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해몽이 더 낫다는 것은 이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하긴, 똥은 더러운 것이 아니지요.
(맛있게 먹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더럽다고 느끼는 그 관념, 혹은 사념체가 더러운 것이지요.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느끼지만,
산뜻하지 못한 배변은 꼭 내 시 같다는 생각입니다.
부족한 시에,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건안하세요,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똥시를 위하여
안선생님의 이번 시를 보니, 눈에 핏발이 툭툭 서는 듯합니다.
많은 시들이 똥같이 냄새나는 시를 “아름다운 상품”으로 포장하는 배설의 위장을 폭로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시에
대한 자성이기도 합니다.
시는 삶이다는 준엄한 현실성을 어기는 위선.
위선을 벗으면,
그런 냄새나는 것을
냄새나는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 힘.
이것이 시의 진실이 아닐까요?
똥을 똥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시는 관념의 허상을 붙잡고,
자기 만족하는 배설은 다 저리 가라.
시가 세계 또는 인생의 총체성을 드러낼 때, 거기에 진정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보지요./
변비에 걸린 사람은/ 좋은 시는 못 쓸 것이라고.
//가슴 깊이 응어리 진 것,/ 속 시원히 쏟아낼 때/
쾌감을 느끼지요.?
음식이 세계가 나게 수용되는 방식이라면, 그 세계를 소화해서 배설하는 책임은 시인에게 있겠지요.
“똥도 잘
싸야겠지요./황금빛으로,
//그런데, 나는 오늘도/냄새 고약한 질 나쁜 똥만
싸네요.”
세계를 나의 것으로 수용해서 발설하는 방식. 결국 배변의 어려움과 악취는 세계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시인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몸담은 세계의 일부이며, 그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시적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고, 그런 시적 자아 없이는 똥도 제대로 못쌉니다.
“매일 세상이 만들어 준 변비약이
없으면,
그나마 그 고약한 똥마저
제대로 싸지 못하니까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던져진 그대로를 받아들여
그리하여,
종교적 위선이나,
정치적 배반이나,
물질적 위세나,
지적 허상이나,
육체적 가식을
그대로 쏟아 내어,
위대한 똥장군으로 거듭나면,
그러면,
시인은 똥 같은 세계에서
똥 같은 사람들의 恨의
司祭로 살아서 (또는 리얼리즘의 사제?)
결국엔
자신이 똥이 되는
인생의 제물 (희생양)이 된다면,
시는 구수한 냄새나는 똥이 되겠지요.
아이구, 그런데 똥도 싸기 전에 배가 부르럭거리고
더부룩하고
설설 설사가 나려 하네요.
내 앞가림이나 해야지….
물똥 물똥!
☞ 안희선 님께서 남기신 글
시, 아름답지요.
아니, 시는 정작 그 자신 별로 관심도 없는데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시가 그렇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요.
적어도 이 세상의 가식적인
기준을 떠나 바라 보자면,
똥은 누구나 더럽다고 여기잖아요.
심지어, 자신의 똥까지도.
배변의 쾌감이란 것이 있지요.
때론, 오르가즘보다 더 황홀한 것.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보지요.
변비에 걸린 사람은
좋은 시는 못 쓸 것이라고.
가슴 깊이 응어리 진 것,
속 시원히 쏟아낼 때
쾌감을 느끼지요.
아니라고 하는 시인있으면,
손 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군요.
똥도 잘 싸야겠지요.
황금빛으로,
그런데, 나는 오늘도
냄새 고약한 질 나쁜 똥만 싸네요.
한때는, 내 똥 냄새도
제법 구수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좋은 시인은 아닌 것 같아요.
매일 세상이 만들어 준 변비약이 없으면,
그나마 그 고약한 똥마저
제대로 싸지 못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