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우체국에 가다 / 양현근
점심 무렵, 길 건너 우체국에 가는 동안에도
내내 비가
내리고 바람이 왁자하게 불었다
길가의 은행나무 이파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풀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은행알을
풋사랑처럼 우스스
쏟아내고,
길가는 할머니들, 바닥에 떨어진 풍경 몇 장을 주으며
한 시절의 엷은 웃음을 건네고 있다
살아온 세월의 물관을
따라 가냘픈 어깨가 흔들리고
언젠가는 나의 단단하지 못한 미움도
늘 죄송하기만 한 그날의 사랑도 저렇게 끝이 날 것이라고
보고 싶은 거니? 보고 싶기나 한 거니?
비워둔 마음의 안쪽으로 우산이 밀리고
요동을 치는 가슴선의 계단을 따라
우체국 창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창구 여직원의 환해지는 얼굴만큼이나 궁금해지는 소식이며,
설익은 낙엽처럼 바스락대는 소금기
많은 외로움이며,
살다보면 어느 곳이나 틈은 있게 마련이라고
다짐만으로 사랑이 되는 일도 아니라고
우산 끝에서 또르르
말렸다가 흐지부지 풀리는 빗방울의 꼭지에서
고단한 안부가 외진 몸을 고만고만하게 견디고 있다
소식이 당도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
비어있는 우편번호란에 "가을"을 꾹꾹 눌러 써보지만
가끔 우연과 인연을 혼동하던 귀가 닳은 한 때의 시간들이
우체국 아가씨의 가지런한 웃음을 타고
아직 가지가 덜 마른 생각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98년‘창조문학'과 ‘문학세계' 신인상 수상
「詩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운영자
「詩마을」 동인
월간「문학세계」운영위원, 심사위원
월간「아름다운 사람들」편집위원
시집으로「수채화로 사는 날」,「안부가 그리운 날」
시마을 작품선집 「꽃 피어야 하는 이유」,
동인시집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등
현재 금감원 은행감독국 금융지도팀장으로 근무
이끌어 가고있는 양현근 시인은 현재 금융감독원에서 은행을 비롯한,
제諸 금융회사들을 감독하는 동시에 소비자를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 시문학詩文學의 발전과 생활 속의 '살아있는 시'를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아무 사심私心없이 묵묵히 노력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아직은 '죽은 시인의 사회'는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생각하기엔, 직장에서의 그의 업무는 시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긴, 필자筆者도 한때에 은행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금융기관 업무의 속성屬性이 지니는 그 삭막한 분위기에서
시심詩心을 일구고 그것을 견지堅持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시편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것도 사실이다.
양현근님의 시편들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따뜻한 인간의 마음'이
일관一貫되게 시의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동하는 이미지의 시적詩的 반향反響을 통해
뛰어난 설득력으로 독자의 가슴에 파고 든다.
또한, 시인의 탄력있는 감성과 정결한 시상詩想의
터치touch에 의해 군더더기 없는 산뜻한 구조의 질質로써
독자에게 다가서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시인은 우리의 사회가 고도의 산업사회로 진행됨에 따라,
흔히 우리가 일상에서 간과看過해 버리거나,
잊고사는 것들에 대한 포착捕捉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그것들에 대한 짙은 향수鄕愁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즉 메마른 이 시대의 삶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따뜻한 정情이나 혹은, 사소한 일상日常을 통해
체득되는 삶의 가치를 '글썽한 마음의 언어'에 실어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시인의 시, '비오는 날 우체국에 가다'에서도 시인의 그러한
시적 경향傾向은 변함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시의 도입부를 살펴 보자.
점심 무렵, 길 건너 우체국에 가는 동안에도/
내내 비가 내리고 바람이 왁자하게 불었다/
길가의 은행나무 이파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풀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은행알을/
풋사랑처럼 우스스 쏟아내고,/ 라고 전개 된다.
점심 무렵에 잠시 짬을 내어 우체국에 가는 동안에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리의 심상尋常하지 않은 모습을 통해
현대의 '고단한 삶'이 잉태해 가는 '서러운 순응順應'을
시인 특유의 관조觀照로 추스리고 있다.
또한 이루어지는 시각적 회화성繪畵性도 그같은 상황 설정에
만만치 않은 작용을 하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러한 '순응'은 화자話者의 내면에 다음과 같은
쓸쓸한 심상적心象的 독백을 형성하고 있다.
길가는 할머니들, 바닥에 떨어진 풍경 몇 장을 주으며/
한 시절의 엷은 웃음을 건네고 있다/
살아온 세월의 물관을 따라 가냘픈 어깨가 흔들리고/
언젠가는 나의 단단하지 못한 미움도/
늘 죄송하기만 한 그날의 사랑도 저렇게 끝이 날 것이라고/
즉 화자는 그 거리를 걸으며, 삶 속에 점점 희석稀釋되어가는
'그리움'에 대한 환기喚起를 하게되고 현실 속에 단단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연민과 자책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같은 회한悔恨어린 상념을 지니고 화자는 우체국을 향하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우체국이 지니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체국이란 기본적으로 연락과 소통을 매개媒介하는 곳이며 단절의 끈을
풀어버리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있다. 화자는 그곳에서 현실의 삶에 의해
부단不斷히 억압되었던 '인간적인 삶'의 회복을 위한 내면의 몸부림을
마음의 스냅snap에 담아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하고 있다.
보고 싶은 거니? 보고 싶기나 한 거니?/
비워둔 마음의 안쪽으로 우산이 밀리고/
요동을 치는 가슴선의 계단을 따라/
우체국 창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창구 여직원의 환해지는 얼굴만큼이나 궁금해지는 소식이며,/
설익은 낙엽처럼 바스락대는 소금기 많은 외로움이며,/
살다보면 어느 곳이나 틈은 있게 마련이라고/
다짐만으로 사랑이 되는 일도 아니라고/
우산 끝에서 또르르 말렸다가 흐지부지 풀리는 빗방울의 꼭지에서/
고단한 안부가 외진 몸을 고만고만하게 견디고 있다/
개인적 소견으로 이 부분에서는 다소 시적 기교의 느낌도 없지 않으나,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투시력과 그것에 의해 엮어지는 원심력이
이 시의 공간과 깊이를 확대시킨다는 점에서, 그같은 기교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보아도 무방無妨할 듯 싶다.
이 시는 결론부에서,
그 어떤 의미있는 여운餘韻을 읽는 이의 가슴에 안겨주고 있다.
소식이 당도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
비어있는 우편번호란에 "가을"을 꾹꾹 눌러 써보지만/
가끔 우연과 인연을 혼동하던 귀가 닳은 한 때의 시간들이/
우체국 아가씨의 가지런한 웃음을 타고/
아직 가지가 덜 마른 생각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
결국 타자他者와의 관계가 고립된 자아로서가 아닌,
즉 비어있는 우편번호란에 '가을'을 꾹꾹 눌러 써보는 것으로써
인간 본연의 자아를 도모하는, 그러나 아직은 불투명한 존재로서의
'나'를 만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현실의 안타까움이 절실한 느낌으로 전해진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 살펴보면,
정신없이 질주하는 삶 - 현실의 삶 속에 자리한 자아의 내적內的 고독
- 그 운명적 한계에 대한 인식 (가끔 우연과 인연을 혼동하던 귀가 닳은
한 때의 시간들) - 하지만, 확장된 삶의 공간을 지향하는 의식意識
(우체국 아가씨의 가지런한 웃음을 타고 아직 가지가 덜 마른 생각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에 이르는 시적 치환置換이 빼어나,
따뜻한 인간 존재의 궁극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여겨진다.
또한, 그의 두 번째 시집 <안부가 그리운 날> 첫머리에 실린
'기다림이 있는 한 희망이라는 낱말들이 녹스는 법은 없으리라'는
시인의 말도 상기해 본다.
그의 말대로, '기다림'은 곧 희망의 다른 얼굴이기에...
시에 있어 밀도密度를 위한 정치精緻한 구성과 그 지성적 조화를 위해선,
끊임없는 언어의 긴장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실其實, 이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생각컨데, 낮은 시안詩眼으로써 시인의 시를 바라 본 것 같아
아무쪼록, 모질고 힘든 현실의 부대낌 속에서도 인간존재의
양현근님의 지속적인 건필을 기원해 본다.
-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