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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휴전협정, 그 후 _오충근의 기자수첩
 
한국전 휴전협정의 의미
7월27일은 한국전쟁 휴전협정일 이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시작되어 1953년 7월27일 휴전이 성립되었으니 3년 1개월 2일 동안 계속된 전쟁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발단도 비극이었지만 끝난 후에도 비극이 계속 중이다. 무릇 모든 전쟁은 정전협정이나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나면 평화협정으로 이어지는데 유일무이하게 한국전쟁은 휴전협정 64년이 지나도록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아직도 휴전협정이 발효 중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남, 북한은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것이지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기득권 수구부패 세력이 남북관계를 긴장시켜 국민의 시선을 돌리게 하려 할 때 써먹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이 전쟁은 남과 북 사이에 벌어진 동족간의 전쟁인데 정작 휴전협정에는 남한이 빠져있다. 즉 문서상으로 남한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 일방은 조선 인민군 및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조선 인민군 대장 남일, 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였고 다른 일방은 국제 연합군 대표단 수석대표 미국 육군 중장 윌리엄 해리슨, 국제 연합군 총사령관 미국 육군 대장 마크 웨인 클라크였다. 휴전협정문 어디에도 남한 측 인사 이름은 없다.

휴전협정 옵서버 유재흥
휴전협정 관련 남한 측 인사는 옵서버(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한 유재흥이 있다. 유재흥은 부자가 친일파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유재흥의 아버지 유승렬은 일본군 대좌(대령)로 조선군 사령부 79연대에서 근무했다. 아들 유재흥은 일본군 대위로 해방 후 조선 경비대에 입대해 대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휴전협정 참관인 유재흥은 한국어가 서툴러 휴전협정 회의장에서도 일본말로 대화 하기 일쑤였다. 유재흥은 휴전협정 참관인 보다 패전을 밥 먹은 한 지휘관으로 유명하다. 6.25 개전 초기 그는 의정부 방면을 지키는 7사단장이었으나 7사단은 패전을 거듭하다 괴멸하였다.
그 후 2군단이 창설되어 군단장이 되었는데 중공군 38군과 42군에 포위되어 군단이 괴멸하였다. 그 후 3군단장으로 보임 되었으나 3군단도 현리 전투에서 괴멸하여 군단이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현리 전투 때 군단장 유재흥은 회의 참석한다 하고 연락기 타고 도주했는데 그 전투에서 조창호 소위가 포로가 되었다. 조창호 소위는 북으로 끌려 갔다 1994년 탈출에 성공해 조국 땅을 밟은 귀환 전쟁포로 1호다. 조창호 소위는 43년 만인 1994년 10월 당시 김동진 육군총장에게 귀환 신고를 했다.

휴전협정의 시작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은 1950년 12월, 그러니까 전쟁 발발 후 6개월만에 유엔총회는 정전을 결의했고 중국(당시에는 중공)에 정전을 제의했으나 거절 당했다. 유엔은 왜 전쟁 발발 6개월만에 정전을 제의했을까?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했다. 10월1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시작했다. 맥아더는 자신만만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하면 섬멸 될 것이라 판단하며 추수감사절(11월23일) 전에는 전쟁이 끝나 장병들은 칠면조 요리를 먹을 것이고 크리스마스 때에는 8군이 일본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의 장담과 달리 8군은 오늘도 용산에 발이 묶여 있다.
맥아더의 장담은 “전쟁이 나면 점심을 개성에서 저녁은 평양에서 먹겠다”던 채병덕 장군의 흰소리에 버금가는 허언이 되었다. 맥아더 계산과 달리 중공군은 섬멸되지 않았고 오히려 중공군 총공세에 견디다 못한 유엔군은 후퇴를 시작했다. 유엔군이 고전하던 12월14일 유엔총회는 정전을 결의했다.
1951년 6월16일 유엔 사무총장은 휴전 보장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화답해 6월23일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휴전관련 라디오 연설을 했고 6월27일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 제안 성명을 발표했다. 6월30일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휴전협정을 제안했다. 7월1일 김일성과 팽덕회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공동 명의로 휴전협정 동의 발표해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전쟁 시작한지 1년만에 휴전 이야기가 긴박하게 돌아간 것이다.
휴전을 한다면 남한이나 북한, 혹은 유엔군 사령관이나 중공군 사령관이 제안해야지 왜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 제안을 했을까? 6.25가 단순히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서 비롯된 ‘조국 해방 전쟁’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벌어진 국제전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휴전 반대, 북진통일의 허구
휴전협정이 시작되어 쌍방의 서명이 있기까지 기나긴 지루한 소모전이 진행되었다. 미국은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중공도 북한도 휴전을 원했고 소련은 평소의 소련답지 않게 “흥정은 붙이고 싸움을 말리라”는 말대로 “임자들 이제 그만 하라”고 거간꾼 노릇을 톡톡히 했으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휴전을 원치 않은 것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수행 능력도 없고 작전권도 맥아더에게 맡긴 남한이 무슨 재주로 북진통일을 한다 말인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의 계산은 정권연장이었다.
전쟁 직전 실시한 선거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국민촉성회는 고작 14석을 얻어 군소정당이 되었다. 총 210석 중 14석이니 이승만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전쟁 와중에 부산으로 피난 가서도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해서 정권 연장을 해보려 했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자 전쟁을 빙자해 계엄령 선포하고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은 헌병들이 단체로 모셔가 연금 시켰다.
북진통일은 국민의 눈을 현혹해 정권연장을 해보려는 정략적 수단이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일을 원하지 분단을 원하지 않는다. 이승만은 그런 국민의 심리를 이용해 북진통일로 정치적 인기를 만회하려 했던 것이지 정말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원했다면 전쟁 벽두에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을 타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지부진한 휴전협정
휴전협정이 체결 되는데 2년이 걸렸다. 2년동안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는 밀고 당기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밀고 당기는 말 싸움은 회담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이슈는 포로석방이었다.
북한, 중공은 국적에 따라 일괄송환을 주장했다. 즉 인민군은 북한으로 중공군은 중공으로 국군은 남한으로 송환하자는 것이다. 유엔 측은 개별심사 송환을 주장했다. 포로 개개인의 의사를 물어 돌아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송환 하자는 주장이다.
포로들 중에는 인민군에 강제로 현지 입대했던 포로들이 많았다. 인민군에 강제 입대했다 잡힌 포로들은 모두 남한으로 송환해 달라고 할 것이다. 중공과 북한이 공산화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 개별 송환하면 북한, 중공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한이나 제삼국을 택할 포로들도 많았으니 북한, 중공은 개별송환을 절대 반대 했다. 반면 유엔군 측은 국적에 따른 일괄송환을 절대 반대했다.
공산주의 확산에 부심하고 있던 미국이나 유엔에서는 많은 포로들이 북한이나 중공을 택하지 않고 자유진영을 택한다면 북한 중공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사상과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포로석방 문제로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휴전협정 막바지에 이승만은 유엔이나 미국의 상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일대 사건을 일으켰다.

평화협정은 언제?
휴전협정이 조인된 지 64년을 맞이한다. 올해도 주의회 의사당에서 휴전협정 조인 기념식이 열릴 것이다. 당시 참전했던 노병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 올해는 몇 명이나 참석할지 모른다. 그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어 거의 다 세상을 떠났는데 평화협정 맺을 길은 요원하다.
평화협정 체결이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북한이 남한을 전쟁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만 상대하려 하기 때문이다. 휴전 협정문 어디에도 남한의 관료나 군인 이름이 없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전쟁 당사자가 아니지만 7.4공동 성명이나 남북이 불가침 약속을 했고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는 정식 조약으로 여기서도 불가침 약속을 했으니 불가침 합의 정신을 살려 남북이 평화 통일의 길을 생각해야 한다.

기사 등록일: 2017-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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