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한님 !
졸시를 감상해 주시고 소중하고 폭익은 홍시 같은 소감문 까지
달아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말씀 먼저 전하고 싶읍니다.
님의 글이 오르지 않아 궁금도 했구요. 여전 하시니 안심 입니다.
소감문을 읽으면서 초등학교 3학년 자연 시간에 개구리 배를
가르고 해부라는 것을 처음 해본 일이 문득 생각 키우는
군요
사랑은 감정의 투여가 아니다
아내의 존재의 계시
가부장적 인식에 머물고 있던 시인
결혼이라는 관계의 지향성은 ?
사랑의 도굴꾼
소통이 차단된
관계
수동적 관계가 역전 되는 순간 등
예리한 메스가 저의 가슴을 열어 제치고 실핏줄을 터치며
부끄러움 으로 쏟아 내리며
뇌 세포속에 무의식으로 얼어 붙은 가부장적 고정관념을 늦게나마
반성과 회한으로 도려내는 집도의 앞에 벌거숭이가 된듯 합니다.
마치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실핏줄 속에 감추고
흐르던 그 무엇을 김창한 님께 들킨 기분 입니다.
다시한번 졸시 읽으시고 답글 주신것 감사 드립니다.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망설이다가 설익은 소감문을 올립니다.
-김창한 올림
1. 반성 또는
회한?
시인은 아내를 향한 연서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묻는다. 자신이 그 동안 사랑이라고 한 것은 바로 아내라는 대상에
대한 “나”의 감정의 투여 (projection)로 일관한 것이었음을 반성한다. 사랑은 내 감정의 투여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사랑의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관계의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은 바로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즉 나의 감정을 아내라는 대상에 투여한 것에 대한 판단을 중지
(epoche)를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때 아내는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계시한다 (reveal). 그러한 존재는 단순히 내가 아내를
향한 사랑, 즉 나의 아내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기를 계시하는 아내의 모습에 시인은 철렁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린다.
내 사랑의 감정으로 모든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아내라는 존재의 계시 (revelation)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탄식한다. “아내의 시린 가슴 언제 부터 이었나” 그런데 이러한 자기 반문은 자기 변명이 되어 버리고 만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아내의
존재론적 연속성”은 어쩌면 그 동안 쌓아 온 허상이라는 지식일 수 있다. 그 변명거리는 “깊이 얽힌/ 인연의 뿌리/ 당신과 나/ 촘촘히 감고
있어”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나와 아내의 관계는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시된다. “넘처나는 여울 물 처럼/ 청명한 하늘의 공기 같이/늘
살부비고 사노라니”
왜 이러한 당연시가 가능할까? 어쩌면 시인은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에서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나에게 시집을 왔고, 그리고 부부가 된 이상 내가 아내를 향한 감정이 왜곡되어 있지 않은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한 인식의 편향성은
다음의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내의 가슴에/ 찬 서리 내린 줄/ 내 미처 알지 못했구나
2. 사랑의 기만에
살았는데…
그러면 도대체 그 동안 아내의 가슴에 찬 서리 내린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중요하기는 하다는
말인가? 시의 2연에서 시인은 여전히 가부장적 회고에 머물고 만다. “아내의 시린 가슴/ 어느때 부터 이었나” 그러니까 나는
“아내”의 가슴이 언제 차갑게 삭아 내렸는지 모르고 있다. 도대체 이런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단 한번도 “나”는 아내의 존재에 대해서
성찰해 본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아니, 나는 아내의 슬픈 표정이나 미소를 읽어 (reading) 본적이나 있단 말인가? 그저 아내는 내가 잘해
주면 미소 짓고, 내가 화내면 슬퍼하는 그런 존재였단 말인가? 마치 말이다. “한번 맺은 사랑의 언약/ 불문율로/ 당신과 나의
모두를/ 함께 동이고 있어”의 보증 수표처럼, 아내는 목상 (木像)이나 석상 (石像)처럼 찬 이슬 비바람에도 변함없이 내 곁에 있어주는 그런
존재란 말인가? 세월의 성상 안에 아내의 가슴은 점점 차가운 서리가 되어 간다. “가슴 부비며 사노라니/ 아내의 가슴에/ 빙무 서리는 줄/ 내
미처 느끼지 못 했구나”
이러한 회한은 시인으로 하여금 아내에 대한 회고 (archaism)로 나아가게 한다. 두 사람이 함께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결혼이라는 통과의례 (rite of passage)를 통해서 사랑이 성취되었다는 것이 그 동안의 나의 “믿음”이었다.
그러한 믿음에 드디어 의심을 한다. 즉 “아내의 시린 가슴/ 얼마나 오래 아리었나”에 대한 성찰을 시작한 것이다.
3. “사랑의 고고학” (archaeology of love)
이것을 우리는 “사랑의
고고학” (archaeology of love)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것은 단순한 결혼 관계를 넘어 도대체 두 사람이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 이 행위가 주는 지향성 (intentionality)이 무엇인지 철저히 반성하게 된다. 그러면 결혼이라는 관계의 지향성은
무엇인가? 자. 생각해 보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좋은 집 마련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결혼의 본질인가? 이러한 필요 때문에 내가 아내라는
여자를 고용해서 사는 것일까?
시인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수천 수만년 동안 묻힌 유물이 내 삶의 일부로
수용되는 것은 그 유물이 현재 나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도굴꾼이 유물을 파내는 행위는 그 유물이 그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 유물이라는 대상은 도굴꾼에게 돈 이상의 아무런 가치도 없다. 마찬가지로 결혼이라는 것을 내 삶에 안정을 위한 유물에
불과하다면 우리 (남자)들은 사랑의 도굴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새로운 존재론적 관계를 이룬 부부의 문제에
대해서 성찰하게 된다. 그러한 성찰은 “물 마른 개울 바닥처럼/ 증발 해버린 호수처럼/ 허전한 당신의 가슴/ 사랑의 담수로 채워야 했는데”라는
회한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회한은 모호한 “은유”적 표현으론 만족할 수 없어 “직유”를 시인은 대담하게 사용한다. 너무나 분명하게도, 물이 말라
버린 바닥이나 물이 증발해 버린 호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예 선전을 한다. “뭘?” “맑은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이것은
마치 독자가 모호한 은유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조바심 나는 심정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시인은 대담하게 “~처럼”라는 두 개의 직유를
연달아 쓰고 싶었던 것일까? 독자가 “사랑의 담수”라는 은유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앞에 친절하게 두 개의 직유를 잡아 넣은 것일까? 오히려 이렇게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아내의 텅빈 가슴을 채우는 것은 결혼이라는 불문율도 아니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닌 “사랑의 담수”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이기를 포기하고 사랑의 선전가 (propagandist
of love)이기를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랑은 선전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는 여전히 사랑의 기표 (시니피앙)만
난무하게 된다. 나 (남편)는 늘 아내에게 사랑의 기표만 채우면 되는 줄 안다. 이는 마치 아내가 “자기야, 달이 밝지?”라고 물을 때, "응,
보름달이니까?”로 대답하는 소통 불능, 즉 소통(communication)이 차단된 관계와 같다. 남편은 아내가 보내는 의미, 즉 기의
(시니피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불소통의 과거를 이제야 나는 철저히 깨닫게 된다. 아 아! 시인은 이렇게 외친다. “당신의 빈
가슴/ 당신의 보라빛 바람/ 당신의 애틋한 기다림/ 내 미처 모르고/ 당신 곁에 누어 있었구나”
이제껏 나 (남편)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아내에게 투영만 했는데 이제야 나는 아내의 빈 가슴을 절절히 느낀다. 이제껏 느끼지 못한 아내의 보라 빛 바람조차감지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 복받쳐 오르는 희열처럼, 이는 바람과 설레임이 아내의 숨결 속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시린 가슴이 되도록 참아 온
아내의 “애틋한 기다림”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인고의 세월 동안, 두고 기다려 온 아내! 이것은 아내가 땅 속 깊숙히 묻어 둔 사랑이라는
보석을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고고학적 발굴 행위는 마지막 4연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아내의 시린 가슴/ 녹이지
못한/ 찻 잔속 사랑의 향기/ 눈망울에 말라 붙은 사랑의 눈길/ 나누지 못한 촉촉한 가슴의 소리”
그 동안 아내는 사랑의 향기조차 녹이지
못한 채 담석이 되어 굳어 있었다. 사랑의 눈길조차 눈마름으로 그쳤고, 가슴의 소리조차 메말랐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아내라는 존재가 내게
계시되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의 계시는 내 자신이 변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당신의 시린 가슴에 부으리니/ 녹아 내려/
사랑의 강으로 흘러 주오/ 이 우직한 무지렁이 반쪽을 감싸고”
이제 나는 종교적으로 말해서 종말론적 (eschatological)
시간 (kairos)에 살고 있다. 이 종말론적 시간은 우리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에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나와 아내는 관계의
막바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긴박하고 간절해진다. 하지만 “이제라도”라는 표현에는 질적 사랑의 비약이 스며있다. 나는 “우직한
무지렁이”처럼 아내의 시린 가슴을” “미처 모르고 당신 곁에 누어 있었구나”라는 탄식으론 안된다. 그래서 “이제라도” 나는 “당신의 시린 가슴에
부으리니/ 녹아 내려/사랑의 강으로 흘러 주오.”
이 시의 마지막 절은 새로운 관계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사랑의 강으로
흘러 주오/ 이 우직한 무지렁이 반쪽을 감싸고.” “나”는 어쩌면 순박하고 착한 남편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하는 가부장적
의무에 사는 사람이다. 그런 과정에 아내는 늘 수동적인 존재로 남았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가 역전되는 순간이 이 마지막 절이다. 사랑이라는
강의 주체도 아내가 되고, 사랑할 능력이 없는 무지렁이 같은 나를 감싸 주는 사람도 바로 아내다. 남편과 아내가 한쪽이라면, 못난 나라는 반쪽을
감싸고 보살피는 존재는 내 (남편)가 아니라 아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여러분! 우리도 시인처럼 사랑의 고고학자가
됩시다.
☞ 시 내운 님께서 남기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