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아버지 유픔 세이코 손목시계 시계포 말에 의하면 100년은 쓸 수 있다고 한다.
사진2. 국립묘지 정병주 사령관 묘에서
사진3. 갈비집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왔음.
8년만의 모국 방문이 가장 잘한 일이다. 4주 휴가 중 3주는 모국방문, 1주는 에드몬톤 돌아와 운기조식에 썼다. 청진옥 가는데 종로3가에서 걸어갔다. YMCA를 지나는데 이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YMCA 지하에 민들레 영토는 여전히 있다. 청진옥 해장국 가격이 보통 10,000원 특 12,000원인데 특으로 먹었다. 특에는 고기가 더 많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은 동생들과 함께 이문 설렁탕에서 먹었다.
이번 모국방문에서 다시는 못날 줄 알았던 사람을 다시 만났고, 앓던 이도 빠졌고, 뭐니뭐니 해도 가장 의미 있던 일은 동생들과 함께 부모님 유품 정리하다 아버지가 차고 다니시던 손목시계를 발견한 것이다. 만져보고 흔들어보니 시계가 간다. 즉석에서 차고 있던 전자시계를 풀러 주머니에 넣고 아버지 시계를 찾다.
그 전자시계도 이민 오던 해 산 것이니 의미가 있는 시계지만 50년도 넘은 아버지 유품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아버지 손때가 묻은 계산자는 막내 동생이 맡기로 했다. 부모님의 유품은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부모님 유품 정리하던 날 약간의 일이 있었다. 유품 정리를 대강 해놓고 동생들에게 호기롭게 “내가 살 테니 갈비 먹으러 가자.”
막내동생이 자기 사는 동네에 좋은 갈비집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한다. 넷이 택시를 타고 그 갈비집으로 갔다. 갈비 집 들어가지 마자 사진이 찍고 싶어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카메라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 바지 주머니에 넣은 전화기가 택시에 흘러내린 모양이다.
전화기 커버가 지갑식이라 신용카드도 한 개 들어 있는데 신용카드 분실은 사실 별게 아니다. 귀찮아서 문제지 수습이 가능한데 이역만리 먼 곳에서 전화기 잃어버리는 건 큰 문제다. 모든 게 그 안에 들어 있으니.
남동생이 “우선 나갑시다.” 갈비 먹을 기분들이 아니지. 다들 밖으로 나왔다. 그 때 암담한 기분은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는데 여동생이 남동생에게 “오빠 택시 기사 이름 기억하지?” 개인택시 기사 이름이 호주 사는 큰형님 이름하고 똑 같아 동생이 기억하고 있다.
동생이 개인택시 조합으로 전화해서 “아무개씨가 운전하는 택시를 탔는데 전화기와 해외 신용카드를 놓고 내렸다.”고 말하니 몇 가지 정황을 묻더니 그 택시기사에게 전화해보고 연락을 다시 하겠다고 한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그 택시기사가 전화기 보관하고 있다고. 문득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느껴진다.
택시기사에게 약간의 사례를 했다. 막내동생이 “오빠, 갈비는 내가 살 테니 먹기나 해.” 그 말에는 여기는 내 나와바리라는 뜻도 있겠지.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 군대, 특히 최고 지휘관급 군인들을 오합지졸, 정치군인으로 만든 죄입니다.
대한민국 군대는 명예로운 군대가 아니라고 봅니다. 특히 군대의 꽃이라할 장성급 군인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박정희 전두환의 오욕의 군인정신을 이어받았기에 그들의 계급을 과시하고 누릴 줄만 알았지 그 계급에 걸맞는 품위와 클래스를 보여주는 별들은 없어 보입니다.
이 모두가 권력에 미쳐 군인이 해서는 안되는 최악의 범죄인 하극상을 저지르고 반란을 일으켜 한국군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죄 때문이며,결코용서될 수 없는 그 오욕의 역사가 제대로 단죄되고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병주 소장과 그를 지키다 총탄에 쓰러진 김오랑 소령의 얘기는 참으로 가슴 아픈 우리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입니다. 참군인으로 오로지 자신의 군인된 직분에 충실했던 두 사람은 평소 아들처럼, 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후배 군인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에 의해, 직속 부하였던 박희도, 최세창에 의해 체포되고 사살되었습니다.
정병주 특전 사령관은 끝내 의문의 죽음으로, 살해된 김오랑 소령의 부인은 실명 후 역시 의문의 추락사로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산 모든 이들의 고통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을 알든 모르든, 느끼든 아니 느끼든 엄연히 실재했던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 준 장본인은 여전히 세상을 활개치며 역사와 국민을 우롱하고 진실을 조롱하며 그들만의 세계를 누리고 희희낙락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들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님의 한국 방문기를 읽으니 얼마전 돌아가신 제 아버님 생각도 나고 제가 유골을 뿌렸던 선산도 그립습니다. 그리고.. 정병주 소장의 묘에서 찍은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