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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보훈의 달을 맞아_기자수첩
사라진 민족 긍지, 신흥무관학교
 



일제 침략과 무력항쟁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자 일본은 조선침략을 노골화해 심지어 왕후를 시해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에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근대 의병운동의 효시는 동학혁명에서 찾아야겠지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왕후 시해다.
왕후가 외적에 시해 당하자 분노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반 서민들까지 합세했다. 그 즈음에 시행된 단발령도 의병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새로운 변화는 반발과 저항을 가져온다.
100년 이상 화석연료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환경 보호 생각해서 화석연료 쓰지 말고 친환경 에너지 쓰자 하면 석유, 에너지 업계 중심으로 반발과 저항이 일어나듯 상투 틀고 도포 입는데 익숙해진 조선 말기에 갑자기 상투 자르고 양복 입으라니 ‘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고 저항과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을미의병은 충청도 제천을 중심으로 경기 이남 지방에서 일어나 친일관리를 처단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오직 의협심 하나에 의지해 일어난 의병은 무기는커녕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규율도 없어 번번히 일본군이나 관군에게 패했다. 무기랍시고 농기구 들고 나선 의병들이 패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의기만은 충천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단발령을 내렸던 김홍집 내각이 물러났다. 그 당시 사람들도 친일파를 몹시 싫어해 김홍집 총리대신, 정병하 농 상공부 대신 등 관료들이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고종은 어느 정도 사태가 수습되었다 생각해 의병들에게 해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허울만 좋은 황제지만 그래도 황제의 칙령이니 의병장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의 의병해산 칙령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있다.
고종이 의병을 권고한 이유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빠져 나가기 위해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방으로 분산 시키기 위해서이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무사히 빠져 나갔으니 더 이상 의병활동이 필요 없어 해산을 권고했다는 해석이다. 고종이 ‘뒤통수의 달인’ ‘뒤집기의 명수’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해석이다.
을미 의병 이후에도 을사늑약 때는 을사의병이 정미 7조약 때는 정미의병들이 일어났다. 일본 침략에 대한 의병활동이 경술국치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와 이회영 일가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의병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력항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월등한 무기를 지닌 일본의 조직적인 궤멸 작전이 시작되어 만주를 비롯해 해외로 나가 무력독립항쟁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큰 일을 해 낸 가족이 우당 이회영 일가다.
우당 일가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삼한갑족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안으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명문이다. 국치를 당하자 우당 일가는 조선에서 누리던 일체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일가 60명이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건너갔다. 전 재산이 지금 돈으로 600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당 일가를 중심으로 이상룡, 윤기섭, 이동녕 등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독립단체를 세웠다. 석주 이상룡은 안동의 명문가 출신으로 석주의 생가는 사대부로서 최고의 호화주택인 99칸 집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석주는 임시정부 3대 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참고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하라는 독립운동은 안 하고 엉뚱하게 위임통치 해달라고 청원하며 돌아 다니다 탄핵 되었다. 2대 대통령은 박은식, 3대는 대통령을 국무령으로 이름을 바꿔 석주가 취임했다.
석주와 우당 집안은 1905년 을사늑약 때부터 무력항쟁을 계획해 이미 사전답사를 해둔 뒤였다. 무력항쟁의 전 단계로 경학사를 조직해 만주로 건너오는 동포들이 생활터전을 잡아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경학사가 세워지고 두 달 후 1911년 6월10일 신흥강습소가 문을 열었다. 강습소라는 이름은 중국정부의 허가를 위한 이름으로 실제는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신흥강습소는 일년 후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1920년 7월 일제에 의해 폐교 될 때까지 명실상부한 독립군 양성기관이 되었다.
교주는 우당의 작은 형 이석영, 교장은 석주 선생이 맡았다. 신흥무관학교 1회 졸업생 중에는 수석 졸업자 오광선, 이승만 정권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영문학자 변영태, 국무총리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 등이 있다. 그 외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 의열단을 조직해 활약한 약산 김원봉 등이 있다. 약산과 함께 의열단으로 활약했던 윤세주는 태항산 전투의 영웅으로 조선의용군과 함께 40만명의 일본군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윤세주는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종군해 핵심적 역할을 했고 광복군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엘리트로 활약했다. 독립군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에 입학한 김경천(본명 김광서)은 졸업 후 기병장교로 근무하다 탈출해 신흥군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광복군 총 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도 일본군 장교로 있다 독립운동에 참가, 신흥군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지청천 장군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할 때 일본군 군사교본과 군사지도를 갖고 와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그 후 광복군의 핵심 역할을 했고 해방 후 국군 창설에도 모태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성재 이시영, 경희대학교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그 후 해방이 되어 우당의 6형제 중 살아서 조국 땅을 밟은 사람은 5남 성재 이시영이 유일했다. 성재 선생은 을사늑약 때는 외무부 조약국장으로 실무자로서 외무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건의했으나 박제순은 일본이 하자는 대로 했다. 성재 선생은 늑약을 막지 못한 자책감으로 사직 했다. 성재 선생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다.
신흥무관학교 이야기를 하려면 성재 선생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해방 후 1947년 성재 선생은 신생 조국에는 애국적 청년들이 필요하다 생각해 종로에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해 신흥무관학교의 뒤를 이었다. 그 후 1949년 2월 성재학원이 설립되고 3월에 문교부로부터 신흥대학교 설립이 인가되었다. 당시 광고에는 신흥대학교 설립이 1911년 6월10일로 신흥무관학교의 전통과 취지를 이어 받았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성재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재가 계속되고 방위군 사건 등 무능과 부패로 얼룩지자 51년 부통령을 사임했다. 사석에서는 “우남 형님, 성재 아우” 했었는데 성재가 부통령을 그만두자 탄압이 시작되어 운영하던 신흥학원도 재정난에 봉착했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 조영식과 김인선이 신임이사도 등재되었다.
조영식은 54년 회기동에 학교부지를 마련해 이전하고 기존 이사들은 차례로 해임되고 조영식 측근들이 이사도 등재되었다. 이름도 성재학원에서 고봉재단으로 바뀌었다. 1960년 3월 학교 이름도 신흥대학교에서 경희대학교로 바뀌었다.
그 후 성재의 후손들과 조영식 이사장 사이에 오랜 동안 송사가 진행되었으나 성재의 아들 이규창씨가 세상을 떠난 후 송사도 끝났다.
1982년 신흥대학 출신들이 “경희대학의 뿌리가 신흥무관학교에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경희대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통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성재의 후손들과 조영식 이사장 사이에 학교 소유권 문제를 놓고 송사가 벌어졌었지만 이제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종찬(우당의 손자이자 김대중 정권에서 국정원장을 지냄)씨 말대로 “이제 와서 학교를 찾자는 것도 아니고 신흥학원의 창학 이념을 살리자는 것”인데 경희대학교 측에서는 묵묵부답이다.
경희대 측에서 신흥무관학교 전통을 이어받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소유권 문제에서 비롯된 해묵은 감정 때문이지만 한국사회가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들이 멸시와 조롱을 받고 피해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사회임을 생각할 때 경희대와 신흥무관학교 관계는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에게 조국이 최고의 영광을 안겨줘도 부족한데 이 조국이란 곳이 친일 부역배들이 권력을 잡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고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죄 지은 사람처럼 변두리에서 숨 죽이고 눈치나 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독립운동을 폄하하고 왜곡하고 축소하며 오히려 부역배들로 인해 조국이 발전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사회가 70년씩 유지되는 것은 해방 후 친일파 정리를 못했기 때문이다.
친일 당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고 없으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나 역사적으로 맺힌 매듭을 풀고 지나는 것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국립현충원에 친일 부역배들과 함께 잠들어 있어 꿈 자리가 뒤숭숭한 호국영령들의 영혼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다.

기사 등록일: 201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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