 않고 개인영달과 권력유지 부정부패 매관매직에만 이용하다 외국인 깡패들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으니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부정 부패는 국가경영의 최대의 적이다. 조선이 무능하고 부패해 식민지가 되었고 월남 정부도 무능하고 부패해 세계4-5위의 군사력과 월맹보다 뛰어나게 앞선 경제력을 갖고도 망했다. 이라크도 전후 복구사업으로 미국에게 천문학적 숫자의 지원을 받았으나 부패로 다 증발하고 테러단체에 불과한 IS에 국토의 ¼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한국의 부패지수는 OECD 34개국 중 27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정책투명성은 133위로 캄보디아보다 뒤떨어지고 정치인에 대한 신뢰는 97위로 우간다 보다 떨어지는 현실에서 고등법원은 국정원이 정지중립의무를 어기고 대선 부정선거에 관여했다고 판결하고 이완구 신임총리는 청문회 과정에서 비리 온상으로 밝혀지는 등 부정부패 늪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기사 등록일: 201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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