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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_ 기자 수첩
고종황제가 이준열사에게 수여한 헤 이그 특사 위임장(1907.4.20), 이준(왼쪽), 이상설(가운데)과 이위종  
이번 유럽여행의 종착지는 네덜란드 헤이그다. 헤이그는 네덜란드 행정수도이자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기구가 있는 곳으로 1907년 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한 "헤이그 특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마침 70주년 광복절도 다가와 헤이그에서 이준열사 행적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일본의 협박으로 빼앗긴 외교권을 찾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겠다는 것은 고종의 아이디어는 아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 이동휘, 이회영 등 우국지사들이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에게 건의해 허락을 얻은 것이다.
특사로는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러시아 공사관 참사관 이위종이 지명 되었다. 이위종은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해 특사의 대변인 격이었다.
만국평화회의에는 모두 46개국이 초청되었다. 조선은 초청국가 명단에 Coree라는 명칭으로 12번째 국가에 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이 외교권이 없으므로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항의했고 이에 영국이 적극 동조해 조선의 참석은 무산되었다. 영국에 캐나다 같은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당시의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원주민 학교 운영에 대해 2차대전 때 일본계 캐나다인 강제 수용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하는 캐나다는 얼마나 쿨한가.
당시 네덜란드 신문은 조선이 일본 영국의 방해로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사실을 풍자만화를 통해 비판하였다. 만국평화회의에 평화의 왕 예수도 참석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그림으로.
회의 참석이 무산되자 이위종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일본의 외교권 박탈의 부당성을 알렸다. 그는 기자에게 헤이그에 법과 정의, 평화의 신이 있다길래 찾아왔다면서 회의장에서 배척 당한 울분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이위종이 평화회의 성격을 묻자 전 세계 평화와 정의를 보장 하기 위한 조약을 맺는다면서 조약은 최종적으로 해당국 군주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답을 얻었다.
그러자 이위종은 을사늑약에 군주 고종의 서명이 없음을 지적하며 그 부당성을 적시했다. 을사늑약에는 외무대신 박제순의 서명이 있을 뿐 고종의 서명은 없다. 이위종은 언론 인터뷰뿐 아니라 각종 집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으나 동정 이외의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준 열사는 7월14일 순국했다. 의사 사망진단서에는 사망원인은 없고 사망 사실만 기록했다. 당시 법의학 수준으로 사망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히는 게 어려웠는지 아니면 동양인의 죽음에 관심이 없었는지 혹은 일본의 개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열사의 순국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가설이나 추측이 난무할 뿐 진실이 알려진 것은 없다. 자살설도 정황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고 종기 때문이라는 설도 일본측 주장이지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헤이그 특사로 인해 고종은 일제로부터 퇴위압력을 받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당시 헤이그 특사를 국제정세를 모르는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때는 세계가 강대국 논리대로 움직이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승만 말대로 국제법이란 게 실체도 없고 강대국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권회복을 위해 가눙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고종과 측근은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다. 다만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정주영 회장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행동력은 본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해보기는 했어?"
이상설은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이 조선을 후원하도록 노력했고 미주 한인들의 결속을 주도했다. 그 후 연해주에서 성명회 권업회 등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1914년에는 광복군 정부를 세웠다. 그는 이회영과 함께 산한혁명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고종을 염두에 두고 고종의 망명 계획을 세웠으나 성사 직전 아쉽게 실패했다.
191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데 시신은 화장해 재를 날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위종은 러시아 귀족 딸과 결혼해 딸 셋을 두었다. 최근 발견된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헤이그 특사 후 러시아에서 아버지 이범진 공사를 돕다 경술국치를 당해 이범진이 권총으로 자결하자 장례를 치른 후 사관학교에 입학해 러시아군 장교가 되었다.
그후 적백내전에서 볼세비키에 입당해 혁명에 앞장 섰다. 공산당에 자서전을 제출한 것이 1924년으로 그후 기록은 없다.


이기항 이사장과
홍우준 이사장

이준 열사 기념관은 그가 순국한 드종호텔이다. 기념관이 개관한 것은 1995년으로 여기에는 역사를 지키고자한 네덜란드 교포부부의 숨은 노력이 있다. 이기항, 송창주 부부는 70대인데 지금도 암스테르담에서 헤이그로 출근해 이준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다.
드종호텔은 1620년에 지어진 건물로 호텔, 당구장, 식당, 술집 등 위락시설이었는데 주변이 낙후되어 재개발 대상이 되었다. 건물이 헐릴 무렵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이기항씨는 헤이그 시와 교섭해 사재를 털어 건물을 인수했다. 그 후 시와 교섭해 건물 용도를 박물관으로 변경 재개발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그 후 건물 개, 보수 이준 열사 및 조선 근대사 자료 입수 및 정리, 기념관 준비를 했다. 기념관이 개관한 것은 1995년으로 주위의 도움도 있었지만 이기항 송창주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유럽 유일의 항일유적지를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면 건물은 재개발 대상으로 헐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 했다.
홍우준 이사장은 다른 경우다. 경민학원 이사장 홍우준은 전두환 정권에서 민정당 의원을 지냈다. 그는 새누리당 국회의원 홍문종의 부친이다. 홍우준 이사장은 하와이 호놀루루 소재 독립문화원 건물과 토지를 145만 달러에 미국 회사에 매각해 논란이 되고 있다.
독립문화원은 일제 식민지 시절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한인국민회의 하와이 총회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는 무명 애국지사 추모비도 있다. 이 곳을 경민학원이 2002년 55만 달러에 매입해 독립문화원으로 꾸몄다.
이곳은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고 하와이 교민들이 이민 초창기에 사탕수수 밭에서 노동하며 조국독립의 꿈을 이루고자 한푼 두푼 모은 땀과 노력의 결실로 몇년 전 매각설이 돌 때 홍우준씨에게 사재를 들여서라도 구매할테니 외국인에게 팔지 말라고했음에도 매각은 사실이 아니라고 거짓말로 호도한 후 교민들에게 일언반구 없이 매각한 사실에 대해 어처구니 없어하며 곧 기자회견을 열어 교민들의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내 건물을 시세차익 남기고 팔겠다는데 누가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소위 한국의 자칭 보수라는 자들의 민낯으로 이런 자들에게 가진 자의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던 것일까?
보수는 지킬만한 가치를 지키는 것인데 사탕수수 밭에서 노동으로 번 돈을 조국 광복을 위해 바친 노력과 조국 독립의 염원은 지킬만한 가치가 아니고 내 돈 내가 벌어 내 맘대로 쓰겠다는 천민 자본주의가 그들이 지킬만한 가치란 말인가?

외교주권 군사주권

고종과 측근들의 빼앗긴 외교주권을 찾겠다는 일념은 고종이 퇴위하는 결과를 빚었고 특사들은 궐석재판에서 중형을 선고 받았다.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에서 외교주권 군사주권은 핵심 요소로서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정상적 독립국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 허울 좋은 제국이요 무늬만 제국이었고 고종 역기 이름만 황제였다.
광복 70년이 되었는데 한국의 군사주권은 여전히 미국 손에 있다.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준 작전권이 아직 미군 수중이 있다. 전시 작전권 환수는 한국 정부에서 환수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한국이 군사적으로 미군에 예속되 있다지만 벗어날 의지조차 없다면 외교권 찾겠다고 헤이그에 특사 파견한 조선시대 말 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광복 70년은 분단 70년인데 통일을 위해서라도 늦은 감이 있지만 친미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일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도움이나 지지 없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현재의 친미 일변도 외교로서는 중국, 러시아 상대로 통일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 문제만 해도 중국과 러시아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가.
그러나 해방 후 친일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다 6.25를 맞아 친일파들은 반공으로 신분세탁하고 친미파로 변신 남한 사회 주도세력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방면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어 친미 일변도 와교정책은 변할 가망이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8월15일은 건국절일까?

1948년 8월15일 광복절 3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정부 문서에는 1948년이라고 쓰지 않았다. 당시에는 서기를 공식연호로 쓰지 않고 단기를 썼다. 그럼 단기 4281년이라고 썼을까? 아니다.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썼다.
민국이란 도대체 뭐고 민국 30년은 무슨 소리인가? 민국은 대한민국을 말하고 민국 30년이란 기미독립선언 후 세워진 임시정부 30년이란 소리다. 민국 30년을 주장한 사람은 이승만으로 "우리가 지금 남의 도움을 얻어 독립한 것이 아니고 이미 30년 전에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미국 독립선언 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임시정부 법통을 잇고자 했다. 북한 김일성을 향해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으니 북쪽에서 너무 까불지 말라"는 제스처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뿐 아니라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 중에서도 임시정부에 대해 회의적인 단체들도 있었지만 임시정부 법통을 잇는 것은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른 임정 요인들에게도 "임시정부 정통성은 여기 있으니 그렇게 알라"는 신호다.
건국절 운운은 일본 도요다 재단 등 보수우익단체의 연구비를 받은 뉴 라이트 학자들의 주장으로 찬일행적을 지우고자 하는 친일파와 연계되어 식민지 근대화론의 일환으로 건국절 운운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추켜 세우지만 이승만 자신이 임시정부 법통을 잇는다며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쓴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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