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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맞으며 _ 기자수첩
 
삼일절의 성격
삼일 독립운동은 1919년3월1일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으로 기미독립운동 이라고도 부른다. 그 해 3월3일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만세운동이다. 이 만세운동의 한가지 특징은 대규모집단적 저항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조선인의 염원과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평화적 비폭력 집단적 저항운동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것으로 결과야 어찌 되었던 민족의 역량을 만천하에 알린 쾌거이다.
당시 인구가 약 1,700만명 정도인데 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106만명이 삼일운동에 참가해 전체 인구의 약6%가 참가한 것이다. 비폭력 저항은 일제의 폭력탄압으로 수 많은 희생자가 생겨 당시에도 지도부가 비판 당하기도 했다.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만 7,509명으로 보고 안된 경우도 많을 테니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그 자체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3.1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해야겠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해 러시아, 미국, 만주 등지에 산발적으로 존재하던 독립운동 단체가 하나의 구심체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임시정부 수립의 정신적 근거가 되었다.
당시의 국제정세
삼일운동은 일차대전 종전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일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이들은 파리에 모여 패전국에 대한 처리와 평화를 위한 세계질서 개편을 논의했다. 이것을 파리강화회의라고 한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패전국 식민지의 독립이었다. 전쟁에 졌으니 어떤 형태로나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이 겪은 불이익은 너무 지나치고 가혹해 2차대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패전국 식민지의 독립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이 전승국 식민지에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천명되자 제국주의 압제에 신음하는 식민지에서는 독립의 기회가 왔다고 좋아했다.
우리 선조들도 마찬가지로 독립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참석시켜 독립을 호소하기로 했다. 처음에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되었으나 도중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임시정부 대표로 자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를 독립시켜줄 생각도 안 했고 일본에 맞서 조선 독립을 주장해줄 열강도 없었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미국조차 조선의 독립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도 마찬가지로 독립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조국독립의 꿈을 안고 회의장에 나타난 호치민은 회의장에 입장도 못해본 채 쫓겨났다.
그 때 독립한 나라들은 주로 유럽국가들이다. 오스만 터키제국 해체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에스토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핀란드,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이 독립했다. 같은 독일제국 식민지라도 아프리카 식민지는 독립에서 제외되었다. 서구 제국주의가 얼마나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편파적으로 불공평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다.
고종황제 독살의혹과 삼일운동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은 계속 제기되어왔다. 황제는1919년1월21일 오전6시경 덕수궁에서 승하했다. 승하할 당시 67세로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황제의 독살설을 처음 전한 사람은 민영달이었다. 민영달은 황제의 시신을 염한 사람으로 시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사람이다. 황제가 독살 당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정황은 아래와 같다.
1. 아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 죽었다.
2. 시신의 팔 다리가 1-2일 사이에 엄청 부어올라 통이 넓은 바지를 벗기는데 바지를 찢어야 했다.
3. 약솜으로 시신의 입안을 닦아 내는데 치아가 모두 빠져 있고 혀가 닳아 없어진 걸 알았다.
4. 20cm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5. 황제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 이야기는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전한 것을 한진창이 윤치호에게 전한 것이다. 윤치호는 들은 이야기를 일기에 적어 놓았다.
민영달은 민비의 척족이지만 다른 민씨들과 달리 부패하지 않은 사람으로 민씨 문중보다 나라와 국왕에게 충성한 사람이다. 민씨들은 조선이 멸망하자 모두 친일파가 되었다. 민영환이 유일하게 망국의 한을 자살로 달랬다. 민영달은 살아있는 민씨들 중 유일하게 친일 대신 민족계몽을 위해 일하다 죽었다.
고종황제의 독살 여부는 1945년까지는 조사할 기회조차 없었고 그 후에도 공식적 조사는 이뤄지지 않아 기록은 없으나 정황상으로 볼 때 일제가 독살했을 가능성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황제가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민중들은 분노했다. 그 분노가 인산일을 앞둔 3월1일을 기해 폭발한 것이다. 윤치호는 일기에서 “만약 고종황제가 합방 이전에 승하했다면 민중들 기억에 없이 저 세상으로 떠났겠지만 지금 조선 민중들은 북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 소매를 적셔가면서 황제를 위해 폭동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삼일절, 우리 역사의 일부
올 삼일절은 96회 삼일절로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년이 되는 해에 맞는 뜻 깊은 삼일절이다. 여론조사업체 갤럽은 삼일절을 앞둔 2월24일-26일 삼일절과 일본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를 보면 삼일절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대답한 비율이 32%에 불과했다. 또한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해에 대해서는 19%만이 정확하게 대답했다.
항일독립운동가를 묻는 자유응답에서는 안중근(47%), 김구(45%), 유관순(37%), 윤봉길(30%), 안창호(13%) 순서로 응답했다. 또한 2월14일이 발렌타인 데이이자 안중근의사 사형선고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국민의 86%는 중 고교 교육과정에서 일제시대를 더 상세히 다뤄야 한다고 대답해 역사교육 강화의 필요성에 국민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사 인식 개선 없이 한 일 정상회담 의미 없다” 에 대해서는 70%가 공감한다 19%는 공감하지 않는다 11%는 대답을 유보한다고 답변해 한일 관계가 정상화 되기 위해서는 일본의 과거사 인식 변화가 전제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삼일절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새겨보는 이유는 망국의 아픔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를 지으면서 통사(通史) 대신 아플 통을 넣어 통사(痛史)라고 제목을 지은 것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만 기억할 게 아니라 아픈 역사 슬픈 역사도 역사의 일부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다. 로마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성전을 파괴해 성전 서쪽 벽만 남았다. 조국이 망해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남아있는 서쪽 벽에 모여 망국의 한을 달라며 통곡을 했다 해서 “통곡의 벽”이 되었다.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 성지다.
달라진 게 없는 국제정세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96년전이나 지금이나 한반도를 둘러 쌓고 있는 열강들은 모두 자기 국익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96년전 조선 독립 청원을 못 본 척 넘긴 미국은 이번에도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이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진의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셔먼 정무차관은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기본입장은 과거부터 동북아가 역사의 상처를 씻고 미래지향적인 발전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 등 역사 갈등이 되풀이 되면서 한 미, 미 일 동맹구도가 흔들리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것으로 미국은 자신의 입장을 전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아베정권을 움직일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한데 미국의 이런 발언은 과거사 문제에서 아베 정권이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에서 우익적 태도를 더욱 강화할 공산이 커서 한일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우리는 친일파 문제를 정리하고 민족정기를 세울 기회가 있었으나 미국의 입장 때문에 기회를 잃었다. 미국은 남한을 공산주의 남하를 막는 전초기지로 생각해 반공정권을 세웠다. 미국의 국익에 희생되어 친일파 문제 척결을 못하고 민족보다 이념을 우선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친일잔재를 씻어내야 한다. 친일잔재를 씻어내지 못해 위안부 문제 같은 반 인권적 인륜범죄를 괴변으로 호도하여 일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박유하 교수 같은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채찍을 들어 친일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기사 등록일: 20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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