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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무엇을 남겼나(1)_ 오충근의 기자수첩
 
이론대로 진행되지 않은 혁명
올해가 러시아 혁명 100주년 되는 해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2차대전후 지구를 동, 서 둘로 나누어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대결, 냉전의 시작을 제공한 혁명이다. 우리가 분단국가의 비극을 겪고 있는 것도 러시아혁명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청년시절을 유신독재 치하에서 보낸 나는 러시아 혁명사를 어렵게 구해 몰래 읽었다. 그런 책 보다 걸리면 간첩이나 빨갱이 누명 쓰던 시절이었는데 캐나다 이민 와서 보니 러시아 혁명에 대해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가르치고 있어 박정희 독재의 후진성을 알 수 있었다.
1차대전 중인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두 번 일어났는데 2월과 10월에 일어났다. 그런데 실제로는 3월과 11월에 기념식을 한다. 러시아는 그 당시 율리우스력을 썼기 때문인데 그레고리력과 날자 차이가 13일 난다. 동방정교회는 지금도 교회력을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어 크리스마스, 부활절이 13일 늦다.
그래서 러시아 10월 혁명이 율리우스력으로 10월25일이나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7일이다. 러시아는 혁명 직후인 1918년 1월31일을 그레고리력 2월14일로 환산해 그레고리력을 쓰고 있어 기념식은 11월7일에 하지만 10월혁명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10월25일이 맞냐, 11월7일이 맞냐를 따지는 것은 본질과 무관한 일이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 근거해 지구 나이가 6,000년이 맞냐 틀리냐를 따지는 것과 같다.
성경 해석하기에 따라 지구 나이가 6천년이 될 수도 있고 6만년 60억년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성경이란 책이 우리에게 과학이나 역사지식을 전해주는 책이 아니란 사실이다. 성경은 사랑을 통한 인간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빠졌는데 혁명이 발발하는 이유에 대해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업이 발달해 방대한 생산력을 갖고 있는 문명국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결이 일어난다. 이것은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혁명으로 급격하게 혹은 서서히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날 당시에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도 아니고 대규모 생산력을 가진 공업이 발달한 나라도 아니었고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과 갈등을 일으킬 정도로 계급의 분화가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
러시아 자본주의는 어린아이 걸음마 수준의 초보 자본주의였다. 그런데도 혁명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론을 벗어난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300년을 면면이 이어오던 로마노프 왕조는 어떻게 무너졌을까?

로마노프 왕조와 러일전쟁
1차대전에 기관총, 독가스, 탱크 등 대량살상 무기가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지휘관들의 전술 개념은 저조한 성능의 대포와 총칼이나 휘두르던 나폴레옹 시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지휘관들의 무개념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이다.
1차대전에 러시아는 연합국(협상국)으로 참전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전쟁에 참전할 계제가 아니었다. 1차대전 일어나기 10여년전에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신흥공업국 일본에서 진 전력이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일본은 러시아에게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는 도박사들이, 도박사들은 월드컵 우승국 맞추기 말고도 별별 걸 다 갖고 도박을 하는데, 누가 이길 것이냐가 아니고 일본이 언제 질 것이냐를 놓고 도박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박사들의 기대를 어기고 전쟁을 진 러시아는 완전히 체면을 구겼는데 러일전쟁의 승패로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어졌다.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 능력이 없어 미국의 중재로 못 이기는 체 전쟁을 끝냈는데 장기전을 벌였으면 러시아가 이겼다는 게 중론이다. 종전협상에서 일본대표는 러시아 대표에게 배상금 이야기를 꺼냈다. 꼬맹이에게 한 방 맞고 체면 구겼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자존심 접고 그냥 끝내려는데 배상금 이야기를 꺼내자 러시아는 열이 뻗쳤다. “배상금? 협상하기 싫은가? 싫으면 그만둬.”
중재에 나선 미국도 일본을 얼렀다. “이봐, 임자. 좋은 게 좋은 거야. 러시아가 팔 걷어 부치고 덤비면 감당할 수 있겠어? 내 말 들으라구.” 미국 중재로 종전협상은 끝났고 협상을 중재한 공로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벨 평화상 대가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로부터 66년 후 미국의 키신저가 파리평화회담 타결로 베트남 전쟁을 끝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평화회담 결과 남 베트남은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의 뒤에 숨어있는 흉악한 민낯을 보아야 한다. 평화협정이 반드시 평화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다.

자라나는 혁명의 씨앗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망조가 들기 시작하는 조짐이 있다. 개혁과 변화가 필요한 때 정치 지도층이 개혁과 변화를 무시하면 망조가 시작된다. 니콜라이1세가 즉위 하던 1825년 서유럽에서 교육받은 젊은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러다 조국이 망하게 생겼다. 서유럽식 개혁으로 후진성을 탈피하자.”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는 개혁을 거부하고 오히려 반동정치를 강화했다.
조선만 해도 순조1년(1801년) 공노비를 해방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노비(奴婢)의 奴는 남자노예 婢는 여자노예를 말하는데 공노비는 국가기관에 소속된 노예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1863년보다 무려 62년 빠르게 조선에서는 노비를 해방 시켰다. 이런 역사는 자랑할만한 역사인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원죄에 더해 아직도 친일파가 득세해 이런 역사가 묻혀 있다. 친일파들은 친일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해야만 한다.
서유럽이 중세의 때를 벗겨내고 발전할 때 러시아는 여전히 중세 농노제도를 유지했다. 인구의 대다수는 농노였다. 러시아는 크림미아 전쟁에서 패한 후 후진성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 1862년 알렉산드르 2세 때 농노를 해방했다. 4천만명의 농노가 해방되었다.
그러나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노들이 해방되었어도 독립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미비했다. 지주들은 농노해방의 대가로 특혜를 받았으나 해방된 농노들에게 돌아가는 토지개혁은 농노들에게 매우 불리했다.
그나마 개혁 마인드를 갖고 있던 알렉산드로 2세는 암살 당했고 뒤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로 3세는 반동정치를 더욱 강화하고 민중을 억압했다. 눌리고 눌렸던 민중의 요구가 터져나오 것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이었다.

피의 일요일
알렉산드로 3세에 이어 즉위한 니콜라이2세는 제정러시아 마지막 황제로 프랑스 혁명 때 프랑스 왕 루이16세와 비슷한 면이 있으니 사람은 좋은데 무능하고 우유부단 하다는 점이다. 지도자의 신념과 결단력이 필요한 개혁의 시대에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지도자가 등장했으니 니콜라이2세 개인과 가정에도 불행이고 러시아에도 불행이요 러시아 민중들에게도 불행이었다.
러시아와 국교를 맺고 있던 조선에서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사를 파견했다. 민영환 김득련이 특사로 윤치호가 통역으로 수행했다. 민영환은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순국했다.
왕실의 무능, 귀족들의 사치 방종 부패에도 러시아 민중들은 짜르(황제)를 신뢰했다. 러시아 민중들은 황제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러시아 황제는 동방정교회 수호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 민중들은 착취와 빈곤에 허덕이며 전쟁(러일전쟁)에 동원되어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형편으로 이런 사정을 짜르에게 호소하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
1905년 1월22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중들이 모여 청원서를 작성하여 짜르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청원서 내용도 불순하거나 급진적 내용은 없고 전쟁(러일전쟁) 중지, 헌법 제정, 기본권 확립, 노동자 보호 등 기본적이고 소박한 내용이었다. 민중들은 청원서를 작성해 짜르 초상화, 기독교 성화를 앞세우고 짜르가 사는 궁전으로 향했다. 요즘 말로 한다면 평화 시위였다.
무방비 상태의 평화시위는 궁정 수비대의 총칼과 기병들의 말발굽으로 진압되었다. 1,000명 이상이 죽고 4천명이 부상 당했다. 자신을 믿고 찾아온 민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어리석은 짜르에 대한 민중의 충성심과 신뢰가 무너졌다.
민중들의 실망한 눈에는 짜르가 우리들 편이 아니라 귀족과 지주, 자본가의 편이란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민중들의 실망은 분노로 변했고 짜르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시아 혁명의 예고편이었다.

신문발행일: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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