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마흔둘에 홀로 되어 지금까지 우리 육남매를 키워 오셨다.
딸들을 하나씩 시집보내면서 줄어드는 몸무게를
어머니의 몫이라 당연히 여기던 10년 전 겨울,
나는 정동의 고려병원으로부터 면담요청을 받았다.
소화불량이려니 하고 소화제만 드시던 어머니는 구토증세가 보이자
친구분의 권유로 내시경을 받으셨는데, 보호자를 데려오라는 말에
남편은 없고 큰 여식만 있다며 망설이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감기 때문에 면담을 다음날로 미루고
그나마도 위세를 부리며 병원에 갔었다.
그러나 ‘위암’이라는 아득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어머니의 생사가 달린 문제임을 깨달았다.
수술하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말에도
나는 수술비 걱정을 안고 병원문을 나섰다.
수술 한 번이면 끝나는 것을
주위에서 암은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을 핑계로
어머니를 차가운 입원실에 홀로 밤을 지새우게 하고
연신 원무과에 병원비 체크만 하고 다녔다.
유일하게 남은 양심을 지키는 일은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기도원에 모셔 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창 모서리를 붙잡고 기도하시며
“저기 봉사하는 사람들 말이 여기서 열심히 기도하고 병이 나았대.
나도 기도 열심히 하면 될 거야” 라고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기도원에 얼굴만 내밀면 책임을 다한 거라 생각했고
깊은 밤 홀로 기도하실 땐 몰려오는 잠으로 짜증스러워했다.
병이 악화되자 다시 병원으로 옮겨진 어머니는 의사의 가운을 붙들며
“막내아들 중학교 졸업식은 볼 수 있겠지요?” 라고 재차 물으셨다.
처음 진단시 수술만 했더라면 어머니의 평생 소원이셨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졸업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퇴원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가냘픈 몸을 등에업자 새털처럼 가벼웠다.
순간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려 어머니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어머니는 “왜 울어? 우리 딸한테 미안해서 어쩐다니.
엄마는 너 업어 주지도 못했는데 우리 딸이 업어 주네” 하며
고개를 떨군 채 소리없이 우셨다.
난 그때 처음으로 내가 아들이 아닌 것을 후회했다 .
귀한 아들 하나 낳고서야 처음 미역국을 드셨다는 어머니는
호강 한번 못하고 딸들에게 누를 끼칠까
고통을 참기 위해 가슴만 치시다가
진통제 한번 못 쓰고 비 새는 천장을 바라보며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와 합장도 못 해 드리고 벽제로 가는 날,
나는 엎드려 통곡했다.
이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다시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서
지금처럼 ‘아들이라면’하는 구차한 변명 않고
당당한 어머니의 딸로서 효도할 것이라고.
한 줌의 재로 변한 어머니의 흔적을 난 아직도 가슴에서 지울 수 없다.
저의 이 씻을 수 없는 후회의 통곡을 듣고 계시나요, 어머니!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