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본질적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 감수성에 의한 주관적 상상력이 아니라,
보편적 이성理性을 바탕한 상상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심층적인 유사성에 근거한 이미지의 적절함을
독자에게 온전하게 제공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을 언제나 느끼곤 합니다.
시인이라는 존재를 굳이 좋게(?) 표현하자면,
시인은 꿈과 현실이 만나는 곳에 서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즉, 시인은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깃든 내면의 시선을 통하여 현실계가 지닌
이면裏面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참다운 현실성과 함께
불변하는 본질성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시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의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그 어떤 결핍의 자리를
부단히 메꾸어 가는데 '시적 세계'의 당위성當爲性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각각의 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똑 같은 시입니다.
다만, 나의 시가 그런 역할役割을 충분히 하고 있지 못함에
부끄러움을 느낄 따름입니다.
부족한 시를 애정어린 눈길로 보아 주셔서,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건안하소서.
안희선 손모음.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안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너”는 누군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너”가 누군지를 여쭙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너”는 범상치 않은
“당신”이나 “님”일 수 있고, 내 삶의 회상 속에 형성된 “다른 나”일 수도 있고, 단순히 내가 그리워 하는 “연인”일 수도 있고, 내 삶을
형성한 고향 산천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고단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너”에 대한 자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순한 그리움을 넘어 “너 자체”로 나를 투영하고 싶은 열망. 그리고 그것을 내 삶의 실재로 만들고 싶은 갈망이 “가고 싶다”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시를 낳지 못한 저 같은 필부로선 단지 제 마음 속에 그것이 그리움의 “혼돈”
(chaos)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또는 그리움의 엉어리만 가슴 한 켠에 뭉쳐 있을 뿐입니다. 그런 혼돈에 질서 (order)를 가져다
주는 역할이 바로 시인의 역할일 것입니다. 시적 언어가 한 올 한 올 짜여질 때, 답답한 엉어리의 실타래가 풀려 나갑니다. 그래서 저 같은 시
감상자는 기껏해야 “남의 것을 나의 것” (make one’s own; appropriation)으로 만들어 가는 능력밖에 없습니다.
허나, 우리에게는 “공감” (sympathy)이라는 동류의식이 있고, “마음의 참여” (empathy)라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시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입니다. 수억 수천만 단어가 존재하는 언어의 세계 (cosmos)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시적 세계” (poetic cosmos)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시
감상의 즐거움일 것입니다.
저의 곡해와 오해를 너그러이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부탁드립니다.
김창한 올림
☞ 안희선 님께서 남기신 글
감사합니다.
지적해 주신, '절망의 깊이'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삭막한 시대에, 그래도 시의 존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삶의 청신감淸新感을 고양하는데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소위, 시를 쓴답시며... 삶이 고단하다는 어설픈 핑계로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해봅니다.
마리아의 한없는 사랑도 읽혀집니다.
늘, 건안하실 것을 바랍니다.
가고 싶다 / 안희선
차라리 슬픈 침묵
문득, 삶이 외롭다
내 모든 그리움이 숨쉬는 곳으로
비로소 알 것 같다
다시 너에게 가고 싶다
네가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이 시에는 해답이 없다. 낯선 공간에 남아 있는 자의 절규다.
그러므로 이 시가 지향하는 것이 표층적으로 보더라도
고향의 향수라고 단정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이 시가 고향의 향수로 표상될 수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시를 고향 향수로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
아마도 그래서 시인이 시제를 “돌아가고 싶다”는 말 대신 “가고 싶다”라는
모호한 표현을 의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1-2연은 철저한 공간의 영역이다. 이 공간은 진공관과도 같다.
왜냐하면 이 공간에는 시간이 없어 텅비어 있기 때문이다.
1연: 깊은 하늘보다 고요해서
차라리 슬픈 침묵
문득, 삶이 외롭다
결국, 이 두 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삶이 비역사적 공간 속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공간은 우리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무한의 하늘보다 깊다고 표현되는데 절망이다.
그리고 그 절망이 너무 무겁고 깊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슬픔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이러니며 파라독스다.
독자는 1연의 무거운 시어에 눌려 있다가 2연에서 어느 정도 안도감을 갖는다.
"슬픈 침묵”의 이유가 바로 삶의 소통성이 단절된 공간인 “이국(異國)”의 풍경 속에
시인이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름” (異國 )이 시인에게는
“낯선” 것으로 강조되는 것은 당연하다.
후반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가는 과정, 즉 삶의 회복과정이라고 할 수있다.
마치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소설에 빠지는 것은 소설 속의 시간을 따라가는 것이듯,
이러한 시간을 따라가는 것은 바로 내 삶의 경험적 실재로 만들어 가는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내 모든 그리움이 숨쉬는 곳으로”
도무지 시간의 공기가 흐르지 않은 낯 선 공간을 벗어나서
“내 모든 그리움이 숨쉬는 곳으로” 가기를 갈망한다.
즉 시간의 단절의 회복이다.
그 단절의 회상이 제 4-5연에서 구구절절하다.
비로소 알 것 같다
제 4연에서의 “이별의 아픔”은 다름아닌 시간의 단절이다.
이것은 우리를 소외 또는 비존재의 삶의 형식으로 빠뜨리고 만다.
“환한 빛”으로 표상되는 것은 당연하다.
제 4-5연의 상실을 재확인 하는 작업이다.
낯선 이국 땅에서의 내 삶은 내 삶의 의미를 채우지 못하는 텅빈 공간이었으므로
“환한 빛” 대신 “오랜 어둠”이었다.
시인이 간직한 삶의 현실성은 기껏해야
”내 꿈이 머무는 그리운 빛의 세계,
네가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즉 과거의 회상에서만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한다.
마치 미래에 삶의 “실재”가 있다고 착각하고 산다.
정말 그런가?
“문득, 삶이 외롭다!” 이런 실존적 고백이 그대에겐 언제 찾아 올까?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미래를 향해 직선처럼 달려가는 그대.
그대는 혹시 텅빙 공간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돌아갈 곳, 내 삶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그것은 낯선 異國 에서 빚어 낸 새로운 회상의 실재.
”내 꿈이 머무는 그리운 빛의 세계, 네가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이것이야 말로 삶의 현상학이 안겨주는 진리일까?
김창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