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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부쳐 _오충근의 기자수첩
 
다음 주 8월15일은 광복절 72주년이다. 해방되던 해에 태어났다 해서 해방둥이라고 불리는 45년 닭띠들이 만 72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때 태어난 갓난 핏덩이들이 노년에 이르도록 일제의 압제를 벗어났다는 그날의 감격보다 그날 이후 변한 게 없는 남북 분단,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가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후 식민지 청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김준엽 장준하처럼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는 것, 박정희 백선엽처럼 출세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에 협조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나 백선엽도 인간적으로 고뇌를 했을 것이고 개인의 사정과 형편과 처지가 다 다르니까 그들도 그들의 입장이 있겠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소중한 가치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고 숭고한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전혀 달라 김준엽 장준하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맛있는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취미생활 즐기며 건강하게 사는 삶을 버리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걷고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독립을 염원했으나 독립운동가 후손의 약 80%는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하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고 있거나 심지어 자손이 없어 친인척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조국 건설을 위해 전면에 나서야 했으나 박정희 백선엽 같은 친일파들이 조국 건설에 나섰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대우받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일 청산을 해야 되는 것이다. 늦더라고 안 한 것 보다는 낫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우리 세대가 가기 전에 없어져야 할 말이다.
약산 김원봉의 경우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4,240명의 독립유공자가 등록되어 있다. 이분들은 독립운동에 대해 국가에서 공로를 인정한 경우로 공훈록에서 제외된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있다. 사회주의 계열,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제외 되었는데 이것은 사상과 이념 때문으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국독립을 위해 피 흘리고 헌신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도 정당한 공적을 인정 받는 날이 와야 한다.
예를 들자면14,240명 중에는 약산 김원봉이 빠졌다. 약산은 고향 친구 윤세주와 함께 무장 항일단체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를 대상으로 무력투쟁을 벌였고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조선의용대을 조직하는 등 약산은 독립운동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월북했다는 이유로 형제들이 이승만 정권에 살해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았다.
월북한 그는 김일성에게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한국전쟁 후 숙청되었으니 민족주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배척 받은 것이다. 약산이 월북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장택상의 사주를 받은 친일 악질 경찰 노덕술에게 당한 수치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장택상은 해방 후 경찰부장 수도청장을 지냈고 이승만 정권에서 외무장관 국무총리를 인물로 그의 부친 장승원은 조선 말기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장승원은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부하들에게 처단 되었다. 박상진이 장승원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했으나 장승원은 독립운동 자금 대신 일제에 밀고했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박상진은 부하들에게 장승원 처단을 지시했다.
장택상 자신은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 후 친일경찰을 중용하였고 아버지가 독립운동가 손에 죽자 독립운동가들을 미워해 해방 후 수도청장이 되어서 친일경찰 노덕술을 시켜 약산을 망신 주었다. 크게 자존심이 상한 약산은 “일본 경찰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는데 노덕술에게 망신을 당했다”고 상심하며 “친일파 등쌀에 여기서 못 살겠다.”고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박헌영으로부터 월북을 권유 받고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산의 월북은 마지못해 택한 최후의 선택으로 “북조선 가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으나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위협까지 당해 살 수가 없다”고 피력했는데 남한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배척 받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약산은 사상이나 이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사상이나 주의가 되었던 민족이 독립해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도 손 잡고 중국 공산당과도 손 잡고 아나키스트와도 손을 잡았다.
사족: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은 탐관오리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의하면 “직위를 이용해 부를 쌓았다.”고 했다. 장승원은 영남의 최대 거부로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이 장승원의 소작이었다. 장택상과 박정희는 지주 아들과 소작인 아들이라는 껄끄러운 사이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최대 정적인 김영삼, 김대중이 장택상의 비서, 대변인 출신이었으니 세상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잊혀진 독립의 영웅들
김원봉과 같은 밀양 출신인 윤세주는 김원봉과 이웃에 살며 소년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다. 김원봉이 3살 위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일제에 항거해 천황의 생일날 주는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았다. 윤세주는 이회영 일가가 세운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에도 함께 했고 후에 조선의용대에도 함께 했다. 조선의용대는 나중에 김무정(6.25때 인민군 포병사령관, 군단장으로 종군)에 의해 조선의용군으로 개칭 되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것은 1938년 10월인데 대적 심리전, 일본군 포로심문, 일본 문서번역, 일본군 점령지역에 잠입해 첩보 암살 시설파괴 등 비정규전에 종사했다.
조선의용대는 태항산 전투에서 용명을 떨쳤다. 중국인들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혼란기에 민란이 일어나 도적떼들에게 시달려 일본군이 대륙을 침략해 만행을 저질러도 민족 대 민족의 대결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규모 마적떼에게 당한다는 생각이라 전국적 항일전선 구축이 어려웠다.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달랐다. 조선 말기부터 의병활동으로 일제한 항거한 경험이 있고 민족의식과 애국심, 일제를 타도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투쟁의식 목표의식이 투철했다. 조선의용대의 중요성은 모택동, 주은래, 주덕 팽덕회, 섭검영 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잘 알고 있었다.
1941년12월 북중군방면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는 대본영으로부터 명령을 하달 받았다. 삼광작전(모두 죽이고 빼앗고 불태우는)으로 팔로군 배후촌락을 철저히 파괴하는 작전명령이었다. 이 작전의 일환으로 1942년5월 팔로군 본거지 태항산 일대에 참빗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 41사단은 팔로군 총지휘부를 섬멸하려고 태항산 일대를 포위했다.
팽덕회 좌권은 주력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동 시켰으나 지휘부는 포위되었다. 이때 조선의용대에게 퇴로 확보의 중책이 주어졌다. 조선의용대는 십자령에서 일본군을 유인해 퇴로를 열어 등소평, 팽덕회, 주덕 등 지휘부가 무사히 탈출했다. 그러나 십자령 전투에서 윤세주와 진광하(본명 김창화)가 전사했다. 팔로군 작전참모 좌권도 전사했다.
일본군 전폭기가 투하한 폭탄에 맞아 전사한 좌권을 동지들이 묻고 후퇴했는데 일본군은 좌권의 시체를 파내 목을 베어 갔다. 윤세주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오직 정신력으로 토굴에서 3일을 버티다 동지들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단결하여 적을 사살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팔로군 동지들은 윤세주와 진광하의 시신을 적에게 빼앗길 수 없다면서 시신을 메고 천리를 행군했다.
그 해 10월10일 등소평, 주은래 등 5,000명이 모여 윤세주, 진광하, 좌권의 장례를 지냈다.
태항산 전투에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도 종군했다. 그는 이듬해 호가장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다리를 잘랐다. 연길에 거주하며 작가로 활동한 김학철 선생은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를 비판하다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중국에서는 모택동 독재를 비판하다 ‘반혁명 작가’로 몰려10년간 강제노역을 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김영삼 대통령 이후 수 차례 남한을 방문했다. 2001년 연길에서 세상을 떠난 선생은 “편안하게 살고 싶으면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고 싶으면 불의에 도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국 공산당은 항일투쟁에서 조선의용군과 혈맹을 맺었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태항산 전투에서 큰 빚을 졌다. 그 때의 ‘의리’를 지키고자 6.25때 팽덕회는 사령관이 되어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조선의용군이 일제해 항거해 무장투쟁을 벌일 때 박정희 백선엽 등은 일본군으로서 동포에게 총을 겨누었다. 특히 백선엽은 자신의 입으로 동포들에게 총을 겨누었다고 술회했다. 조금도 뉘우침이나 후회하는 기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사상이나 이념을 떠나 친일청산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후에라도 외적이 침입했을 때 누가 나서서 싸우겠는가?

기사 등록일: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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