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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re: re: [생각] 구원과 믿음에 관하여
작성자 안희선     게시물번호 -1482 작성일 2005-06-07 02:01 조회수 1679

귀한 시간을 할애하셔서, 좋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성령에 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동양과 서양, 불교와 기독교,  삶의 현실과 초월적 상상을 넘나드는 선생님의 시에 항상 신선함을 느낍니다.

 

성령의 경험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괄적임에도 불구하고, 발로 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성령체험 현상에 대한 연구는 신학자 Harvey  Cox의 [Fire from Heaven: The Rise of Pentecostal Spiritualtiy and the Reshaping of Religion in the Twenty-First Centuray]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한국어로 번역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옮겨 오신 글을 보니, 독일 신학자 Karl Barth의 [교회교의학] (Church Dogmatics)이 생각나는군요.

 

바르트는 방대한 교의학 제 4권 제 1과 2에서 의인(justification) 과 성화 (sanctification)의 문제를 성령의 빛에 비추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경험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의인의 교리, 즉 우리 인간을 무조건으로 의롭다고 하는 은총, 그리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인간의 변화되는 모습, 즉 성화의 교리가 짝을 이룰 때, 바른 성령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갑자가 사람이 변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떠들고, 언제 거듭났느냐 (born again)고 윽박지르거나 이마에 손만 대도 사람이 뒤로 퍽퍽 넘어지는 케이블 티비 채널 54번에 나오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신학자이고, 종교학적 입장에서는 어느 입장이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평범한 우리가 옳고 그름을, 좋다 나쁘다를 구분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판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제대로 발휘할 때, 성령을 참으로 받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즉, 예수를 믿음으로서 온유와 사랑과 절제와 배품을 아는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예수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전령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의 열매맺음은 증거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소위 성령받았다거나 거듭났다거나 구원받은 날짜까지 아는 사람들이 자기만 우월하다는 독단란에 빠지거나 교회 분열에 앞서거나 자기 교회만 최고라고 믿는 사람은 감정에 사라잡힌 것에 불과한 것일 것입니다.

 

피상적 생각을 몇가지 첨가해 보았습니다.

 

* 농담 한마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 너무나 방대해서 (8000  page 이상)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두개 중 하나를 선택할 귀로에 서 있다. 성경을 택할 것인지,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택할 것인지....

 

 

* 그리고 호오톤이 "소위 자유주의적인 영역"이라고 복음주의를 대조킨 것은 모호하다는 느낌이군요. 이런 서두는 "소위 복음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의 단골메뉴이기 때문입니다.

 

 

 

 



☞ 안희선 님께서 남기신 글


 
 복음에 관한 오해 / 알버트 호오톤

 
오늘날 우리는 복음적인 영역에서도 다수의 오해들을 볼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큰 피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복음적인 영역이라 함은 소위 자유주의적인 영역과 대조적인 말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봉되고 전파되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적인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해들 중의 일부를 고려해 보고자 합니다.
 
 
1 . 구원받는 믿음의 본질
 
 "믿다"라는 단어가 지니는, 다소 광범위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구원받는 믿음을 복음 안에 제시된 진리에 그저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활기 없는 것으로 여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필자가 "활기 없는"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와 같은 동의가,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1절에서 이야기한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항상 수반한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바울은 이 멧세지를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한결같이 전했습니다).
 
 상담자는 구원받고 싶어하는 영혼을 다루다가 피상담자에게,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리고는 피상담자로부터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상담자는 그가 이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심어 주려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 편에서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실제적인 변화와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이 없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결코 체험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고 싶어하던 그 사람은 이 체험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잘못된 개념에 관하여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어떤 개념이 인기가 있다고 해서 그 인기 자체가 그 개념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 먼저 회개에 관하여 살펴본다면, 주님 자신이 그러셨던 것처럼 바울도 역시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필요성을 항상 강조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오직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된 채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골 1:21).

 이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그 경건치 못한 태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먼저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방향전환("뒤로 돌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과, 그 죄로부터는 물론 그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하는 소원을 수반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도 않은 죄인에게, 그저 어떤 사실들을 "믿는다"고 해서 그가 이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파국적인 해를 끼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얻어지는 많은 고백들은 구원받은 것처럼 가장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에서 결국 그 참모습이 드러나고 맙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고후 5:17∼18).

 잘못된 확신을 받는 사람은 죤 F. 왈부어드(John F. Walvoord)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진리에 대하여 강팍해질 수도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없이 헛된 고백만을 하는 사람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더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회개한 죄인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일을 수반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는 것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거기서 끝나고 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믿음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게 할 때에만 비로소 구원받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은 자기(주님)에 관하여 믿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자기(주님)를 믿고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이처럼 필수적인 단계에서 약간 못미치는 곳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멈추어 서는 것은 비극입니다. 참으로 구원받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는 것으로부터 더욱 나아가게 하여 자기 뜻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분에게 복종시키게 합니다(행 2:36).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믿음의 참된 성격에 관한 이 정의(正義), 곧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님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수반한다는 정의가 제시되면 수많은 반대 내지 때로는 격렬한 반대까지 받게 되는데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몇 가지의 반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이 "회개는 우리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신다는(요 16:8) 말입니까?

 우리 시대에는 주 예수님이 죄에서 건져 주시는 구주가 더 이상 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우리 시대에는 "예수"라는 그분의 이름,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분의 이름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입니까(마 1:21)?

 성경을 주의 깊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회개치 않는 죄인에게 구원의 선물을 내어 밀지 않으며, "너회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롸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사실입니다(눅 13:3, 롬 2:4, 벧후 3:9).
 
 (2)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요구, 곧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 "믿음에다 무엇을 더하는" 행위라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더하는 것이 없고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단순히 정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3) (2)항에 나와 있는 것과 비슷한 반론으로 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는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수반한다고 말함으로써 당신은 믿음에다 행위를 더하고있어요!"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한 "신학자들"의 영적 무분별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기록한 "행위"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롬 10:3). 구원을 얻으려고, 혹은 구원을 받을 만하게 되려고 행하는 율법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단언한 그와 같은 행위는 전혀 무익합니다.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을 받을만한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은 그 범주에 전혀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은 구원을 받을 만하게 되기 위해(또는 어떤 사람들이 어리석게 말하는 것처럼 "구원에 대해 값을 치루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은 단지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의 행위로써 주님으로 하여금 자기(그리스도)에게 그와 같은 믿음을 행하는 사람을 구원하도록 해드립니다.
 
 활동하는 믿음을 그렇게 정의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 단정하는 것처럼 결코 "갈라디아주의"가 아닙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그저 비활동적인 "믿음"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오해이며,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 2장 17, 26장에서 그것을 "죽은" 믿음, 곧 생명이 없는 가짜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실들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라합처럼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합니다(그런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지만 주 되신 그분에게 복종하는 것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생각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영혼의 원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따라 행하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이 단순히 "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반대도 하지 않습니다!).
 
 (4) 죄인이 그리스도를 주로서 받아들이도록 지도를 받는 것에 대하여 종종 제기되는 또 하나의 반론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단지 그분의 신성(神性)을 시인하는 것이지 그분의 주님되심(주재권)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로마서 10장 9절의 분명한 의미를 교묘히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이(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인용하는 "여호와"라는 명칭이 신약성경에는 "주"(Lord)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그분의 주님되심(주재권)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위 "성경 곡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여호와"(야훼)라는 이름 대신에 "주"를 사용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생겨났는데, 그들은 그 "입에 올리기도 황송한 이름"을 발음조차 감히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그 단어 대신 "주"(Adhonai)라는 단어를 항상 사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대신 사용하는 이 "주"(Adhonai)라는 단어는 만물(만사)에 대한 여호와의 주님 되심(주재권)을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반론은 명백한 성경 말씀에 반대되는 입장을 고수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서 우러나온 "본말전도(本末顚倒)"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6장 46절 같은 데에서 우리 주님이 "주여"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그분은 "주여"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바 자기(그리스도)에게 대한 복종심도 없이 그저 "주여"라고 부르는 자들을 언급하셨습니다. 널리 알려진 합창곡의 작가가 다음과 같이 기록할 때 그는 그 어떤 "신학자들" 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은 내가 사랑하는 말씀일세.
 그리스도를 주로서 영접하여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감히,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5) 구원받는 믿음이 주 되신 그리스도께 개인적 의탁을 수반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면 또 다른 반론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당신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어떤 신자들의 확신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어떤 신자들의 확신은 잘못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확신은 영원히, 너무 늦어지기 전에 반드시 "어지럽혀져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는"것과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전혀 해롭지 않습니다(벧후 1:10)! 소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 죄로부터 구원을 경험한 적이 없는, 여전히 중생치 못한 영혼들로서 전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적인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할 때만 비로소 구원의 믿음이 된다는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의탁이라고요?" 도대체 어느 정도 의탁해야 되며, 얼마 동안 의탁해야 되지요?"

 진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쓴 그 사람은 과연 주 되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헌신한 적이 있을까요? 그 사람은 주 되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헌신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었을" 때 구원을 경험했단 말입니까? 그가 "그저 믿기만" 했을 때 그가 도대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분에게 대한 개인적 의탁도 없이,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말 자체에 모순이 있습니다.
 
 (7) 고려해야 할 반론이 한 가지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주 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은 구원의 일부가 아니라 성화(聖化)의 일부입니다"라고 말하거나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과 성화가, 어떤 한 가지 활동의 양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그 두 가지 면에 사용된 시제를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 두 가지 면을 아주 비성서적인 방법으로 분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구원의 시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구원의 시제

 (1)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디모데후서 1장 9절과 같은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헬라어 문법의) 부정과거분사는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시제를 디도서 3장 5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하심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심으로써, 성령님이 우리의 영(靈) 속으로 들어오심으로써 되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흔히 알려진,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 면에만 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과거의 구원의 행위의 결과로써 우리는 에베소서 2장 5, 8절에서 우리가 지금 구원받은 (확실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소위 헬라어의 "periphrastic" (복합)완료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영혼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생겨나는 현재의 상태가 지속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3)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우리는 구원의 멧세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who are being saved, 헬라어 원어적으로도 현재분사로 표현되어 있음) 우리에게는(경험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이 구원의 현재 양상(현재적인 면)은 소홀히 취급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과거의 양상(과거적인 면)으로만, 곧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빌 2:13). 헬라어 동사들이 현재분사로 나와 있는 고린도후서 2장 15절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로마서 5장 9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의 양상(면)에 관하여 읽을 수 있는데 이 때 살아 계신 우리 주님께서는 경건치 못한 자들 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을 예기(豫期)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며, 또 구원을 받고 있을지라도 그 절정의 때,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이 완성되는 때, 우리가 영화롭게 되어 죄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때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표현한 로마서 8장 10∼11절을 읽어보시고, 빌립보서 3장 10, 20∼21절과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성화(聖化)의 시제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성화의 시제

 믿는 자의 성화는 하나님이 믿는 자를 세상에서 분리하여 그분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입니다(벧전 2:9). 그것은 구원받을 때 시작되어 믿는 자의 온 생애 동안 지속되는 것으로써, 이 일은 하나님이 믿는 다를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형상으로 닮아가게 하시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롬 8:29). 그것은 구원의 한 양상(면)이며, 그것과 관련되어 비슷한 시제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성화는 구원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1)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개인에게 있어서,이 택하심은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개인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이 어떠한 자들이었는지, 그리고 그늘이 하나님에 의해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순간(여기에서의 시제는 헬라어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죄로부터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과 성화의 최초 행위가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위 말하는 성화의 신분적인 면(양상)으로써 사단의 권세로부터 나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로 들어간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님의, 그 처음 사역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지금 "거룩함을 얻은 (확실한) 상태에 있는" 자들로 일컬어지며(히 10:10), 이것은 구원과 관련되어 에베소서 2장 5, 8절에 나와 있는 벗과 같은 "periphrastic"(복합) 완료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신분적으로 구원을 받고, 거룩함을 얻은 우리는 "성도" 곧 "거룩하여진 자들"로 불립니다(고전 1:2, 이 구절에 나와 있는 헬라어 시제 역시 완료시제로써 하나님의 과거 행위로부터 생겨난 현재의 상태를 시사합니다).
 
 (3) 히브리서 10장 14절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구원을 언급하는 동사처럼, 현재분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되고 있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By one offering He has Perfected forever those who are being sanctified).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게 된 우리, 곧 현재 거룩해진 상태에 있는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로 이끄셔서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셨을 때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그 일을 계속 이루어 가심에 따라, 지금도 역시 거룩하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점진적인 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이것만이 유일한 면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입니다.
 
 (4)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거룩하게 하다"(sanctify)라는 단어가 미래시제로 사용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지만 로마서 8장 29절과 고린도전서 15장 49절, 요한일서 3장 2절 같은 데에서 우리의 소망, 곧 우리가 거룩하게 된 사실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때가 있는 우리의 소망이,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나타나실 그 때에 실현된다는 것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도덕적으로 그분과 같게 만들어 가는 과정은 바로 이 때 완성될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기다리는 바 우리의 구원의 극치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서도 우리는 이것에 관한 사항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낱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성화의 궁극적인 면이며, 바로 이것으로(즉, 이것을 위하여 - 역자 주) 우리는 하나님께 예정을 입었습니다.

 만일 누가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그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이 우리의 성화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구원과 성화가 마치 시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다면 우리는 이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성서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은 구원과 성화 양쪽의 아주 중요한 "부문" 입니다 성화 없는 구원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의 파국적인 결과들에 기인하는 오해를 어느 정도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주님의 영광을 열정 적으로 구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 그분을 주님으로, 곧 그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주님으로 전파하는 것에 대하여 그처럼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로서 높이실 분명한 목적으로 오셨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반대는 심히 이상스럽게 보입니다(요 16:14, 행 10:36). 성령님께서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주재권)을 결코 깎아 내리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진리를 전파함으로써 그분을 신실히 높이는 우리도 결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알버트 호오톤'의 글을 읽고, 우선 생각되어지는 것은
   단순한 인도引導에 의한 구원에 관한'믿음'이 지니는
   취약성이다.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 진정한 '믿음'이란 자신의
   내면에서 생성된 지극한 영적 울림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야 말로 '참신앙'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나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 계기와 조우하지 못했고 내가 생각하는 절대적 존재
   로서의 '주님'도 기독교에서 말씀하는 [주님]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듯 하다.
 
   (그분은 결국, 한 분이시겠지만.)
 

   이럴 땐, 흔히 기독교적(?)'성령체험'을 하신 분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복잡한 생각도 필요 없이, 조건없는 순수한 '믿음'의 힘을
  영적으로 획득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좀 더 나 자신과의 진지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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