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에서 詩 '앨버트로스'는 시인의 자화상이다.
'앨버트로스'는 뱃사람이 항해 도중 재미 삼아 잡는 거대한 바닷새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라는
시에서 그 새는 세속 도시에 떨어진 시인의 슬픈 영혼이다.
한국에선 문학청년의 영원한 상징 같은 작품이지만,
프랑스 학교에선 초등학교 2학년이 외운다.
교사는 "시인이란 순수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조롱받기 쉽다"고만 가르친다.
객관식 시험은 없다.
명시(名詩) 읊기의 즐거움은 프랑스 문학교육의 오랜 전통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우리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다.
어느날 시인을 만난 어느 교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낸 문제 10개를
풀어보라고 내밀었다.
"일곱 문제나 틀렸지 뭐야"라며 시인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이라고 시작하는
최승호의 '아마존 수족관'도 2004년 수능 모의고사에 세 문제가 출제됐다.
최승호가 풀어봤더니 빵점이었다.
그는 "나도 생각하지 못한 정답이 어떻게 나오는지 정말 궁금하다"고 했다.
소설가 김영하가 "국어교과서에 내 글이 실리는 것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산문 일부가 검인정 중등교과서에 멋대로 실렸기 때문이다.
'교과서 수록 작품은 저작권자 허가 없이 사용 가능하다'는 게 현행 저작권법 25조다.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한 김영하는 자기 글이 국가에 '징발'돼
'입시교육 도구'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제목이 틀린 채 다른 교과서에 실린 내 소설로 만든 문제 5개를 풀어봤더니
2개 맞았다"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문단에선 '국어교과서가 문학을 죽인다'고 비판한 지 오래됐다.
"시에서 '밤'이 나오면 으레 시대의 어둠이 연결되고, '별'이 나오면
이상(理想)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풀이된다"(평론가 이숭원)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문학을 국어과목에서 빼내 전문교사가 가르치자는 의견도 있다.
문학교육의 목적은 문학애호가 양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겨운 국어시간이 즐거운 문학을 '붕어빵' 지식으로 도배하고,
미래 독자들을 쫓아낸다는 게 문단 여론이다.
- 박해현 (조선일보 논설위원)
<덧붙여, 희서니의 한 생각>
한 나라의 국어를 維持시키고 發展시키는데 있어,
文學만큼 절실한 기제機制도 없다.
현하現下의 우리나라 국어교육이란 게...
교육이란 말이 실로 무색할 정도로,
입시 위주의 형식적 기능학습이 된지 오래다.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커녕,
문학의 공동묘지 같은 우리나라의 국어교과서.
위에서 소개된, 웃기는 짬뽕 같은 현실은
우리 국어와 문학의 미래를 암담하게 한다.
문득,
일찌기 '윌러스 스티븐즈 Wallace Stevens(美 시인)'가
말했던 것도 떠오른다.
" 문학은 生의 소리이며, 색채色彩이다.
그것을 (추상적으로) 형식形式으로만 생각할 때에는
문학은 더 이상 생명체生命體라 볼 수 없다 "
먼 훗날, 대략 50년쯤 후에
내 시가 국어교과서에 텍스트 Text로 오를 확률은
지구가 갑자기 폭발하는 확률보다 낮겠지만.
그래도 뭔가 잘못되어, 만약에 오른다면...
(그같은 불상사가 없길 바라지만)
나는 내 시에 대한 수능시험 문제에서
과연 몇 개나 맟출지 나 또한 궁금해 진다.
- 희선,
Cafe del Mar Erik Satie - Gymnopedie No.1











학교에서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이유를 말하라'는 문제를 받은 작가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작품을 쓴 동기를 물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먹고 살려고." 라고 답했다고 하고, 이 대답을 그대로 전한 아들은 오답처리를 받았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품에 쏟은 작가의 마음조차도 교육부와 교사의 입맛대로 왜곡하고 재단하며 정의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입하고 외우게 하는 그것조차도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참 좋아하는데 처음 이 작품을 전집에서 읽었을 때, 술마시고 몽롱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즈막히 고향과 과거를 되뇌이는 소년의 솔직한 감성을 읽었는데, 학교에서 이 작품을 배울땐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의 정신'으로 가르치더군요. 그 가르침의 주입에 대해 느꼈던 강한 거부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누구의 해석이 옳은지, 아니면 둘 다 틀린지는 고 윤동주를 강신이라도 해서 물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만, 하나의 문학을 백사람의 독자가 백가지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문학의 즐거움일진대, 이러한 즐거움을 거세당한 채 자라는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