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지아주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극우난동분자의 살인폭력사태는 미국의 이념전선구도를 일거에 뒤바꾸어 놓았다. 부통령에서부터 티파티 소속 공화당 우파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하게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가운데, 오늘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Fox News 는 '트럼프의 이상한 발언을 지지해 줄 단 한 사람의 논객도 찾지 못했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트럼프 저서 'Art of the Deal' 이라는 책을 써 준 대필작가 Tony Schwartz 는 오늘 트윗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곧 사임할 거라는 전망을 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생명은 이미 종말을 고했다'는 선언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나치집단과 쿠 클럭스 클랜이 가장 증오하는 유대인 사위와 유대교인 딸을 둔 아버지이기도 한 도널드 트럼프는 "Jews will not replace us" 를 외치는 나치분자들을 가리켜 '그들도 알고보면 착하고 평범한 시민 (fine people)이라는 망언을 함으로써 자기 자식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자부심이 강했던 전통적인 다문화 국가 미국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욕적인 상처를 남기게 됐다.
대혼란의 와중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백악관 수석전략가 (Chief Strategist) 스티브 배넌의 인터뷰 발언이었다.
배넌은 극우매체 CEO 출신 이념가로 트럼프의 반이민과 반자유무역정책 멘토로 알려진 인물이다. 전국에서 모인 극우분자들이 평화로웠던 소도시 샬러츠빌에 처들어가 난동을 부린 사태에 대해 트럼프가 잘못된 발언을 하도록 부추킨 인물로 지목되어 해임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이 작자가 갑자기 어제 트럼프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발언을 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어제 The American Prospect 와의 인터뷰에서 샬러츠빌에서 난동을 부린 신나치와 쿠 클럭스 클랜을 가리켜 쓸모없는 낙오자 집단 (collection of clowns), 변두리 양아치들 (fringe element, losers)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벼랑끝에 몰린 대통령을 살려놓고자 한 말이었다면 이런 말은 참모인 자기가 할 게 아니라 대통령 자신이 직접했어야 했다.
정작 대통령은 지금 이 시간에도 남부연함군 장군들 동상이 아름다운 유산이라느니, 역사는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느니 샬러츠빌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린 극우분자들도 알고보면 착하고 평범한 시민이라느니 하면서 한 시간이 멀다하고 미국시민들의 분통을 터뜨리는 뚱딴지같은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마당에 수석전략가 혼자 이런 발언을 단독언론인터뷰를 통해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같은 날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부자와 각군 참모총장 및 사령관들,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반인종주의 성명을 발표하고, 명백한 비난발언을 하지 않고 이말했다 저말했다 하고 있는 트럼프를 일제히 성토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스티브 배넌의 인터뷰 발언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가려졌지만, 이 작자야말로 의미심장한 야심을 품고 멀리 내다보며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배넌은 극우인종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기의 사상은 ethno-nationalism 이 아닌 economic-nationalism' 이라는 청사진 까지 제시했다. 앞의 단어는 부족적 민족주의 (인종주의) 로 해석할 수 있고, 뒤의 단어는 경제국가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트럼프 임기 초에 배넌이 인터뷰 할 때도 economic nationalism 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의 언론들이 이 단어를 일제히 경제민족주의라고 변역을 한 기사를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nationalism 이란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라고 번역해야 맞다.
지금까지 스티브 배넌은 트럼프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고문 쿠슈너 및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등과 권력투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트럼프를 조기에 몰락시키고 자신이 대안보수의 명실상부한 새 상징리더로 등극하기 위해 그 싸움을 벌여온 것 같다는 강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는 드러난 것만 해도 두 번 씩이나 트럼프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한 번은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된 기밀고급정보들을 언론에 순차적으로 흘린 것이었고, 다른 한 번은 어제 The American Prospect 와의 인터뷰에서 인종주의와 북코리아 문제에 대해 트럼프의 말과는 전혀 상반되는 자기 입장을 개진함으로써 트럼프를 '졸지붕신'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그가 어제 The American Prospect 와의 인터뷰에서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트럼프는 신나치나 쿠 클럭스 클랜과 같은 역사의 쓰레기 앞에서도 지지표나 날아갈것을 걱정하며 횡설수설하는 팔푼이지만, 자기는 destructive 하기만한 인종주의는 거부하고 미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경제국가주의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트럼프와의 차별성을 명확히 했다.
둘째, 미국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패권경쟁 상대는 중국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트럼프는 코리아반도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화염과 분노'와 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미국을 북코리아와 동등한 수준의 나라로 만들어 세계망신을 떨어댔지만, 자기는 앞으로 (갈 길은 멀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북코리아가 핵동결에 동의한다면 미국도 북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북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주한미군도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넌지시 밝히기도 했다.
기사에는 안 나왔지만 배넌은 중국과의 패권경쟁 전선에서 전략무기 신흥강국으로 등장한 북코리아와 더이상 적대적 관계를 계속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는 생각을 줄곧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7 월 말부터 고조된 북과의 전쟁위기국면에서 스티브 배넌은 줄곧 온건론을 펴며 백악관 일부에서 제기되었던 선제공격론을 제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심만 많았지 그 야심을 뒷받침할만한 능력도 참을성도 없는 도널드 트럼프와는 달리 뛰어난 감각과 지력을 갖춘 스티브 배넌은 이제 그를 진짜 떠나 독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부통령은 아니니 일각의 확신에 찬 예견대로 트럼프가 올해 안에 실각한다고 해도 그의 세상이 곧바로 열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