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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혁명가 카스트로 영면_기자수첩
 

혁명의 자양분 무능과 부정부패
마지막 혁명가 쿠바의 카스트로가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 해도 90세 살았으니 장수했다. 장수뿐 아니라 최장기 집권으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 52년 동안 권좌에 올라 이 방면에 신기록을 세웠는데 두번째는 북한의 김일성으로 45년 통치했다.
카스트로(Castro)는 라틴어 Castrum(요새)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름 그대로 90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티다 결국은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는 스페인 이민자 앙헬 카스트로와 리나 루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리나 루스는 카스트로 집안의 가정부였다.
카스트로-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주역이다. 바티스타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쿠바 혁명을 가져왔다. 바티스타 정부도 무력혁명으로 집권했지만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는 필연적으로 혁명이나 봉기를 불러 일으킨다. 중국이나 우리 역사에 XX난 이라고 하는 게 요즘 말로 혁명이나 봉기다.
무능과 부정부패 국정의 문란으로 고려가 무너지고 이성계가 역성혁명 일으켰듯 역사가 시작된 이래 무수한 나라들이 무능과 부정부패로 사라졌다. 요즘 박근혜가 국민들에게 “무능과 부정부패, 권력의 사유화 국정 문란이 이런 것이다”라고 생생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혁명은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리차드 버크 같은 보수주의자는 프랑스 혁명을 보며 보수가 개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가래로 막을 것을 미리 호미로 막자는 것이다. 그런데 바티스타 정권은 혁명의 물결을 가래로도 못막고 돈과 재산을 챙겨 도미니카 공화국을 거쳐 스페인으로 내뺐다. 체 게바라라는 스타 플레이어 탄생의 무대를 제공하며.
카스트로-체 게바라의 만남
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쿠바 혁명의 영웅 두 사람이 만난건 1955년 7월9일 밤이었다. 여름인데도 그날 밤은 무섭게 추웠다고 한다. 그때부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하고 혁명을 완수할 때까지 운명을 같이 했다.
정부군을 패퇴시키고 혁명전쟁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1958년 12월30일 산타 클라라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체 게바라가 지휘하는 대대는 바티스타 정부군의 장갑열차 부대를 궤멸 시켰다. 정부군 3천명에 맞서 3백명의 대원으로 승리한 체 게바라는 그 후 게릴라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 후 아르헨티나 국적의 체 게바라에게는 쿠바 국적이 주어졌다. 혁명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서였다. 그는 혁명의 2인자로서 국립은행 총재와 각료를 지냈다. 그러나 권력 2인자로서의 기득권과 명예를 버리고 그는 홀연히 쿠바를 떠났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모두 혁명에 몸담아 쿠바를 해방 시켰으나 이념적으로 두 사람은 달랐다. 카스트로가 현실을 인정하는 혁명가라면 체 게바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혁명가였다. 카스트로는 혁명 성공 후 소비에트 연합의 지원을 받아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고 체 게바라는 미국이나 소련 등 강대국으로부터 완전히 경제적 독립을 하고자 했다.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것은 2인자로서의 한계, 혁명 이후 관점의 차이도 있지만 더 많은 민중을 혁명으로 해방 시키겠다는 이상도 많이 작용했다. 그 후 체 게바라는 아프리카 콩고 혁명을 지원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남미로 돌아와 볼리비아 혁명에 투신했다 미군의 지원을 얻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살해 당했다.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부에 대항하여 게릴라 전을 시작했을 때 미국은 카스트로를 지원했다. 미국은 플로리다 반도 아래의 작은 섬 나라가 자신을 그렇게 반대하고 괴롭힐 줄 몰랐다. 어느 나라던지 세상이 바뀌면 기존 세력에 반대했던 세력들이 힘을 얻는다. 쿠바도 그랬다. 각양 각색의 반 바티스타 세력이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그 때 카스트로는 보수파, 민주주의자로 행동했다.
쿠바 국민들의 카스트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서자 그는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혁명의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파는 공산당이 유일했으니. 그리고 처음부터 카스트로가 반미주의자는 아니었다. 수상이 된 카스트로는 백악관에서 닉슨 부통령을 만났다.
카스트로를 만나본 닉슨은 쿠바의 정책이 소련에 기울 것을 걱정했으나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카스트로가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토지개혁,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을 실시하자 미국은 CIA가 주도한 민중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민중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난공불락의 요새
쿠바가 친소정책을 표명하자 소련은 미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 했다. 미국과 90마일 떨어진 곳에 소련 핵무기 배치는 미국에 대한 직접 위협과 공격이었다. 쿠바에는 전쟁 위기감이 감돌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3차대전도 불사하겠다며 강경 발표를 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물밑 교섭을 벌여 “소련은 쿠바 미사일 배치를 철회하고 미국은 터키와 중동국가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철수 하겠다”고 약속해 전쟁 위기를 벗어났다.
케네디 대통령은 향후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미국의 쿠바 금수조치가 강화되었고 이때부터 CIA 공작으로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한 무수한 암살시도가 있었다.
CIA의 외국 정치지도자 암살은 흔히 알려진 일로 박정희 대통령도 CIA 공작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끈덕진 CIA의 암살시도를 교묘하게 피하며 살아남았다.
CIA는 카스트로를 암살하려고 영화나 소설에나 나옴직한 기상천외의 방법을 모두 동원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내 목숨을 버려가면서 암살의 목적을 이루려 했던 형가 같은 자객이 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기사천회의 모든 방법이 실패하고 심지어 여자까지 동원했어도 실패했으니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헛말은 아닌 듯하다.
638회에 걸친 암살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 카스트로는 “올림픽에 암살 피하기 종목이 있다면 내가 금메달”이라고 농담을 했다. 집요한 CIA의 암살을 피하려고 카스트로도 별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일본 전국시대 영주나 쇼균들이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위장 시킨 가케무사를 두었듯이 카스트로도 자신과 똑같이 변장한 쿠바판 가케무사를 두어 암살을 피했고 거처 20군데를 옮겨가며 살았다고 한다.
암살 실패 중에 백미는 카스트로의 정부 마리타 로렌스다. 마리타 로렌스가 임신 중 병이 생겨 미국에서 치료를 받는데 CIA가 접근해 포섭했다. 마리타는 쿠바로 돌아올 때 콜드크림에 독약을 넣어 왔는데 적발되어 카스트로 앞에 끌려왔다.
카스트로는 “나를 죽이려 왔냐?”고 묻더니 권총을 들어 마리타에게 건네주고 “나를 쏘라”고 한 후 눈을 감았다. “피델 나는 할 수 없어!” 마리타는 권총에서 총알을 다 빼내고 카스트로 품에 안겼다.
638회라는 암살시도가 과장된 숫자일수도 있으나 무수한 암살시도를 피하고 5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권력을 누렸던 카스트로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누구나 가야 하는 그 길로 떠났다.
쿠바와 캐나다
미국의 금수조치로 쿠바 경제가 피폐하기 시작했을 때 캐나다 총리 피에르 트뤼도는 1976년 쿠바를 방문했다. 쿠바 방문 전 트뤼도 총리는 1973년 중국을 방문해 국교를 수립해 제3세계와 원활한 관계를 가졌다. 트뤼도 총리는 소련과 관계도 개선했다. 그러나 미국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쿠바 방문 때 400만 달러를 원조했고 천만 달러를 빌려주었다. ‘쿠바-캐나다의 영원한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제3세계와 원활한 관계를 가진 트뤼도 총리의 외교정책은 그 후 캐나다가 국제사회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총리를 그만둔 후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되어 트뤼도는 쿠바를 여러 번 방문했고 트뤼도 총리가 별세 했을 때 카스트로는 몬트리얼을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이번에 카스트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 트뤼도 총리는 조의를 표했는데 외교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너무 지나치다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쿠바의 독재와 인권상황, 정치적 반대자 탄압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정치적 이유로 형무소에서 죽은 사람이 3천명에 이른다. 카스트로가 2001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적도 있지만 카스트로의 통치방식이 캐나다 가치에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충근기자)

신문발행일: 2016-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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