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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같은 교회
작성자 CHRIS     게시물번호 -2279 작성일 2005-12-26 10:52 조회수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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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한주씩을 그리고 그 대표자로 장로가 선출되어

실질적 오너로서 50%의 지분을 가진 목회자와 형식적 대립구조를 이루고 있는 회사의 형태가 오늘날 교회의 모습 같습니다.


한국에서의 일입니다. 제가 교회를 다닌지 8년 쯤 되었을 때인데

당시 저는 교회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소위 충성교인이었지요. 순수한 마음 그대로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 가장 구별된 조직으로 성도들은 그야말로 '성도'로 받아들이던 때였습니다.  그 때 교회에서 대단히 열정적으로 교회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시던 한 분이 계셨는데 목사님의 오른 팔 내지는 핵심 브레인으로 목사님으로부터 거의 황태자 수준의 신뢰를 받던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어느날 교회를 옮기는 문제를 말하던 중 비품 구입비를 절약해야한다면서

" 근처 어딘가에 가면 망한 교회들 비품을 헐 값에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데... 요즈음 아무나 교회 세워서 장사 안되가지고 망한 교회들 많아.."

이 말은 당시까지 성도를 성도로 받아들였던 순진한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계속하여서 그 분은

"우리 교회도 살아 남으려면 대형버스 한대를 구입해서 저 아래 아파트 촌을 셔틀로 운행하며 교인들을 싹쓸어 와야해. 그러면 50명만 끌어와도 버스 구입비 다빠지고 남는 장사야."

저는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이 그 분의 너무나도 정확한 표현으로 다 깨어졌지만 오히려 하나님, 예수님을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비둘기 상을 둘러 엎으신 행위는 당시의 교회로 볼 때, 그 교회를 출석하는 교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과격하기 짝이 없으며 신중치 못하고 편협되며 천하고 교양없는 한마디로 상종못할 자의 괴팍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것의 판단과 결단의 고통에서부터 자유로운 채 편하게 예수님의 행동을 의롭다 찬양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철저한 고민도 본래적인 의미의 반추도 없었기에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들 교회에는 둘러 엎을 상이 한두개가 아닌 듯 보입니다.


우선 이중성의 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교인들 모임에서 세상노래를 막 불러제끼다니 경망스럽고 천하게.. ' ' 우리 행사가 세상 모임처럼 보여서야..'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분 역시 평소에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열심히 세상에서 세상일 하며 세상사람들 만나고 세상 음식 먹고  세상 문화를 접하고 즐기며 세상 속에 살면서도 유독 교회만 오면, 교인들만 만나면 마치 세상이 죄와 악이 가득한 무슨 범죄 소굴인양 말을 하며 경멸하고 우리는 마치 교회내에서만 살아야할 듯이 말하는지.. 사실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모습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살며 온갖 세상적인 것들을 실제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보다 더 솔직하게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실제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면서도 교회만 오면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이 세상을 비난하고 무조건 더럽고 추한 것으로 경멸하며 오직 세상과 구별된 사람인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와같은 이중성이야말로 우리들의 신앙을 박제된 신앙으로 만들고 예수를 상으로만 모시는 신앙이며 마치 불자들이 부처상을 모셔놓고 공을 드리는 것으로만 믿음을 다했다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 없습니다.


또하나 둘러 엎어야 할 상은 권력의 상입니다.

교회권력이며 교회내 권력다툼입니다.

권력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지배욕을 말하며 이것은 다스림의 즐거움 뿐만 아니라 구별된 특권의 향수라는 사회악적인 욕심의 실체입니다.

혼자만 누려보고자 하는 특별한 느낌 또는 누리는 소수에 속했을 때의 짜릿함에 대한 욕망입니다.

권력이 골고루 나누어질 때 그것은 더이상 권력이 아니지요. 따라서 권력은 집중되며 배타적이 되고 전투적으로 지켜집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커지면 필연적으로 권력지향이 되며 거의 예외없이  권력을 얻어서 그것을 행사하게 됩니다.

동시에 교회 내에서도 권력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암투가 시작됩니다. 직분은 각자 맡은 일의 분량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나타내는 권력적인 수단이 됩니다.

이런 가운데 교회가 행하는 자선과 구제 사업은 권력자의 시혜에 머물 뿐 모든 권세를 폐하고 모든 부리는 자로부터의 해방과 모든 종류의 억압과 부당한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시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가 당장 혁명적 사회변혁운동을 해나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실체적으로도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띤 것인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다만 교회 권력과 관련하여 오늘날 교회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분파적 분열과 그 속에서의 암투, 때론 잔인하리 만치 섬뜩한 음모들, 교회 권력자의 독선과 아집이 하나님으로부터의 기도응답으로 치부되면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속성들이 만연할 때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그 속에서 성도들이 참 사람이 되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교회내 권력의 상은 과감히 둘러 엎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때론 교회의 형태가 없는 신앙생활을 꿈꿉니다. 그러나 교회가 변질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주님은 문제의 소굴 속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 문제와 직접, 분연히 맞서셨습니다. 환란과 고통은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며 따라서 저는 때로  제 부족한 것이 채워지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부족함이 하나 없을 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인도 되었을 때도 똑같이 주님을 오늘 처럼 간구하고

날마다 찾게 될 지 사실 솔직히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저의 인생여정을 살펴보면 주님은 나의 환란 때의 구원자로서가 충만한 은혜 가운데에서의 감사의 주로서보다도 더 많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말입니다.


저는 교회가 모든 권력적 냄새를 풍기는 직분들을 없애고 소위 말씀권이니 주의 사자니 치리자니 하는 배타적인 개념들을 물리치며

예수아래 진정한 평등과 형제 자매됨을 누리는 교회로 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언젠가 한국교회에서 청년회를 맡았을 때 한국교회 개혁의 출발은 청년 성도들의 개혁으로부터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김창한 님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청년들이 캘거리라고 없을 이유가 없겠지요.

 

그리고 제가 예수운동의 재목은 아닌듯 합니다. 다만 이렇게 기회가 되었기에 그동안 누구하고도 나누지 못했던 나의 생각을 속시원히 털어놓았을 뿐. 아무튼 김창한님께는 감사합니다. 저의 생각이 다소 과격해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일부의 분들에게는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닐진대 이 글이 김창한님의 글에 대한 개인적인 답변형식이니 딴지를 걸지마시길...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크리스님의 애정어린 그렇지만 심도있는 제언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그런 수사쟁이의 한사람에 속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 운동의 초창기의 모습을 극도로 조직화된 현대사회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는 언제나 함정이 들어 있습니다. 혹은 딜레마라고도 해도 좋을 것입니다.

 

초장기 운동 (movement)이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 (institution)로 발전될 수 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직이 일단 형성되면 유토피아적 열정은 사라지고 이데올로기적 현상유지로 전환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노래는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구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희망입니다. 설령 이런 유토피아적 희망이 일시적으로 실현된다 하여도 그 실현의 순간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것이 바로 종교 조직이 갖는 딜레마라고 사회학자 토마스 오데아라는 사람이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런 골치 아픈 조직론을 떠나서 단순하게 교회 현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회 변혁에 투신하려면 반드시 조직이 필요합니다. 교회운동을 사회운동의 한 부문 운동으로 보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리스님의 말씀처럼, 아기 예수가 금박으로 입혀진 구유에 누워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기성 조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 운동의 열정과 의지가 식고 종교 제도로 확립된 것을 상징합니다. 이런 안정된 조직의 문제점은 초창기의 유토피아적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며 급기야는 자기 조직 유지에 급급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합니다.

 

반대로 마리아의 송가에 나타난 것처럼, 유토피아적 희망은 조직의 결여로 오합지졸로 머물 확률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캘거리 교회만 보더라도 종교가 마리아의 송가에 나타는 것처럼 유토피아적 희망이나 대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 필요한 문화체계의 한 부분 이상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민자들이 교회에 나가는 근본적 이유가 신앙보다는 큰 교회에서 정보를 얻거나, 친구가 가니까, 한인을 상대로 영업을 제대로 해 보기 위해서, 주일학교가 잘 되는 교육적인 목적 때문에, 한국에서 장로교회 출신이니까, 사립학교 추천서의 필요성 등등의 이유가 가능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것은 가치 평가가 아니라 그 현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 성장의 동기가 순수한 이념적 동기보다는  social network의 결과 때문이라고 사회학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동기가 보수/현상유지적 신앙과 결합될 때, 교회가 가족주의나 부족주의적 양상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종교가 세상에서 독립적인 발언을 하는 특별한 조직이 아니라 우리가 밥먹고, 자고, 똥을 누는 일상의 일면, 일반적 문화의 한 부문에 속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삶이 표상되는 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개별교회 내에서 교회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진 개별교인들도 꽤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들의 사회의식이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되기 보다는 그런 개별교회가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에 너무나 쉽게 동화되어 버려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절망입니다. 크리스님 같은 분이 나와서 예수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저도 거기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으로 이 얽힌 사회구조에서 개인이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들 개별 교회에 의식있는 소수마저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제가 이 번 성탄절 묵상을 위한 메시지로서 마리아의 송가를 택한 것은 저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마치 거미줄보다 가는 희망을 갖고 올린 것입니다. 혹시 그런 희망에 동참할 캘거리에 한인 청년들이 있는지 말입니다.

 

이것은 실현되지 않은 꿈입니다. 혹시 크리스님께서 그런 운동에 동참해 주시면 어떻습니까? 저는 지금도 부족하지만 작은 꿈을 꾸며 살고 있습니다. 저의 꿈은 민주화되고, 약자와 함께 하며, 소외된 형제와 함께 슬픔을 나누며, 함께 가는 그러한 교회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성서에 대한 어떤한 담론도 허용이 되고, 누구든지 자기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혹시 그런 교회 운동에 동참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CHRIS 님께서 남기신 글


해마다 이때면 거짓이 판을 치게됨을 봅니다.

모두가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해

이땅의 비천하고 멸시받고 억압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높여지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게 되었노라 노래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움인 것을 찬송한다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천하고 낮은 자들이 결코 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단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 우쭐해하기 조차 하며 더럽고 비천한 것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복에 겨워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누우셨던 더러운 말구유를 황금빛도 찬란한

말끔한 장소로 변모시켜 놓기조차 합니다. 더러운 것은 사실 싫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더러운 곳에서의 출생과 비천한 마을에서의 유년기, 보잘 것 없는 가정에서의 성장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접하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다분히 수사적일 뿐 아니라  의례적으로 내뱉는 무의식적 파토스에 불과해 보입니다.

단적으로, 교회가 속한 지역 컴뮤니티를 멸시하고 경멸하며 우리가 그곳에 살지 않음을 당연시 하며 그들과 섞일 수 없는 구별된 사람들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창기와 어울리고 세리와 한 상에서 식사하며 문둥병자, 정신병자, 그리고 당시 사람 축에도 들지 않던 여자들과 아이들까지등  외모와 사회적 지위로 보면 전혀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히 혁명적이며 기인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지금 편하게 예수님이 예수님인 줄 알고 믿고 있지만 당시의 시대에서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천한 자로, 위험한 인물로 보지 않고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니 대부분의 당시 중산층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돌을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베드로가 세번 부인할만치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으니까요.

그분을 흠모하고 그분을 따랐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보면 우리가 속해있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예수의 오신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본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와 그 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체득하고 있는지 검증해본다면 아마도 오늘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예수를 부인하는 그룹 쪽에 속해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권세있는 자를 내치시고 버림 받은자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며 우리도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갑시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판단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자칭 그리스도인의 극소수에게만 해당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세있는 자를 내치고 버림받은자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혁명입니다. 권세 있는자는 모두 내쳐야할 악인입니까. 버림받은 자들은 모두 보호 받아야할 의인입니까? 도대체 버림받은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된다는 말인가요.

 

 그런 의미에서 김창한 님의 다음과 같은 부연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면서 어딘지 모호합니다. 실제 주님이 행하시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에 미흡한 말같아서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부연하신 김창한님의 해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해석이 모호호하다는 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제게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 즉 구원 (salvation)의 완성은 후반부에 나타난 것처럼 만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 (justice)의 실현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 노래. 이것은 버림받은 자들 (outcasts)의 노래며, 노숙자들 (homeless people)의 노래며, 사회적으로 정죄받은 사람들 (deviated people)의 노래입니다. 기득권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폭력으로, 즉 권력으로, 재력으로 약자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노래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때가 되면 홀수처럼 쏟아지는 사람들의 말잔치와 습관적으로 내뱉는 종교적 수사에 경종을 울려 자신의 진정한 실체와 기독교적 이상의 간격을 좁혀가는데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나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눈물로 찬송하면서 손으로는 주님 손에 못을 박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이중성에 대한 경종 말입니다.


☞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마리아의 노래 (Mary's Song; 눅 1:46-55; 공동번역)
4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48.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50.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51.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53.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54.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마리아의 송가 (Mary’s Song)는 Magnificat라고 불려지는데, 이것은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 (Vulgate) 판에서 시작되는 말이 Magnificat (glorifies; 영화롭게 하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문맥으로 봐선 마리아의 노래가 아니라  엘리사벳 (Elisabeth)의 노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누구의 노래든 간에, 이 노래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한 여인의 희망과 꿈이 고스란히 잘 담겨져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망과 민족적인 소망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른 여인의 신앙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모범적인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①전반부 (46-49 절)는 마리아가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일인칭 (first person)으로 “내 구주,” “내 영혼,” “나를,” “나에게’라는 말에 주목해 보십시오. 마리아는 하나님이 그녀를 축복하신 일을 기쁨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녀는 비천한 신세지만 만민이 그녀가 복받았다고 칭송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녀를 통하여 만민을 위한 구원을 성취할 것이니까요. 그녀가 예상치 않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한 여인 (Miss Nobody)를 통해서 축복하셨듯이, 우리들 각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outcasts)을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 알아 보신다는 믿음, 즉 약한자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를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의 희망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② 이 후반부 (50-55)는 앞부분과 달리 삼인칭 (third person)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나”로 표현한 것은 이제, 그녀 자신을 넘어 하나님이 백성에게 내린 축복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멸망시키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부자들을 몰락시키는 권세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심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옵니다. 삶의 모든 곳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배고픈 자에게 새로운 희망이기도 합니다. 54절에서 자비를 기억하신다는 말씀.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희망은 마지막 55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 즉 구원 (salvation)의 완성은 후반부에 나타난 것처럼 만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 (justice)의 실현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 노래. 이것은 버림받은 자들 (outcasts)의 노래며, 노숙자들 (homeless people)의 노래며, 사회적으로 정죄받은 사람들 (deviated people)의 노래입니다. 기득권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폭력으로, 즉 권력으로, 재력으로 약자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노래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종교가 달라도,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삶의 방식이 달라도, 다 노숙자 아기 예수에게는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노숙자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날입니다.


* 성탄절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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