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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을 맞이 하며 _기자수첩
 


개천절의 유래
모국에서는 10월3일을 개천절로 지킨다. 개천절은 고조선의 건국절로 올해가 고조선 건국 4349년 되는 해다. 10월3일을 개천절로 기념하는 것은 민족종교의 하나인 대종교에서 비롯되었다.
일제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된 1909년 대종교 창시자 나철이 10월3일을 개천절로 정해 단군 사당에 제사 지내고 경축행사를 가졌다. 상원 갑자년 음력 10월3일은 환웅이 이 세상에 내려온 날로 조선시대에도 일부 지방에서 음력 10월3일 단군에게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개천절은 국운이 쇠퇴해가고 일제의 침략이 심해지던 때 민족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했다. 민족, 단군 이야기 나오면 편협한 국수주의라던가 다문화 시대에 사는데 통합을 저해하는 행위라고 손가락질 당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로 이 세상 만물 중에 뿌리 없이 태어난 존재가 어디 있는가?
일제 침략이 본격화 되던 시기에 개천절 기념이 시작되었지만 상고시대부터 동맹, 영고, 무천 등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의식이 10월에 있어 제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대종교가 종교행사로 시작한 것이다.
3은 전통적으로 길한 숫자다. 서양에서 7을 행운의 수라고 하듯 우리 조상들은 3을 길한 수라고 여겼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음력 10월3일을 개천절로 정하였다. 광복 후 1949년 10월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양력 10월3일로 개천절로 정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광복 후 정부수립 할 때 관보에 민국30년이라 기록해 임시정부 수립년을 연호로 써 임시정부 정통성을 이어 받았음을 만 천하에 알렸다.
1948년 9월12일 제헌국회는 단기(檀紀)를 국가 공식 연호로 정해 대한민국 정부가 고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선언했다.
고조선 건국 서력 기원 전 2333년
단기를 계산할 때는 서기에 2333년을 더하면 된다. 올해는 단기 4349년되는 해로 고조선 건국4349년 되는 해다. 2333년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동국통감에 요임금 25년 무진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했다. 요임금은 갑진년 기원전 2357년에 건국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2357년에서 25를 빼면 2333년이 되는 것이다.
2333년은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고조선 건국을 짧게 계산한 것으로 사대주의 사학에서 식민사학으로 이어지다보니 2333년이 정설로 굳어졌다. 고조선의 원래 명칭은 조선(朝鮮)으로 중국 역사서에서 조선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되어야 하고 조선 안에도 기자 조선이니 위만 조선이니 하는 아류가 있어 원래 조선, 최초의 조선이란 의미로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단군과 삼국유사
단군의 건국일화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온다. 일연이 부처 앞에서 목탁 치고 있다 부처로부터 영감을 얻어 소설가적 창작력을 발휘해 있지도 않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김부식의 삼국사에 빠진 내용, 사대주의적 유교사관에 입각해 저술한 삼국사에 자주적 요소, 불교적 요소, 주체적 요소를 가미하여 차별화된 삼국역사를 저술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에 비해 중국 사료를 덜 인용하고 우리 고유 사료를 더 인용했다. 중국 사료는 27종 인용했고 우리나라 사료는 50종을 인용해 우리 고유 사료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고기를 인용하여 고조선 건국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단군고기는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인용되고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 일부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대부분은 사대주의 사관을 갖고 있어 단군 보다는 소중화 사상을 근본으로 여겼다.
사대주의 역사관 식민 역사관의 단군 죽이기
이런 사대주의 역사관의 시작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에게서 근원을 찾고 있다. 단재는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을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의 제일 대 사건”이라고 말했다. 서경(평양) 중심세력 묘청은 자주파이고 개경 중심세력 김부식은 사대파인데 김부식이 이겼다는 것은 사대파가 자주파을 이겼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사대주의 세계관이 주류가 되어 유교이념 이외에 사상, 역사, 예술은 모두 사문난적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주의 역사관이 고착되었으니 태종, 세조, 예종의 분서갱유는 사대주의 역사관이 얼마나 조선의 주류사회에 퍼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다. 더구나 학문 좋아한다고 알려진 세종까지 끼어들어 유교 이념에 반하는 서적들을 불태워 사대주의 역사관을 충실하게 지키며 단군 죽이기에 나섰는데 조직적 분서갱유는 세조와 예종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전두환 격인 세조는 역사서를 편찬 한다는 명목으로 8도 관찰사에 유시문을 내려 민간이나 사찰에서 소장하고 있는 역사서를 모조리 수거해 폐기처분하고 일부는 일부는 삼국사절요 와 동국통감 편찬에 인용했다. 당시 수거해 폐기된 역사서는 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삼성밀기, 안함로(安含老)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삼성기,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수찬기소,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3년 5월26일 기사)
세조는 권신들의 농단으로부터 왕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역사를 은폐 왜곡 조작 훼손해 중국의 제후국이 되는데 앞장 섰으니 사악함에 있어서는 친일부역을 은폐 미화할 목적으로 건국절을 들고 나오는 친일부역배들에 못지 않다.
세조뿐 아니라 세조의 아들 예종도 또 한차례 분서갱유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지하에 숨어 있던 역사서를 색출해 폐기했다. 예종은 한술 더 떠 고서를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하고 신고하거나 자진해서 책을 바치면 후한 상을 내려 유교이념에 어긋나는 역사는 말살시키는 정책을 썼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9월18일 기사)
세조 때 시작한 동국통감은 성종 때 완성 되었는데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 상당히 축소 왜곡되어 기록되었다. 이들은 동국통감 단군기사 내용을 삼국유사에도 끼워 넣었다.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君長)이 없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으로 삼으니 이분이 단군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에 평양에 도읍을 하였다가 나중에 백악(白岳)으로 천도하였다. 상(商) 무정 8년 을미년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이 내용은 단군고기의 단군 기사와 너무 달라 창작 수준으로 조선이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제후국이었다라는 보여주려는 의도다. 이런 식으로 축소 왜곡 훼손된 고대사는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또다시 난도질을 당해 단군은 완전히 걸레가 되었다.
조선의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단군을 비롯해 고대사를 왜곡 축소 훼손했어도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는데 일본 학자들은 1894년부터 단군의 건국을 설화 신화로 격하 시켜 허구로 만들었다. 게이오 의숙의 나카 미치요는 “중의 헛소리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었다”고 삼국유사를 폄하하며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날조된 신화라고 공격했다. 이때부터 역사적 단군은 신화 속 인물이 되었다
1916년 조선 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일제 식민사학자 개인 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일본 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려고 설립하였다.
이 위원회에 식민사학자들과 어윤적, 유맹, 이능화, 정만조 등 부일배들을 참여시켜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1922년에는 이를 '조선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권중현, 박영효, 이완용, 이진호 등 친일 매국노들을 참여시켰으며 2년 뒤인 1927년에는 이병도, 최남선 등 친일 부역배 학자들을 동원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조선사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부일 학자 이병도는 역사학계의 태두로서 이기백, 김철준, 이기동, 최몽룡 등이 도제로서 식민사학을 물려받아 확대 재생산하여 전파했다. 이기동은 한국학 중앙연구원장으로 며칠 전 국정감사에서 유은혜 의원에게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라고 망발을 한 장본인이다.
식민사학자들은 한국 역사학계 주류이자 정통으로 식민사학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식민사학은 친일, 부일배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 근대사까지 왜곡해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정하는데 일조하고 있으니 왜곡 축소 훼손 당한 역사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려나.



기사 등록일: 201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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