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시가 그 시대의 정신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접은지도 오래입니다만,
시가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해 가는 이 삭막한 시대에...
그래도 애정으로 지켜 보아 주시는 분이 아직 계시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부족한 졸시에 대해서, 너그러운 시선으로
격려를 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문득, 이성복 시인의 말이 생각 납니다.
그의 시편들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그다지 호의적인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가 언젠가 고백하듯 토로한 진술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제는 그만, 피 터지는 이 사각의 링에서 내려 오고 싶다"
어쩌면, 저 역시 오래 전에 넋두리를 접었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즈음은, 따가운 햇빛에 그을린 채 씨익 웃는 노동자의 이마에
보석처럼 구르는 땀 한 방울이 그 어떤 시보다도 가치있다고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안희선의 죽음 연습
-김창한
부고(訃告)
-안희선
사람들이 더 이상 땅 위에 살지 않는 곳에서는,
애틋한 사랑이나 포근한 그리움 따위에 젖어
산다는 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온통, 가시 돋은 욕망의 날카로운
아우성에
오래 묵은 하늘은 사람들의 끝없는 소란과 싸움으로
더욱 무거워만 간다
오늘도 내 생각의 배는,
바다의 성난 파도에 난파선처럼 흔들거리다가
주검의 모습으로 어둡게 물든 하늘 아래 닻을 내리고,
희미하게 지워지는 삶의 한
모퉁이에서
이룰 수 없던 사랑의 유서(遺書) 같은 외마디 소리를
항해일지로 기록한다
그렇게, 또 내 안에서 사망한
시의 부고(訃告)를 작성한다
낡은 하늘 위로 솟아 오르는 밝은 기둥을 꿈꾸던 것은 분명,
아름다운 열정이었지만 그것은
이윽고 불운(不運)함이기도 하다
안희선의 시를 보면, 나그네와 같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의
시들은 나그네처럼, 이 세상에 떠돌면서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영원한 종교적 안식처도 없고, 정치적 유토피아도 없고,
현실도피적인 몽상도 없다. 반대로, 그에게는 일상의 정서와 그 일상의 긴장 속에서 삶의 깊이를 읽으려고 하는 경계인의 시적 본능이 읽혀진다.
하지만, 그것은 시적 본능 이상을 지향한다. 그가 지적하듯이, 시인은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깃든 내면의
시선을 통하여 현실계가 지닌 이면裏面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참다운 현실성과 함께 불변하는 본질성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
(안희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꿈과 현실만큼이나 깊은 간극을 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삶의 본질이 실체로 있다고 상정하는 기초주의적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언어적 표상을 통해서 표출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의 비고정성을 우리는 나그네라는 개념적 상징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도 현실에
정착할 수 없는 것은 삶의 화석화에 대항하는 소극적 반응으로 사는 존재가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아니, 소극적 존재라기 보다는 광야에서 외치는
야인의 소리가 바로 나그네의 발걸음인지도 모르겠다.
안희선의 “부고(訃告)”는 화석화된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는 나그네의 저항이 서려 있다. 이 나그네는 안희선의 시에서는 넘실대는 바다를 외롭게 항해하는 “항해사”로 등장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땅 위에 살지 않는 곳에서는,
애틋한 사랑이나 포근한 그리움 따위에 젖어
산다는 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부유적 존재로서 나그네의 쓸쓸함이 드러나는 곳이 제 2연이다.
”온통,
가시 돋은 욕망의 날카로운 아우성에
오래 묵은 하늘은 사람들의 끝없는 소란과 싸움으로
더욱 무거워만 간다”
그러므로 제 1연은 전제이고 제 2연은 부연이다.
1. 삶=사람=애틋한 사랑/ 포근한 그리움
2.
죽음=가지 돋은 욕망/ 날카로운 아우성/ 오래 묵은 하늘/ 소란과 싸움 그리고 중압의 이항 대립쌍적 (binary) 대비는 이미 죽음을 고지하는
訃告와 다를 바없다.
그런데 제 3연에서 시인은 열설적인 진술을 한다. 이 3연은 부고 작성기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시인이
작성하는 부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바다의 성난 파도에 난파선처럼 흔들거리다가 /주검의 모습으로 어둡게 물든 하늘 아래 닻을 내리고,/
희미하게 지워지는 삶의 한 모퉁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죽음의 문화가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다고 시인은 보고
있다. 그러나 “희미하게 지워지는 삶의 한 모퉁이”에서 시인은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삶을 지시하는 “애틋한 사랑”이나 “포근한
그리움”이 존재하지 않은 곳에, “산다는 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1연에서 말한 것은 현실의 황량함을 고발하는 것으로 읽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죽음의 고지 (부고)는 사랑의 “유서”(遺書)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고는 내가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쓸 수있는
戀書다.
“오늘도 내 생각의 배는,
바다의 성난 파도에 난파선처럼 흔들거리다가
주검의 모습으로 어둡게 물든 하늘
아래 닻을 내리고,
희미하게 지워지는 삶의 한 모퉁이에서
이룰 수 없던 사랑의 유서(遺書) 같은 외마디 소리를
항해일지로
기록한다”
“성난 파도,” “난파선,” “주검,” “어두운 하늘”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닻을 내리고,” 즉
시인은 막간의 평화를 갖는다.
그런 평화가 오래가지 못 가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애정을 담은 편지가 외마디가
될지언정, 죽음을 향해 가는 항해의 일지를 기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또 내 안에서 사망한 시의 부고(訃告)를
작성한다”
이것은 시인의 죽음이며, 세상의 죽음이다. 그러나 부고를 작성하는 것은 세상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부고 고지자의 열정과 불운이 교차되는 것이다.
”낡은 하늘 위로 솟아 오르는 밝은 기둥을 꿈꾸던 것은
분명,
아름다운 열정이었지만 그것은 이윽고 불운(不運)함이기도 하다”
외로움은 창조적 작업이지만 죽음을 향한 연습이다.
여러분이 외로울 때, 죽음의 고지서를 써보라. 거기에는 삶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깃들어있고, 포근한 그리움이 감싸여 있다. 그러므로 삶을
사랑하는 모든 이는 시인이다. 그리고 시인은 외롭다. 죽음의 고지자는 나그네이며 항해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나그네며 항해사다.
그러므로 외롭다. 마치 죽음의 유서를 쓰듯이 처절히 고독하다.
☞ 안희선 님께서 남기신 글
사람들이 더 이상 땅 위에 살지 않는 곳에서는,
애틋한 사랑이나 포근한 그리움 따위에 젖어
산다는 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온통, 가시 돋은 욕망의 날카로운 아우성에
오래 묵은 하늘은 사람들의 끝없는 소란과 싸움으로
더욱 무거워만 간다
오늘도 내 생각의 배는,
바다의 성난 파도에 난파선처럼 흔들거리다가
주검의 모습으로 어둡게 물든 하늘 아래 닻을 내리고,
희미하게 지워지는 삶의 한 모퉁이에서
이룰 수 없던 사랑의 유서(遺書) 같은 외마디 소리를
항해일지로 기록한다
그렇게, 또 내 안에서 사망한 시의 부고(訃告)를 작성한다
낡은 하늘 위로 솟아 오르는 밝은 기둥을 꿈꾸던 것은 분명,
아름다운 열정이었지만 그것은 이윽고 불운(不運)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