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시간을 할애하셔서, 좋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성령에 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동양과 서양, 불교와 기독교, 삶의 현실과 초월적 상상을 넘나드는 선생님의 시에 항상 신선함을 느낍니다.
성령의 경험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괄적임에도 불구하고, 발로 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성령체험 현상에 대한 연구는 신학자 Harvey Cox의 [Fire from Heaven: The Rise of Pentecostal Spiritualtiy and the Reshaping of Religion in the Twenty-First Centuray]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한국어로 번역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옮겨 오신 글을 보니, 독일 신학자 Karl Barth의 [교회교의학] (Church Dogmatics)이 생각나는군요.
바르트는 방대한 교의학 제 4권 제 1과 2에서 의인(justification) 과 성화 (sanctification)의 문제를 성령의 빛에 비추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경험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의인의 교리, 즉 우리 인간을 무조건으로 의롭다고 하는 은총, 그리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인간의 변화되는 모습, 즉 성화의 교리가 짝을 이룰 때, 바른 성령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갑자가 사람이 변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떠들고, 언제 거듭났느냐 (born again)고 윽박지르거나 이마에 손만 대도 사람이 뒤로 퍽퍽 넘어지는 케이블 티비 채널 54번에 나오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신학자이고, 종교학적 입장에서는 어느 입장이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평범한 우리가 옳고 그름을, 좋다 나쁘다를 구분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판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제대로 발휘할 때, 성령을 참으로 받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즉, 예수를 믿음으로서 온유와 사랑과 절제와 배품을 아는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예수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전령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의 열매맺음은 증거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소위 성령받았다거나 거듭났다거나 구원받은 날짜까지 아는 사람들이 자기만 우월하다는 독단란에 빠지거나 교회 분열에 앞서거나 자기 교회만 최고라고 믿는 사람은 감정에 사라잡힌 것에 불과한 것일 것입니다.
피상적 생각을 몇가지 첨가해 보았습니다.
* 농담 한마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 너무나 방대해서 (8000 page 이상)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두개 중 하나를 선택할 귀로에 서 있다. 성경을 택할 것인지,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택할 것인지....
* 그리고 호오톤이 "소위 자유주의적인 영역"이라고 복음주의를 대조킨 것은 모호하다는 느낌이군요. 이런 서두는 "소위 복음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의 단골메뉴이기 때문입니다.
☞ 안희선 님께서 남기신 글
이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그 경건치 못한 태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먼저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방향전환("뒤로 돌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과, 그 죄로부터는 물론 그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하는 소원을 수반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도 않은 죄인에게, 그저 어떤 사실들을 "믿는다"고 해서 그가 이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파국적인 해를 끼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얻어지는 많은 고백들은 구원받은 것처럼 가장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에서 결국 그 참모습이 드러나고 맙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고후 5:17∼18).
잘못된 확신을 받는 사람은 죤 F. 왈부어드(John F. Walvoord)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진리에 대하여 강팍해질 수도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없이 헛된 고백만을 하는 사람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더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믿음의 참된 성격에 관한 이 정의(正義), 곧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님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수반한다는 정의가 제시되면 수많은 반대 내지 때로는 격렬한 반대까지 받게 되는데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몇 가지의 반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주 예수님이 죄에서 건져 주시는 구주가 더 이상 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우리 시대에는 "예수"라는 그분의 이름,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분의 이름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입니까(마 1:21)?
성경을 주의 깊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회개치 않는 죄인에게 구원의 선물을 내어 밀지 않으며, "너회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롸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사실입니다(눅 13:3, 롬 2:4, 벧후 3:9).
하지만 그와 같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더하는 것이 없고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단순히 정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한 "신학자들"의 영적 무분별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기록한 "행위"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롬 10:3). 구원을 얻으려고, 혹은 구원을 받을 만하게 되려고 행하는 율법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단언한 그와 같은 행위는 전혀 무익합니다.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을 받을만한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은 그 범주에 전혀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은 구원을 받을 만하게 되기 위해(또는 어떤 사람들이 어리석게 말하는 것처럼 "구원에 대해 값을 치루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은 단지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의 행위로써 주님으로 하여금 자기(그리스도)에게 그와 같은 믿음을 행하는 사람을 구원하도록 해드립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실들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라합처럼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합니다(그런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지만 주 되신 그분에게 복종하는 것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생각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영혼의 원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따라 행하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이 단순히 "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반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이(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인용하는 "여호와"라는 명칭이 신약성경에는 "주"(Lord)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그분의 주님되심(주재권)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위 "성경 곡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여호와"(야훼)라는 이름 대신에 "주"를 사용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생겨났는데, 그들은 그 "입에 올리기도 황송한 이름"을 발음조차 감히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그 단어 대신 "주"(Adhonai)라는 단어를 항상 사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대신 사용하는 이 "주"(Adhonai)라는 단어는 만물(만사)에 대한 여호와의 주님 되심(주재권)을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반론은 명백한 성경 말씀에 반대되는 입장을 고수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서 우러나온 "본말전도(本末顚倒)"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6장 46절 같은 데에서 우리 주님이 "주여"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그분은 "주여"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바 자기(그리스도)에게 대한 복종심도 없이 그저 "주여"라고 부르는 자들을 언급하셨습니다. 널리 알려진 합창곡의 작가가 다음과 같이 기록할 때 그는 그 어떤 "신학자들" 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서 영접하여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네."
그러나 실상은 그 어떤 신자들의 확신은 잘못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확신은 영원히, 너무 늦어지기 전에 반드시 "어지럽혀져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는"것과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전혀 해롭지 않습니다(벧후 1:10)! 소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 죄로부터 구원을 경험한 적이 없는, 여전히 중생치 못한 영혼들로서 전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진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쓴 그 사람은 과연 주 되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헌신한 적이 있을까요? 그 사람은 주 되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헌신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었을" 때 구원을 경험했단 말입니까? 그가 "그저 믿기만" 했을 때 그가 도대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분에게 대한 개인적 의탁도 없이,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말 자체에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과 성화가, 어떤 한 가지 활동의 양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그 두 가지 면에 사용된 시제를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 두 가지 면을 아주 비성서적인 방법으로 분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구원의 시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디모데후서 1장 9절과 같은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헬라어 문법의) 부정과거분사는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시제를 디도서 3장 5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하심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심으로써, 성령님이 우리의 영(靈) 속으로 들어오심으로써 되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흔히 알려진,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 면에만 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믿는 자의 성화는 하나님이 믿는 자를 세상에서 분리하여 그분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입니다(벧전 2:9). 그것은 구원받을 때 시작되어 믿는 자의 온 생애 동안 지속되는 것으로써, 이 일은 하나님이 믿는 다를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형상으로 닮아가게 하시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롬 8:29). 그것은 구원의 한 양상(면)이며, 그것과 관련되어 비슷한 시제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성화는 구원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되고 있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By one offering He has Perfected forever those who are being sanctified).
우리를 도덕적으로 그분과 같게 만들어 가는 과정은 바로 이 때 완성될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기다리는 바 우리의 구원의 극치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서도 우리는 이것에 관한 사항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낱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성화의 궁극적인 면이며, 바로 이것으로(즉, 이것을 위하여 - 역자 주) 우리는 하나님께 예정을 입었습니다.
만일 누가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그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이 우리의 성화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구원과 성화가 마치 시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다면 우리는 이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성서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은 구원과 성화 양쪽의 아주 중요한 "부문" 입니다 성화 없는 구원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의 파국적인 결과들에 기인하는 오해를 어느 정도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주님의 영광을 열정 적으로 구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 그분을 주님으로, 곧 그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주님으로 전파하는 것에 대하여 그처럼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성령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로서 높이실 분명한 목적으로 오셨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반대는 심히 이상스럽게 보입니다(요 16:14, 행 10:36). 성령님께서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주재권)을 결코 깎아 내리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진리를 전파함으로써 그분을 신실히 높이는 우리도 결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알버트 호오톤'의 글을 읽고, 우선 생각되어지는 것은
단순한 인도引導에 의한 구원에 관한'믿음'이 지니는
이럴 땐, 흔히 기독교적(?)'성령체험'을 하신 분들이
생각이 든다.
-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