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해달라고 청하지 말라.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보다 용서해주는 법을 배우게 해달라고
청하라.
세상을 용서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끝이 있을 수
없음과,
그리고 그분이 창조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실재가 아님을
너는 알게 되리라.
바로 이 한 문장
속에
우리의 전 수업이 설명되고 있다.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인들
용서가 해줄 수
없겠는가?
평화를 원하는가?
용서가 그것을 준다.
행복과, 고요한 마음과, 목적의
확실함,
그리고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와 아름다움의 감각을 원하는가?
보살핌과 안전함,
그리고
늘 확고한 보호와 그 따뜻함을 원하는가?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
결코 상처받을 수 없는 부드러움,
깊고도
변함없는 위안,
그리고 너무도 완벽하여 절대로 동요될 수 없는
안식을 원하는가?
용서는 이 모든 것을 네게
베푼다.
평화를 원한다면
오직 완전한 용서로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정작 용서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바로 그 완전한 용서 안에서
너는 완전히 사면된다.
실재의 세계는
단지
묵은 것에 대한 완전한 용서에 의해 이룩된다.
과거를 용서하고 놓아주어라.
과거란 곧 가버린
것이기에.
두 눈을 들어,
서로의 환상에 대한 완전한 용서에서 태어나는
순결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라.
네가 용서하지 않은 이들을 너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곁에 두고는
아무도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
용서는 언제나
용서를 해주는 사람에 달려 있다.
용서는
네
형제와 너 자신 사이에 버티고 있는 것을 치워준다.
용서는 곧 네가 그와 함께 하며
떨어지지 않고자 하는
바램이다.
어떠한 종류의 공격에도
그에 대한 응답은 용서이다.
그리하여 공격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미움은 사랑의 이름으로 보답받는다.
네가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너의 환상에
대해
너 자신을 용서하는 힘이 주어진다.
네가 주는 자유라는 선물에 의해
바로 너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너는 줌으로써 받게 될 것이다.
줌과 받음은 같은 것이다.
너 자신에 대한
환상과
이 세상에 대한 환상은 하나이다.
모든 용서는 곧
너 자신을 위한 선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용서는 이 세상의 크나큰 요구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이 환상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을 환상에서 해방시키는 반면,
용서를 억누르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를 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비판을 일삼는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정당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반갑게 맞이할 줄 알게 된다.
용서는 행복으로 가는 열쇠이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듯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게 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호시탐탐 너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고,
고요와 평화를 찾고자 하는 네 희망에
불신을 가져다주는, 그 확연한 위험 속에서도
안전으로 가는 길이 여기에 있다.
모든 물음들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모든 불신의 끝이 마침내 보장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