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한님 의 詩 감상문은 저의 시심에 던지는 예리한 비수처럼
저의 속마음을 샅샅이 각을 뜨는 전율을 느끼며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졸시에 대한 사랑이 담긴 분석과 감상의 표현.
앞으로도 계속하여 님의 지도편달 바랍니다.승리하는 하루 되세요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 얼마 전 시내 운 님께서 올린 시를 보고 몇 자 적어 두었는데 이 번에 제 컴퓨터를 뒤지다가
우연히 다시 발견하여 볼품없는 저의 감상문을 올립니다. 글자 그대로 처음 이 시를 접할 때 오는 느낌을 담은 감상입니다.
시내 운님의 “ 울고 있는 도시”를 읽고
-김창한
시내 운 님의 “울고 있는 도시”는
집이 없어 도시 한 가운데를 방황하며 노숙하는
주변부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이 시대에 상실된 사랑의 메시지를 예언자적 언어로 담고 있다.
모든 것이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시인은 절망한다.
네온사인, 고급승용차, 돈, 고층건물, (밤의 현란한) 불빛은
문명이고 진보다.
그런데 시인은 절망한다.
울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익명성, 비인격성이 도시를 휘감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현란함의 대격은
밤바람, 달빛의 울음이다.
시인은 도시의 울음이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솟구쳐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울음은 당연시 되는 세상에 대한 반향이며 절규다.
이러한 반향은 어쩌면 소극적인 감정의 발산이다.
희망없는 소리의 아우성이다.
이러한 아우성을 몸으로 절규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이는 고급 승용차나 돈으로 치장되어 있지 않다.
아니다. 그이는 네온사인, 고층건물의 모든 접근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화려한 도시의 그늘에 가려
오직 신문 한장으로 추위에 떠는 몸뚱이를 가릴 뿐이다.
시인은 도시의 한 모통이에 소외되어 떨고 있는 노숙자의 설움을 도시의 울음으로 치환한다.
이것은 어쩌면 역설이다.
참다운 인간성은
네온사인으로 대표되는 세속도시의 화려함에 가려져 있고
그 인간성의 담지자인 노숙자의 울음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네온사인, 돈, 승용차의 경계를 넘어 사람의 물결조차 물상화된다.
인격을 발산해야 할 사람이 비인격화된다.
그러한 물상화와 비인격성에 대한 절망 섞인 항의가 막소주 한 병이다.
그러니까 도시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삶을 질질 끌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멸망한 도시를 대신해서 장송곡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 상실의 예식은 한 병의 소주다.
죽음으로 가는 예식이다.
삶의 마지막 보루인 술이 마지막 존재에의 용기를 준다.
그러므로 절망은 술이고 술은 절망이다.
그 절망의 술이 대신해서 사랑을 잃은 도시를 질책하며
외로이 서있는 가로등을 끌어 안는다.
차리리 물상인 가로등이 인격이 된다.
가로등은 이 외로운 사람의 절망을 들어주는 벗이 되고
사랑을 표현하는 “너”가 된다.
사랑을 나팔처럼 불어도
거기에는 사랑이 없는 헛 개비 군상들만 즐비하다.
그래서
이제는 들으라고.
사랑을 받아야 할 그/그녀가 마치 예언자가 되어
도시 전체가 되어 울고 서 있다.
이미 도시는 완전히 물상화되어
인격을 일컫자면 노숙자의 절망의 울음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울고 있는 도시가 지시하는 것 (referent)은 사실 노숙자 인 셈이다.
노숙자가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 곳에서
대신 울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숙자는 예언자다.
모든 것이 썩어 가는 세상에서
마치 도시의 황량한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예언자를
시인은 깡소주에 몸을 맡긴 노숙자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이는 아직 절망이란 음성이라도 남아 있으니까.
그것도 인간성 (humanity)이라고 말이다.
울고 있는 도시
시내 운
네온사인 번뜩이고
훤하게 뚤린 도로에
고급 승용차 물결
돈을 태우고 질주하며
하늘을 치받고 선
고층 건물 창(窓)마다
불빛이 밝은데
도시는 울고 서있다
밤 바람에 젖어 울고 있다
달빛이 서러워 울고 있다
신문지 한장 으로
얼은몸 싸고 누어
도시의 한 귀퉁이에
노숙(露宿) 하는
가난한이의 설움을 품고
도시가 울고 서있다
사람의 물결은
밀려 가고
밀려 오지만
사랑을 찾지 못한
도시는 울고 서있다
목 구멍으로
부어 넣은
막소주 한 병에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체념으로
질긴 목숨 질질 끌며
가로등 쓰어 안고
버둥대는
가엾은 삶
품에 안고
도시는 울고 서 있다
사랑을 입에 달고
봉사를 훈장 처럼
희생을 나팔부는
헛 개비 군상들
아니 품을수 없는
이율배반
서러워
안타까워
도시는 울고 서있다
시내 운님의 “ 울고 있는 도시”를 읽고
-김창한
시내 운 님의 “울고 있는 도시”는
집이 없어 도시 한 가운데를 방황하며 노숙하는
주변부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이 시대에 상실된 사랑의 메시지를 예언자적 언어로 담고 있다.
모든 것이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시인은 절망한다.
네온사인, 고급승용차, 돈, 고층건물, (밤의 현란한) 불빛은
문명이고 진보다.
그런데 시인은 절망한다.
울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익명성, 비인격성이 도시를 휘감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현란함의 대격은
밤바람, 달빛의 울음이다.
시인은 도시의 울음이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솟구쳐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울음은 당연시 되는 세상에 대한 반향이며 절규다.
이러한 반향은 어쩌면 소극적인 감정의 발산이다.
희망없는 소리의 아우성이다.
이러한 아우성을 몸으로 절규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이는 고급 승용차나 돈으로 치장되어 있지 않다.
아니다. 그이는 네온사인, 고층건물의 모든 접근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화려한 도시의 그늘에 가려
오직 신문 한장으로 추위에 떠는 몸뚱이를 가릴 뿐이다.
시인은 도시의 한 모통이에 소외되어 떨고 있는 노숙자의 설움을 도시의 울음으로 치환한다.
이것은 어쩌면 역설이다.
참다운 인간성은
네온사인으로 대표되는 세속도시의 화려함에 가려져 있고
그 인간성의 담지자인 노숙자의 울음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네온사인, 돈, 승용차의 경계를 넘어 사람의 물결조차 물상화된다.
인격을 발산해야 할 사람이 비인격화된다.
그러한 물상화와 비인격성에 대한 절망 섞인 항의가 막소주 한 병이다.
그러니까 도시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삶을 질질 끌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멸망한 도시를 대신해서 장송곡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 상실의 예식은 한 병의 소주다.
죽음으로 가는 예식이다.
삶의 마지막 보루인 술이 마지막 존재에의 용기를 준다.
그러므로 절망은 술이고 술은 절망이다.
그 절망의 술이 대신해서 사랑을 잃은 도시를 질책하며
외로이 서있는 가로등을 끌어 안는다.
차리리 물상인 가로등이 인격이 된다.
가로등은 이 외로운 사람의 절망을 들어주는 벗이 되고
사랑을 표현하는 “너”가 된다.
사랑을 나팔처럼 불어도
거기에는 사랑이 없는 헛 개비 군상들만 즐비하다.
그래서
이제는 들으라고.
사랑을 받아야 할 그/그녀가 마치 예언자가 되어
도시 전체가 되어 울고 서 있다.
이미 도시는 완전히 물상화되어
인격을 일컫자면 노숙자의 절망의 울음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울고 있는 도시가 지시하는 것 (referent)은 사실 노숙자 인 셈이다.
노숙자가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 곳에서
대신 울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숙자는 예언자다.
모든 것이 썩어 가는 세상에서
마치 도시의 황량한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예언자를
시인은 깡소주에 몸을 맡긴 노숙자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이는 아직 절망이란 음성이라도 남아 있으니까.
그것도 인간성 (humanity)이라고 말이다.
울고 있는 도시
시내 운
네온사인 번뜩이고
훤하게 뚤린 도로에
고급 승용차 물결
돈을 태우고 질주하며
하늘을 치받고 선
고층 건물 창(窓)마다
불빛이 밝은데
도시는 울고 서있다
밤 바람에 젖어 울고 있다
달빛이 서러워 울고 있다
신문지 한장 으로
얼은몸 싸고 누어
도시의 한 귀퉁이에
노숙(露宿) 하는
가난한이의 설움을 품고
도시가 울고 서있다
사람의 물결은
밀려 가고
밀려 오지만
사랑을 찾지 못한
도시는 울고 서있다
목 구멍으로
부어 넣은
막소주 한 병에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체념으로
질긴 목숨 질질 끌며
가로등 쓰어 안고
버둥대는
가엾은 삶
품에 안고
도시는 울고 서 있다
사랑을 입에 달고
봉사를 훈장 처럼
희생을 나팔부는
헛 개비 군상들
아니 품을수 없는
이율배반
서러워
안타까워
도시는 울고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