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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과 의열단_기자수첩
 
무력투쟁이 필요한 때

조선말기 국력이 쇠퇴했을 때 혁명이 일어나거나 다른 정치세력, 공화정이나 다른 왕조가 들어서 자연스럽게 교체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 식민지가 된 것에서 근,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나라를 빼앗기자 여러가지 형태의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외교적 투쟁, 정치적 투쟁, 경제적 투쟁, 문화 사회적 투쟁, 무력투쟁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각자 능력과 형편과 자질에 맞는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 무력투쟁은 적에게 주는 타격이 직접적이고 가시적이라서 효과가 큰 방법이다.
무력투쟁의 뿌리는 조선말기 을미왜변 전후에 시작된 의병활동으로 의열단의 의열투쟁, 한인애국단의 의결투쟁, 조선의용대의 독립투쟁, 만주 독립군과 동북항일연군의 무장독립투쟁, 광복군의 항일전 등이 있다.
무장독립투쟁은 삼일운동 이후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비폭력 평화적으로 전개된 삼일운동이 일본의 폭력적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이 안되는구나”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 무렵 조직된 무장투쟁 단체 중에 의열단이 있다. 의열단을 조직한 인물은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는데 밀양은 수 많은 독립운동가를 낳은 독립운동의 성지다. 강인수, 김대지, 김명규, 김원봉, 고인덕, 김병환, 김상윤, 박지원, 배중세, 윤세복, 윤세영, 윤세주, 윤치영, 이언권, 이장수, 손경헌, 손기욱, 손일민, 손중헌, 손호, 최수봉, 한봉근, 황상규 등이다. 황상규는 김원봉의 고모부다.
김원봉이 무력투쟁을 결심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와 관계가 있다. 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청원하자는 외교적 노력에 대해 김원봉은 회의를 가졌다. 각국 대표 앞에서 비압박민족의 고통을 호소하여 그들의 동정을 얻어 독립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민족과 조국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데 외국에 호소하여 그들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할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될 일이었다.
또한 일본이 패전국이라면 모를까, 전승국의 일원인데 어느 나라가 일본과 소원한 관계가 되면서 동양의 비압박민족을 도울 것인가?
구차하게 외국에 독립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파리에 자객을 보내 일본 대표를 암살해 조선민족의 독립열망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김원봉은 그 일을 친구 김철성에게 맡겼다. 김철성은 여권과 권총을 갖고 파리로 갔다. 그러나 거사 직전 권총을 잃어버려 일본 대표 사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훗날 김원봉은 “그 때 권총을 훔쳐간 사람은 파리에 있던 동료였다.”고 술회했다.

의열단

김원봉은1919년 11월로 13명의 동지를 규합해 의열단을 조직하고 행동지침서인 공약10장과 제거해야 할 대상을 일곱 개로 분류했다. 이를 칠가살이라하는데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뇌, 대만 총독 및 고관,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였다.
한국의 자칭 애국보수들은 의열단 등 무장독립투쟁 단체를 중동 테러단체와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독립운동을 매도하고 폄하하는 매우 사악하고 교활한 시각이다. 의열단이나 무장독립단체들은 조국독립과 무관한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분명했다.
조국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들, 강제병탄에 책임 있는 자, 공동체를 배반하고 외세에 앞잡이가 되어 동족을 핍박한 자 들로 목표가 국한되었지 아무데서나 폭탄 터뜨려 무고한 사람을 살상하는 무지한 폭력배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애국보수라면 자칭이던 타칭이던 독립운동이나 외세 배격에 앞장서고 그런 역사적 사실을 영광스럽게 알아야 하는데 한국의 애국보수들이 그렇지 못한 것은 그들의 생물학적 조상들이나 이념적 조상들이 친일파로서 동족을 핍박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고 민족 통합보다는 분열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1918년 9월 중국으로 떠났다. 그에게는 그것이 곧 망명이었다. 그는 해방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의열단을 조직해 무력항일투쟁에 전력을 다 했다. 그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조선을 떠돌았고 일본에서도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활동무대 중국에서는 실체와 이름과 그림자가 때로는 같이 때로는 따로 떨어져 떠돌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같은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이 신출귀몰한 남자에게 일본은 현상금 100만원을 걸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현상금이 60만원이었으니 김구선생 보다 현상금 액수가 높았다. 당시 100만원은 지금 200-300억에 해당하는 거액으로 일본에게 있어 의열단과 김원봉은 그림자만 남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열단 이후

의열단으로는 일본에 큰 타격을 주는 게 어렵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의열단을 해체하고 규모 있는 무력조직체를 창설했으니 조선 의용군이다. 그리고 그는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냈고 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는 일제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조선의용군 중 사회주의 계열은 그 후 연안으로 건너가 팔로군의 일원이 되었다.
김원봉으로서는 이때가 고비였다. 그가 의용군을 인솔해 연안으로 갔던가 아니면 중경으로 갔으면 그 후 남에서나 북에서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을 것이다. 독립운동이 대우받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와 치열하게 싸운 그는 해방 후 남에서도 북에서도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북한에서는 임시정부에 참여했다는 이유와 남의사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배척 되었다. 남의사는 공산당 탄압에 앞장 선 국민당 비밀조직으로 김원봉은 남의사 강택을 통해 항일 무력투쟁 지원을 받았다. 남한에서는 통일정부 수립, 반 이승만 노선, 과격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남한에서는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지사들에게 ‘과격분자’라는 멍에를 씌웠다. 친일파들이 사회 중추세력이 된 남한사회의 비극이다.
그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이나 사회주의 계열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으므로 남한에서는 북한과 가까운 인물로 취급되었고 더구나 48년 월북해 북한에서 장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에 올라 남한에서는 금기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백범 김구선생이 우파를 대표한다면 김원봉은 좌파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왜 월북을 했을까

채만식의 마지막 소설 ‘소년은 자란다’에서 채만식은 소년의 눈을 통해 왜곡된 해방을 본다. "젠장 맞을! 이거 해방 잘못됐어, 잘못돼…… 어서 해방을 고쳐 해야지, 큰일났어!" 해방이 되었으나 여전히 세상은 친일파 세상이었다. 일본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던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망신을 당한다.
김원봉에게 있지도 않은 혐의를 씌워 체포하는데 화장실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혁대도 매지 못한 채 수갑 차고 끌려갔다. 일제 때도 당하진 못한 수모를 의열단 살생부 명단에 오른 노덕술에게 당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우익의 암살 대상이었다.
그는 중경에 있을 때 비서를 지낸 사마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은 별로 가고 싶은 곳이 아니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나를 위협해 살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여운형이 암살 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해방된 조국은 그가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
북한에서 그는 고위직을 지냈으나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반대했고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이 되는 통일된 조국을 바랐다. 그의 생각은 김일성의 생각과 달랐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총 들고 일본과 싸운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 남한과 다를 줄 알았으나 김일성 절대권력체제가 굳어지며 그곳에서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는 1958년 공직에서 물러난 후 곧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나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심지어 어디 묻혀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 애국열사 묘에는 어두운 밤 하늘을 초롱초롱 빛낸 인물들이 누워 있다. 김규식, 류동열, 박태원, 양세봉, 오동진, 조소앙, 조완구, 최동호 등등. 그러나 그의 묘는 없다. 그는 그림자는 아직도 해방을 맞지 못한 것이다.

광복의 달을 보내며

8월은 광복의 달이다.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로 고국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은 행사로 끝날 것이 아니고 우리 가슴에 영원한 기쁨과 벅찬 감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광복의 달을 보내며 남과 북에서 잊혀진 혁명가 약산 김원봉 선생 생각이 났다.
약산 선생은 형제들도 빨갱이 누명을 쓰고 죽었고 막내 누이동생이 밀양에 살고 있다. 올해 83세인 약산의 누이동생은 죽기 전에 오빠가 독립 운동한 공적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럴 날이 언제나 올지.

기사 등록일: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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