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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무엇을 남겼나(2) _ 오충근의 기자수첩
 
피의 일요일과 소비에트의 형성
러일전쟁 초기에는 외부의 적을 상대로 애국심이 충만해 민중들이 피폐한 삶에도 전쟁에 협조했으나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짜르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초기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으면 민중의 불만을 무마했겠지만.
불온한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5월12일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는 직물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섬유 직물산업이 어느 나라나 그렇듯 여자노동자들이 많았는데 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대표자를 뽑고 대표자들이 소비에트를 형성한 것이다.
소비에트는 평의회(council)이란 뜻의 자치 조직으로 이바노보 소비에트가 러시아 역사상 첫 번째 소비에트다. 이 후 총파업이 전역으로 퍼지면서 노동자들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소비에트가 조직되고 뒤이어 군대, 농민들도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초기의 소비에트는 민주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으로 직업 혁명가들이 주축이 된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 노동자, 시민, 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었다.
파업, 봉기, 폭동은 러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그 해 10월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러시아 산업 노동자가 200만명이라는데 파업 동참자가 280만명이었다. 노동자 이외에도 중산층, 의사 약사 교사 등 전문직종 종사자, 자유주의 기업가들까지 파업에 동참해 공장뿐 아니라 학교 병원 관청도 파업으로 문을 닫았다. 이 파업은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파업이었다.
전국적 파업에 짜르는 마침내 타협안을 내놓았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두마) 개설, 헌법제정, 투표권 확대, 인권보장, 기본 자유(언론, 출판, 결사) 보장을 약속해 짜르 자리를 지켰다. 타협안은 시간을 벌어보려고 민중을 기만하는 타협이었으나 “중세 뺨치는 사회에 국회가 생긴다니 그게 어디냐?”는 분위기가 압도해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민중의 요구는 실현된 게 없고 삶이 나아진 것도 없었다. 트로츠키 말대로 “모든 것이 주어졌으나 아무것도 주어진 게 없었다.”

1차대전과 2월혁명
사라예보에서 터진 총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보스니아 출신의 청년에게 암살 당했다. 황제 후보 0 순위인 대공 부부가 살해당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4개항 이행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고 세르비아는 요구를 거부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세르비아의 형님 노릇을 하던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이익에 따라 합종연횡을 하던 유럽 열강들의 패싸움인 1차대전으로 러시아는 국내 사정상 전쟁 수행 능력도 없으면서 말려 들어 스스로 명 재촉을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러일전쟁 초기와 같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폭발한 러시아 민중은 혁명이니 파업이니 하는 국내문제를 뒤로하고 전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초전에 반짝 승리 이후 계속되는 패전으로 엄청난 병력을 잃으며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마니아에 이르는 서부전선을 잃었다. 경제상황 악화로 인한 물자부족, 식량부족, 살인적 인플레로 러시아 분위기는 임계점을 향해 치달았다.
어리석고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니콜라이2세는 요괴 라스푸틴이 시키는 대로 황후를 섭정으로 세우고 전선에 나가 있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강추위 속에서 밤을 새워 식량 배급을 기다리던 여성들은 “배급할 식량이 없다.”는 말에 분노가 폭발했다. 굶주리는 가족을 보는 여성들이 먼저 일어났다. “빵을 달라” “전쟁을 끝내라”
3월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페테르부르크 여성 노동자들이 시위에 나서자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합세했다. 진압에 나선 황실 근위대 사격으로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며 쓸어졌으나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라 마르세에즈’를 부르며 “자유, 시민의 행복, 조국 러시아의 부흥”을 외치며 자리를 지켰다. 진압에 나선 일부 군인들이 시위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파블로프스키 연대 4중대에서 시작된 진압거부는 연대 전체로 번지고 뒤이어 다른 부대들 진압거부에 동참하고 오히려 기마경찰을 향해 사격해 시위에 동조했다. 군인들은 노동자, 민간인들에게 무기를 나눠주고 파출소 관청 등 정부기관을 접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겨울궁전으로 달려가 황제기를 내리고 적기를 계양 했다.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2세는 폐위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러일전쟁부터 스탈린 독재까지의 격동기를 몸을 겪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2월혁명을 묘사하고 있다.
2월혁명은 배고픔을 참지 못한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혁명으로 노동자와 군인이 합세해서 이루어졌다. 식량, 토지, 전쟁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제정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했다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를 누가 끌고 갈 것인가라는 당면 과제가 놓여 있었다.
볼세비키뿐 아니라 어떤 정치세력도 2월혁명에 기여하지 못했고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다. 심지어 레닌조차도 2월혁명에서 보여준 민중의 힘을 인정했다. “거대한 민중의 물결이 모든 것을 덮었다. 이 물결은 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를 압도했다.”

10월 혁명
니콜라이2세는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나아진 것은 없었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 되었고 노동자는 곤궁했고 농민은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부르주아와 자유주의자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짜르 퇴위로 만족할 뿐이었다. 민중이 믿고 기댈 곳은 소비에트인데 소비에트도 임시정부편이였다. 볼세비키만이 민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했던 체르노프, 플레하노프, 레닌 등 직업혁명가들이 속속 귀국했다. 레닌은 독일의 비호 아래 귀국했다. 레닌은 민중과 임시정부가 따로 노는 모순을 발견했고 권력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로 양분 된 것을 간파했다. 레닌은 민중을 선동했다.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무능한 임시정부는 국제적 약속을 지킨다고 전쟁을 계속했고 군부는 혁명적 분위기에 반감을 갖고 짜르 시대로 돌아가려는 쿠데타를 준비했다. 임시정부는 군부를 통제할 능력을 잃고 볼세비키에 손을 내밀었다. 6만의 노동자가 무장을 하고 수도를 지켰다. 쿠데타 군을 수송할 열차는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하며 운행을 정지시켰다.
군부 쿠데타는 실패했고 그 과실은 볼세비키가 차지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볼세비키는 다수라는 뜻이지만 실상은 여태까지 온건 사회주의자, 멘세비키 국제주의자, 자유주의자 틈에서 소수파였으나 쿠데타 실패를 계기로 강경파 급진파를 규합해 소비에트 주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혁명당도 지지부진한 토지개혁으로 농민의 인심을 잃었다. 사회혁명당은 전제제도를 타도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나 혁명적 상황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와중에 모든 상황은 볼세비키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무능한 임시정부와 지지 기반을 잃은 사회혁명당, 토지 빵 자유에 목말라 하는 민중, 이런 조건 속에서 볼세비키는 무장봉기라는 결정적 시기를 기다렸다.
원래 거사일은 전국 러시아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는 10월20일이었으나 대회가 10월25일로 연기됨에 따라 거사도 그날로 연기 되었다. 10월 혁명은 2월 혁명과 달리 민중혁명,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레닌 트로츠키 등 직업혁명가들의 무장봉기였다.
10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제헌국회를 해산하고 볼세비키가 권력을 잡았으나 백군, 홍군으로 갈라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렀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독일에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떼어주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짜르 일가족은 살해되었다.
이렇게 해서 70년 이어지는 최초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소련)이 탄생했다. 레닌은 8시간 노동, 여성들의 권리신장, 제국주의 침탈에 신음하는 약소국가 지원과 독립을 약속했다. 아시아 약소국가들로서는 소련이 유일한 기댈 언덕이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 왜 젊은이들 사이에 사회주의가 열병처럼 유행 했었는가 알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의 총의를 묻지 않고 소수의 혁명가들 손으로 진행된 혁명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뻔했다. “모든 인간 관계가 협력에 바탕을 두고 인간이 인간의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은 스탈린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레닌의 사회주의 이상은 기나긴 독재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1989년 소비에트가 해체와 함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연방 해체 후 러시아는 실패한 국가 사회주의 체제의 부정적 유산과 천민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러시아 시민들은 혁명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으니 그 혁명은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단 말인가.

신문발행일: 2017-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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