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출현한 전후에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는 없었다. 물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유신론과 무신론 중에 누가 옳으냐 논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시간과 물자 낭비일뿐이다. 인간과 분리되어 (하늘 위에) 존재하는 신은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이 만든 창작품이다. 다시 말해 30만 년 전에 인간에게 자의식이 등장했고, 4만 년 전에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하늘 위에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신을 만들었다.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세계는 태초로부터 신 없이, 종교 없이, 무신론적으로 우연적이고 자연적으로 출현했다. 인간 생물종을 포함해서 우주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은 어느 하나도 챠별되고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 우주의 법칙에 간섭하고 조정하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는 고대 인간들이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부수적인 수단이었다. 그런데 인류역사에서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신은 이분법적인 차별주의와 우월주의로 사람들을 멋대로 간섭하고 통제하는 착취의 도구가 되었다. 인류역사를 뒤돌아볼 때, 오늘 현대인들에게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신은 거짓과 은폐의 수단이 될 뿐이기 때문에 절대로 필요없다. 이런 신을 믿음체계가 강요하는대로 억지로라도 믿는다해도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죽은 후의 천국은 없다. 이제 인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을 떠나보내야 한다. 이 유신론에 근거한 종교들은 인류역사에 수많은 피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역사적 예수는 이 우주의 법칙에 근거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가르치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살아냈다. 예수에게 하느님(god)이란 말은 신의 이름이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믿어야하는 객체적 존재가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삶의 방식이고,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비전이다. 역사적 예수는 충실한 유대교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한 무신론자 유대교인이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유대교를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는 성전종교(유대교)가 철저하게 신봉하던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반대했다. 유신론적 성전신학에서 맹신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신이다. 유신론적 성전신학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직 선택받은 깨끗한 유대교인들만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용서와 축복과 보호를 받기 위한 반드시 필수조건들을 이행해야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성전에 희생재물과 십일조를 바쳐야 하며, 성전이 만든 법률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98%의 민중들은 하루에 한끼 먹기도 어려운 극심한 빈곤과 질병 속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성전에 바칠 희생재물과 십일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으며, 그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성전이 강요하는 613개 율법조항을 지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더욱 괴상하게도 성전종교는 가난과 질병을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이라고 규정하고, 가진 것이 없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밖으로 추방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종교의 유신론적 신학에 철저하게 반대했다. 예수는 성전이 맹신하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거부했다. 예수에게 하느님의 의미는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진노하고 심판하고 징벌하는 잔인한 하느님이 아니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옹졸하지 않았고, 유대인들만 구원하는 부족적인 하느님이 아니었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지도 않았고, 어린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가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을 따뜻한 품에 안아 주었다. 예수는 계급차별, 성차별, 빈부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성전의 초자연적 유신론의 하느님을 완강히 거부했다. 따라서 예수의 목회현장은 성전이 아니라, 민중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성전종교는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이 아닌 다른 모든 인종들과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규정했다. 유대교의 하느님 즉 성전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마땅히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의 하느님을 거부한 유대인 이방인이었다. 다시 말해 하늘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방인이며 이것을 현대어로 전환하면 무신론자이다. 오늘 현대교회는 성전종교의 불량 신학을 답습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고,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 내지는 무신론자로 정죄하고 있다.
예수가 죽은 후에 유신론적 성전종교











유신론적인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 세계 밖에 존재하며,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여 인간의 기도 여부에 따라 축복하고 징벌하는 이분법적인 신이다. 인간들은 자신들보다 더 강하고 지혜로운 존재가 인간들을 보호하고 축복할 수 있으며, 인간들을 초월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인간의 자의식으로 비롯된 불안과 공포와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유신론적 장치는 종교제도로 발전했으며, 제도와 형식과 교리들을 통해서 유신론적 하느님을 기쁘게 할 묘안들을 찾았다. 다시 말해, 치열한 생존투쟁 속에서 초자연적인 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의 사랑과 축복을 받거나 또는 신의 진노와 징벌을 피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여기에서 종교제도와 신의 보호와 축복과 구원을 받을 필수조건들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만든 신의 은총을 얻기 위한 거창한 예배의식이 생겨났으며, 신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동과 삶의 방식을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유대교의 십계명, 성전의 대제사장, 신의 계시로서의 경전, 희생재물, 십일조, 정결법 등등이 만들어졌고, 이것들에 추호도 의심하거나 불순종하면 신의 은총과 인정은 커녕 가혹한 처벌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비극과 불행에 휩싸일 때 무엇을 잘못했길래 신의 진노를 샀는지 소위 회개를 강요당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 성전종교의 유신론의 의미이며 부산물이다.
역사적 예수는 그런 유신론을 철저히 반대했지만, 오늘 교회들은 예수가 반대했던 성전종교의 퇴행적인 속물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교회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무신론자로 규정하고 교회에서 추방한다. 예수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무신론자 예수는 성전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교리적이고 관념적인 종교인이 아니었으며, 다만 세속적인 세상에서 성전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의 언행은 참된 인간성의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