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이 사관학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어 간 첫 번째 부임지가 패탱이 연대장으로 있던 부대였다. 그들은 소대장 대 연대장으로 처음 만났는데 두 사람의 운명은 2차 대전을 계기로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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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이 나자 드골은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워 나치에 항전을 했고 패탱은 독일에 항복해 협력했는데 그것을 비시정권이라 한다. 패탱은 비시정권의 수반이었다.
2차 대전 말기 패탱은 독일로 피신했다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귀국 하다 국경에서 조국반역죄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드골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시켜 과거 연대장을 대접했다.
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협력자를 처단 하는데 200만 명을 조사해 99만 명을 구속 할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중형을 선고 받았다.
노벨 문학상을 탄 알베르 까뮤, ‘이방인’ ‘페스트’의 저자인 까뮤는 2차 대전 때 항전파 신문 ‘콩바’ 에서 일하면서 나치에 저항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반역자 처단에 앞장 섰다.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는가? 무기를 잡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일을 이야기 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 라고 역설해 반역자 숙청을 대세로 몰고 갔다.
드골의 나치협력자 처단 순서는 언론인 지식인부터 시작되어 비시정권 지도부, 그리고 사회각계 각층으로 숙청을 해 나갔다.
나치 협력자 숙청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일반적 대세였는데 프랑스는 인구 10만 명 당 94명이 감옥에 갔고 덴마크는 10만 명 당 374명, 벨기에는 인구 10만 명 당 596명, 노르웨이는 인구 10만 명 당 633명이 감옥에 갔다.
우리나라는 처벌은커녕 조국반역자들이 해방 후 반공을 빌미로 득세해 사회 기득권이 되어 사회 상류층을 점령한 채 각계각층에 독버섯처럼 자라왔다.
친일문제는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