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약6천만 년 전에 화성만한 크기의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 것이 지구상에 우연적으로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그 충돌의 우연성은 이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환경조건들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지구는 정상 궤도에서 이탈되었고, 기후패턴이 변했으며 생명종들은 대환난을 겪었다. 공룡들이 멸종하고, 지구 표면상에서 양서류 동물들의 지배가 무너졌다. 어떤 종류의 생명체들의 멸종은 또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과학이 발견한 이 우연성과 자연성의 자연의 법칙은 종교와 정치와 철학의 기초가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충돌의 우연성이 척추동물이 출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아무도 그런 대격변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으며, 우주에서 흔하게 일어나듯이 그저 자연적으로 일어났다. 척추동물의 한 종류인 인간은 우연한 충돌의 기회로 탄생한 생물종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고 우주의 법칙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인간과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바르게 알면 인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260만 년 전에 등장한 인간 생물종은 끊임없이 진화하여 259만5천 년이 지난 후에 자신의 체험에서 깨달은 하느님의 의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탄생하기 오래 전에 인간의 정신과 언어와 정보가 있었다. 2천-3천 년 전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 저자들은 조상대대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삶의 지혜를 토대로하여 자신들의 참된 인간성과 온전한 삶의 비전과 방식을 하느님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종교와 경전은 하느님 또는 죽음 후의 내세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과 현세적인 삶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종교와 철학과 정치 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과학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 즉 종교와 정치와 철학과 문학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보수적인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과 생존의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과학을 부정하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늘어놓는다. 또한 많은 교회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부인하고,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무작정 믿는 것이 훌륭한 믿음이라는 교리에 철저하게 세뇌되었다. 그리고 과학에 무지한 성서를 절대적인 권위로 믿는 망상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바이러스 팬데믹과 같은 지구적인 위기에서는 물론 개인적인 절망에서도 문자적인 성서를 잔뜩 움켜쥐고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꿈꾸고 있다. 성서는 수많은 지혜서들 중에 하나일뿐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왜 성서가 절대적인 권위가 될 수 없으며, 온 인류에게 유일한 경전이 될 수 없는 이유들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솔직하고 용감하게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과 수용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고 책임이다.
기독교 성서는 물론 불교와 회교도와 힌두교의 경전들도 현대 과학의 우주진화 세계관에 기초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못하면 인류 사회에 설득력있는 경전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육체와 영혼의 분리, 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리, 현세와 내세의 분리, 천국과 지옥의 분리, 제도적인 종교의 내부인은 깨끗하고 선한 사람이고 외부인은 더러운 죄인이라는 성속의 분리, 그리고 특히 허공을 떠도는 보이지 않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맹신,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에 대한 망상 등등을 부추기는 성서와 경전들은 인류의 밝은 미래에 전혀 도움이 안되며 오히려 위험하고 추악한 장애물이다. 2천년 전 기록된 고대 성서가 138억 년 전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우주의 출현과 진화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현대인들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는 인류에게 필요한 지혜서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성서문자주의와 직역주의에서 찾을 수 없다.
현대기독교인들은 성서 전체가 처음부터 은유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삼층 세계관에서 살았던 성서저자들은 당시의 보편적인 문학형식인 신화와 서사시를 이용하여 성서를 은유적으로 기록했다. 고대 사회에서 지극히 제한적인 어휘로 심층적인 깨달음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은유법이었다. 이렇게 은유적인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더욱이 아무 의심과 질문없이 무작정 암송하는 내세지향적 믿음은 이미 지난 백 여 년 동안 심각하게 설득력을 잃고 설 자리를 상실했다. 오늘 21세기 현대과학 시대의 현대인들은 성서를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서 스스로 은유적으로 읽으려고 한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 기초가 되는 기독교의 원초적인 신학과 신앙은 믿지 못할 것을 억지로 믿는 수동적이고 꼭두각시같은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함은 자율적으로 깨닫는 참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문자주의와 직역주의는 21세기에 참 인간이 되는 길에 걸림돌이 되며, 그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물과 기름을 섞으려고 마시구요.
그리고 이런 사이비스런 글이 게시판에 왜 올라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