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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레스키와 국가의 조직폭력_기자수첩
 
우크라이나(Ukraine) 여행길에 고려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고려인을 러시아말로 까레스키라고 부른다는데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가 조선말 혹은 일제 식민지 시절 조정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피해 혹은 일제의 폭압과 수탈을 피해 살 길을 찾아, 아니면 조국 독립의 꿈을 이루고자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한 이들의 후손들이다.
고려인이란 단어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다. 조선말기부터 이주를 시작했으니 조선인이라고 부르는게 맞긴 맞는데 남한에는 '조선'이라면 자다 경기 일으키거나 졸도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한국인이라고 하면 북한에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심 끝에 택한 단어가 고려인이라고 한다.
스탈린 집권 후 고려인들은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가축 싣는 열차에 실려 중앙 아시아로 이주 되었다. 일부는 우크라이나로 왔다. 헝거리로 간 고려인들도 있다고 한다. 이들의 후손들은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는다. 키에프에서 한국식당하는 고려인도 만났고, 농사짓는 고려인도 만났다.
농사 짓는 고려인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유복하게 살고 있다. 가령 양파 농사를 지어도 고려인들은 1 헥타르에서 30톤을 소출하는데 정작 우크라이나 인들의 소출은 그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소출을 늘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고려인들이 성실하게 노력하며 사는 것은 아니고 알콜중독이나 마약에 손대는 고려인들도 있으나 이는 예외적이라고 한다.
2대조, 3대조들은 짐승처럼 열차에 실려 낯선 땅에 흘러 들었으나 후손들이 그래도 유복하게 사니 그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고려인들은 스탈린 이야기가 나오면 한결같이 개새끼라고 한다. 아무리 한국말이 서툴러도 스탈린=개새끼는 안다. 맞다, 스탈린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이번 유럽여행 길에서 필자는 스탈린, 히틀러 두 인간이 저지른 변태적이고 광기어린 폭력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헝거리, 폴란드, 오스트리아, 프랑스, 우크라이나, 네덜란드 어디에서나 두 인간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용해 저지른 폭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 인륜적인 폭거는 오롯하게 합법적 절차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
극동지방에 사는 고려인들은 러시아 혁명 후 부터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되었다. 불어나는 고려인으로 극동지방에는 현지인보다 인구가 많아졌다. 일하는 능력만큼은 타고난 고려인들은 천부의 성실성으로 현지인들보다 잘 살았다. 더구나 러시아 혁명에 일정 역할을 한 사회주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중앙정부 보기에 못마땅했다.
그러나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무경우이고 단순무식한 집단이라해도 그런 이유로 멀쩡한 사람을 이주시킬 수는 없으니 명분이 필요했다. 스탈린은 “일본 첩자들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고안했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걸었는데 안보를 빙자해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는 건 스탈린뿐만이 아니다.
170,000명 정도가 이주했는데 약 10%가 목숨을 잃었다.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 초기의 삶은 수용소 수준이었으나 타고난 성실과 근면으로 농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니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 의회는 고려인 명예회복과 강제이주를 사과했다 한다. 물론 실질적 보상은 없었다.

양쪽으로 당한 헝거리
헝거리 수도 부다페스트에는 ‘테러의 집’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영웅광장 쪽으로 1 킬로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인데 그 건너편으로는 프란츠 리스트 박물관도 있다.
테러의 집에는 “우리는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이렇게 당했다”는 생생한 기록들이 있다. 일층에는 폭압의 상징인 탱크가 놓여있고 피해자들의 사진이 있다. 2, 3층에는 피해자나 그 가족들의 육성녹음과 영상자료, 각종 고문기구,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어 두 악마의 범죄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2차대전 때 헝거리는 독일편이었으나 전세가 기울자 독일과 작별을 하려했다. 그러자 눈치 하나는 기가막힌 히틀러는 아예 헝거리를 점령해 버렸다. 이때부터 헝거리는 히틀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붉은 군대가 헝거리를 침공해 유명한 부다페스트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양쪽 합해 전사 120,000명, 부상 860,000명으로 인류 역사상 6번째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전쟁이다.
1945년 2월 독일 헝거리군은 항복을 했다. 헝거리 시민은 나치를 물리쳐 준 해방군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다뉴브 강을 굽어보는 겔레르트 언덕에 기념비를 세워 주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는 약탈과 강간으로 고마움을 갚아 주었다. 늑대 피하니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약탈과 강간은 몽고군이 전문인데 몽고군이 모스코바 공국을 점령했을때 약탈과 강간에 몸서리를 친 러시아는 거의 천 년이 지나 약소국을 상대로 야만적 악행을 되풀이 했으니 인간의 이성은 야만성을 억누르기에 역부족일까?
그러나 외국에 파병된 군대가 현지인을 상대로 저지른 야만적 폭력은 붉은 군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군이 동아시아에서 저지른 만행, 한국군이 베트남 전에서 저지른 폭력도 있다.

일본의 악랄한 조직폭력
그러나 국가에 의한 조직폭력이라면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살인, 폭행, 강간, 납치, 부녀자 유괴 등 일본이 자행한 폭력은 히틀러 스탈린 보다 삼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악랄한 범죄는 미성년 소녀들을 유괴해 성노예로 부려먹은 일이다. 일본이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범죄 자체도 용서 못할 일이거니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정어린 사과나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조건없는 보상 사과가 일본의 경우와 비교되는데 단순비교를 해서는 안 되고 국제사회의 역학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저런 전후 맥락을 짚어보아도 일본의 진정 있는 사과와 보상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이 평화와 공존보다 힘과 폭력에 의지해 무장을 꿈꾸고 있어 더더욱 사과와 보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과 정대협 등 시민단체에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일본의 한계일 것이다. 해서는 안될 짓 하고서도 시치미 떼고 적반하장 식으로 책임을 미루는 게 일본 우파가 하는 짓이다.

현재 진행중인 국가폭력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폭력도 문제지만 국가가 자국민에게 행하는 국가폭력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도 해방 70년 지나도록 무수한 국가폭력이 개인들에게 행해졌다. 군사독재 시절에만 국가폭력이 있었던 게 아니고 “요즘이 어느 땐데”, “옛날보다 얼마나 좋아졌는데”라고 말하지만 그 틈을 뚫고 국가 폭력은 다른 얼굴을 하고 들어선다.
“과거에 대한 무지가 현재에 대한 이해 부족을 초래한다”는 말도 있듯 우리는 해방 후 자행된 국가폭력을 바로 잡지 못하고 치열한 반성없이그저 경제발전의 어두움 정도로 인식해 왔다.
반성이 없으면 폭력은 계속된다. 백남기 농민에게 물 대포 정조준해서 쏜 경찰의 행위는 공권력이 행한 살인 행위다. 그럼에도 궤변과 무성의로 일관하는 정부의 태도로 볼 때 아직도 반성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든다. 반성은커녕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교묘하고 은밀하게 행하여 지고 있다.

기사 등록일: 201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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