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한 님께서 남기신 글
글을 쓰고 보니 거친 점이 많은데, 포이어바하의 “투사 이론”을 은유적으로 현실에 적용해 보자는
뜻이니, 그런 면으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한국 개신교 神의 일그러진 초상
김창한
요즘 한국 기독교의 모양새를 보면, 마치 미국의 부시 종교인 극우 기독교를 보는 것같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를 “수입한지” 1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개신교가 부시의 종교와 너무나 유사한 닮은 꼴을 보면서, 한국기독교는 미국의 현지 공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한국 기독교는 세계 제 2의 선교사 수를 자랑하면서 각 나라에 공장 기지를 만들어 “배타주의” 상품을 전세계에 수출하여 이슬람 근본주의 상품과 경쟁/갈등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상품 생산능력으로는 일본의 산업 기술력과 맞먹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방의 시대를 넘어 자체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 셈이지요.
극우 기독교인들이 비판하는 김일성-김정일의 부자세습을 닮은 교회의 부자세습은 물론, 독재 또는 전제 정치가 교회에서 횡횡하고, 돈과 권력으로 세상을 주름잡으려 하며, 전두환 때는 조찬기도회 참석을 가문의 영광으로 보고 독재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니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라 하던 자들이 이제는 현 정권을 빨갱이 정권이라 하면서 가두 데모에 앞장서면서 종교의 권력화를 지향하는 모습이 현재 한국의 기독교 모습입니다. 이것이 말세고 진짜 종말입니다. 그래 이제 개신교 집단이 커졌으니 길거리로 몰려 다니면서, 그 권력을 휘두르는 맛을 좀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평등과 자비는 사라지고, 거기에 바로 기독교의 옷을 입은 이리와 늑대라는 권력의 탈을 한 것이 바로 현재 한국 기독교라고 하면, 분개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70-80년대 그들이 행한 행각과 현재 하는 짓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이 언제 독재권력을 향해 소리를 지른 적이 있으며 그들이 언제 진폐증에, 결핵에, 폐병에 죽어가는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시국선언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인간의 사유 (human thought)와
사회적 조건 (social condition)의 관계, 즉 분단과 반공이라는 사회적 조건에서 한국의 개신교는 배타적이고 극우적 신념을 생산해
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종교에 대한 이해를 극단적으로 몰고간 칼 맑스의 학문적 스승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하
(Ludwig Feuerbach)가 “종교는 인간의 꿈이 서린 것” (Religion is the dream of human mind) 이라고
한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그의 투사 이론 (projection theory)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맑스의 비난이 참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맑스 선생도 종교는 착취당한 인민의 아픔을 덜어주는 아편이라 했는데, 이것은 그 역시 사태를 잘 못 예측한 예언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제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종교는 기득권자를 위한 아편이다.” 종교는 기성의 권력이나 부를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합니다. 또한 돈도 풍성할 뿐만 아니라 그 맘몬이즘을 강화시켜줄 수 있는 영적/이데올로기적 갈증을 개신교가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약자의 아픔과 고난과 절규를 가슴졸일 필요도 없이 그것을 무감각하게 잠재워주는 진정제 (sedative)로서의 아편이 바로 한국의 개신교 집단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포이어바하의 생각을 다시 덧붙이겠습니다. 그는 신이란 인간이 상정한 가장 고상한 열망이 농축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사랑, 정의, 평화, 자비, 희망 등, 현 세상에서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이상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고 그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이어바하의 입장에서 이것이 왜 신학 (theology)이 아니라 인간학 (anthropology)인고 하니, 신이란 인간이 투사한 피사체에 불과한 것이니 “God is man” 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결국 신은 인간인 셈이지요.
그런데 왜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이 낭만적이냐 하면, 신이란 존재가 기실 인간의 꿈이 이상화된 것이라고 할 때, 그가 말한 꿈은 제법 멋저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여러분의 마음을 투사해 보십시오. MS PowerPoint와 Projector 를 이용해서 어떤 자화상이 스크린에 나타날지 생각해 보시면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투사 이론을 가지고 한국의 개신교도들이 만들어 낸 상징체계 (symbolism)나 투사된 내용, 그리고 그들이 이상화해서 투사한 “신”이라는 존재를 살펴보면, 그 투사된 신이 얼마나 추악하고 일그러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상화된 아름다운 신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신을 살리라면, 우리 신앙부터 변해야 (transform)합니다. 영어의 주술관계 (subject-predicate)를 잘 따져보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 유명한 20세기의 성인 알버트 슈바이쩌, 의사에다가 신학 박사 그리고 유명한 올간 연주자였던 그가 모든 명예를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인술을 베푼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리고 그의 헌신은 노벨 평화상을 받기에 너무나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학자로 남았다고 해도 대성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쓴 불후의 대작 [예수생애연구사] 에서 그 동안 연구해온 예수의 생애는 객관적 예수상을 구축했다기 보다는 각 시대의 예수상을 표상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전히 백인들이 예수는 하얀 살결에 수도승 같은 예수이미지를 갖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이미지를 예수의 이름을 빌어 제조해 낸 것 (invent 또는 manufactur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들이 만든 하나님은 전제 군주에 폭군이미지이고, 예수는 배타적이고 극우적인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보고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거기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 즉 “수난” (Passion)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불교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Com + Passion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Compassion 은 다름 아닌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 (to feel with)이라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의 수난을 기독교인들이 함께 (com-) 수난에 동참 (Passion) 할 때,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이 옳든, 그르든 술어 (predicate)는 보기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들 중 한사람인 칼 발트 (Karl Barth) 가 반기독교적인 문헌인 포이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의 서문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발트는 “불타오르는 내” (독일어 이름 Feuerbach의 영어 의미는 fiery brook 임)를 건너가지 않고서는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신을 인간으로 환원 (reduction)했지만, 그의 철학에서 발트는 바로 참된 인간학 (anthropology)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런 일그러지고 뒤틀린 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니, 세상이 더 암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근본주의적 배타주의적 종교 이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포이어바하의 종교 투사이론이 여전히 폐기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래서 말을 바꿔야 합니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과 배타성과 권력 지향과 극우적 정서가 표상되는 인간의 자화상이다.” 이 명제가 맞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포이어바하가 신은 인간 꿈의 투사다라고 한 것은 그가 “너무나 친치독교적인 너무나 친기독교적”인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투사시키고 있습니까?
1. 한국 개신교 神의 일그러진 초상
김창한
요즘 한국 기독교의 모양새를 보면, 마치 미국의 부시 종교인 극우 기독교를 보는 것같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를 “수입한지” 1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개신교가 부시의 종교와 너무나 유사한 닮은 꼴을 보면서, 한국기독교는 미국의 현지 공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한국 기독교는 세계 제 2의 선교사 수를 자랑하면서 각 나라에 공장 기지를 만들어 “배타주의” 상품을 전세계에 수출하여 이슬람 근본주의 상품과 경쟁/갈등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상품 생산능력으로는 일본의 산업 기술력과 맞먹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방의 시대를 넘어 자체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 셈이지요.
극우 기독교인들이 비판하는 김일성-김정일의 부자세습을 닮은 교회의 부자세습은 물론, 독재 또는 전제 정치가 교회에서 횡횡하고, 돈과 권력으로 세상을 주름잡으려 하며, 전두환 때는 조찬기도회 참석을 가문의 영광으로 보고 독재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니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라 하던 자들이 이제는 현 정권을 빨갱이 정권이라 하면서 가두 데모에 앞장서면서 종교의 권력화를 지향하는 모습이 현재 한국의 기독교 모습입니다. 이것이 말세고 진짜 종말입니다. 그래 이제 개신교 집단이 커졌으니 길거리로 몰려 다니면서, 그 권력을 휘두르는 맛을 좀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평등과 자비는 사라지고, 거기에 바로 기독교의 옷을 입은 이리와 늑대라는 권력의 탈을 한 것이 바로 현재 한국 기독교라고 하면, 분개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70-80년대 그들이 행한 행각과 현재 하는 짓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이 언제 독재권력을 향해 소리를 지른 적이 있으며 그들이 언제 진폐증에, 결핵에, 폐병에 죽어가는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시국선언을 한 적이 있습니까?
Ludwig Feuerbach |
이제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종교는 기득권자를 위한 아편이다.” 종교는 기성의 권력이나 부를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합니다. 또한 돈도 풍성할 뿐만 아니라 그 맘몬이즘을 강화시켜줄 수 있는 영적/이데올로기적 갈증을 개신교가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약자의 아픔과 고난과 절규를 가슴졸일 필요도 없이 그것을 무감각하게 잠재워주는 진정제 (sedative)로서의 아편이 바로 한국의 개신교 집단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포이어바하의 생각을 다시 덧붙이겠습니다. 그는 신이란 인간이 상정한 가장 고상한 열망이 농축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사랑, 정의, 평화, 자비, 희망 등, 현 세상에서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이상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고 그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이어바하의 입장에서 이것이 왜 신학 (theology)이 아니라 인간학 (anthropology)인고 하니, 신이란 인간이 투사한 피사체에 불과한 것이니 “God is man” 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결국 신은 인간인 셈이지요.
그런데 왜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이 낭만적이냐 하면, 신이란 존재가 기실 인간의 꿈이 이상화된 것이라고 할 때, 그가 말한 꿈은 제법 멋저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여러분의 마음을 투사해 보십시오. MS PowerPoint와 Projector 를 이용해서 어떤 자화상이 스크린에 나타날지 생각해 보시면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투사 이론을 가지고 한국의 개신교도들이 만들어 낸 상징체계 (symbolism)나 투사된 내용, 그리고 그들이 이상화해서 투사한 “신”이라는 존재를 살펴보면, 그 투사된 신이 얼마나 추악하고 일그러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상화된 아름다운 신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신을 살리라면, 우리 신앙부터 변해야 (transform)합니다. 영어의 주술관계 (subject-predicate)를 잘 따져보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 유명한 20세기의 성인 알버트 슈바이쩌, 의사에다가 신학 박사 그리고 유명한 올간 연주자였던 그가 모든 명예를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인술을 베푼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리고 그의 헌신은 노벨 평화상을 받기에 너무나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학자로 남았다고 해도 대성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쓴 불후의 대작 [예수생애연구사] 에서 그 동안 연구해온 예수의 생애는 객관적 예수상을 구축했다기 보다는 각 시대의 예수상을 표상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전히 백인들이 예수는 하얀 살결에 수도승 같은 예수이미지를 갖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이미지를 예수의 이름을 빌어 제조해 낸 것 (invent 또는 manufactur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들이 만든 하나님은 전제 군주에 폭군이미지이고, 예수는 배타적이고 극우적인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보고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거기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 즉 “수난” (Passion)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불교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Com + Passion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Compassion 은 다름 아닌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 (to feel with)이라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의 수난을 기독교인들이 함께 (com-) 수난에 동참 (Passion) 할 때,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이 옳든, 그르든 술어 (predicate)는 보기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들 중 한사람인 칼 발트 (Karl Barth) 가 반기독교적인 문헌인 포이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의 서문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발트는 “불타오르는 내” (독일어 이름 Feuerbach의 영어 의미는 fiery brook 임)를 건너가지 않고서는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신을 인간으로 환원 (reduction)했지만, 그의 철학에서 발트는 바로 참된 인간학 (anthropology)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런 일그러지고 뒤틀린 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니, 세상이 더 암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근본주의적 배타주의적 종교 이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포이어바하의 종교 투사이론이 여전히 폐기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래서 말을 바꿔야 합니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과 배타성과 권력 지향과 극우적 정서가 표상되는 인간의 자화상이다.” 이 명제가 맞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포이어바하가 신은 인간 꿈의 투사다라고 한 것은 그가 “너무나 친치독교적인 너무나 친기독교적”인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투사시키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