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 한 번 올렸던 것이지만,
감상글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려봅니다
(그래봤자, 그게 그거지만... 아무튼,)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집으로 『십이음계』, 『시인학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선집 『북치는 소년』 등이 있음. 1984년 타계 27세에 월남해 평생 가난 속에서 ‘북치는 소년’처럼 산 시인 김종삼. 가난하였음에도 그의 가난이 구차해보이지 않는 것은, 흔히 김종삼을 보헤미안과 연결시키듯이 술과 예술 특히나 고전음악을 평생 즐긴 시인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스스로의 시를 시가 아니라고도 하고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그의 짧은 시 「묵화(墨畵)」를 옮겨봅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단순하면서도 사람 마음을 찌르르 울리는, 이런 시 몇 편 꼭 써보고 싶습니다. 일일이 옮겨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북치는 소년」, 「민간인」, 「장편2」, 「올페」 등도 꼭 챙겨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충만한 여백 속에 서성이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시인입니다. 오늘 하루도 평범하고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맘 좋고 명랑하게 인정을 품고 산 우리여, 앞서 산 한 아름다운 시인이 우리를 일컬어 시인이라 하는군요. 남대문 시장통 빈대떡 만들어 파는 아주머니가 시인이고, 분주하게 일상을 살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을 잃지 않고 사는 모든 필부들이 ‘세상의 알파’라 하는군요. 친구여, 곰곰 생각해보세요. 세상의 광명은 저 높은 엘리트의 마을에 있지 않습니다. 나지막한 곳에서 따뜻함을 잃지 않는 우리들이 ‘세상의 알파’입니다. <김선우, 시인> |
------------------------<선우님의 감상에 덧붙여 보는, 희서니의 감상>
시인의 시세계는 자기부정.자기부재의 늪에서 벗어나,
확인되는 삶의 정체성(正體性)과 함께..
한 시인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로였을까
이 詩에서도 그런 자기확인을 위한 성찰이 느껴지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시인으로 수락하기에
자신은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자책(自責)이 눈길을 끈다
詩는 많지만, 시인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기이한 시대에
진정한 시인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시 한 편......
詩에서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라는 발언을 하면서도,
'그렇다 / 非詩일지라도 나의 직장은 詩이다'([제작]의 한 구절)에서
말해지듯이, 詩만이 오직 그에게 최후의 긍정이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제작製作 / 김종삼
그렇다/ 非詩일지라도 나의 직장(職場)은 詩이다.// 나는/ 진눈깨비 날리는 질짝한 주변(周邊)이고/
가동中인/ 야간단조공창(夜間鍛造工廠)// 깊어가리마치 깊어가는 흠곡(欠谷)
한국 현대시단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쓴 것으로 평가받는, 시인 김종삼.
1921년 황해도 은율 출생. 평양의 광성보통학교 졸업 뒤 1934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단,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시마(豊島)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영화인과 접촉하면서
조감독 생활을 했다.
해방 후 유치진을 사사, 극예술협회 연출부에서 음향효과를 맡기도 했다.
6·25전쟁 때 대구에서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환도 후 군사다이제스트사 기자,
국방부 정훈국 방송실의 상임연출자로 10여 년간 일했으며
1963년부터 동아방송국 제작부에서 근무했다.
1957년 전봉건, 김광림과 3인 연대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1968년 문덕수, 김광림과
3인 연대시집 <본적지>를 냈다. 시집으로 <십이음계>, <시인학교>, <북치는 소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등이 있다.
1984년 12월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의 현대시사(現代詩史)를 조망할 때 화려하지는 않지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김종삼(1921~1984)이다.
그의 시는 긴장과 압축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읽고 나면 꼬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한국 현대시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선명하다.
정갈한 한국어의 적절한 배치만으로도 그의 시는
농가의 초가집처럼 깨끗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시(詩)가 완성된 하나의 구조물이라면,
김종삼이 지은 집은 여백의 미를 가장 잘 살린 한옥과 같은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이, 언어가 주는 울림과 이미지만 남겨진 단형 시들은
은근하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여운과 감동은 시를 읽고 난 후에도 머릿속에서 공명되고
잔잔한 파문이 되어 가슴 깊은 곳까지 멀리 퍼진다.
주름간 대리석(大理石) / 김종삼
한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構造)의
대리석(大理石)
그 마당(寺院) 한구석
잎사귀가 한잎 두잎 내려 앉았다
김종삼 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의 시에서는 압축과 정제된 언어의 울림,
그리고 언어 밖의 여백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제 읽어도 깔끔하고 어떻게 바라보아도 편안하다.
한 편의 시가 아니라 그림처럼 하나의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말의 여백과 울림을 기막히게 배치하는 솜씨는 그의 시를 특별하게 한다.
그의 시는 절제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김종삼은 6·25 전쟁 직후부터 1984년 타계할 때까지
30여 년간 200여 편에 불과한 작품만을 남겼다.
이러한 과작(寡作)은 그의 시작(詩作) 태도를 말해준다.
절제된 언어 형식과 간신히 탄생한 한 편의 시들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오래 생각하고 정성들여 시 한 편을 완성하는 과정이 보이는 듯하다.
한 편 한 편을 꾹꾹 눌러 쓴 그의 육필 원고를 보면 그 과정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詩의 본령(本領)이 언어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희서니 개인적으로 볼 때, 김종삼은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와 1960년대에 벌어진 순수 참여 논쟁의 관점으로 볼 때도
김종삼의 시(詩)는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에 해당한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의 시가 가진 특별함에 값할만한 시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그는 시(詩)의 본질에 충실했던 시인이다.
스무 살 무렵 동생이 죽고 나이 들어서도 형을 먼저 보낸 불행한 가족관계는
그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아우는 스물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掌篇’ 중에서)’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트레이드마크처럼 손에서 놓지 않은 파이프 담배와 더불어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평생 월셋방을 전전했을 만큼 가난했지만, 그의 시에서 생활의 흔적은 만날 수가 없다.
오히려 서구지향적이고 클래식과 음악에 함몰된 모습들이 곳곳에 배어 나온다.
그것은 김종삼의 시에서 생경하고 어색함으로 남아,
동시대의 여타 다른 시인들의 시보다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석의 말대로 ‘무적자(無籍者)의 댄디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김종삼은
영혼의 유목민이었으며 보헤미안이었다.
현실 밖 ‘어린 왕자’처럼 맑고 순수한 서정의 시세계를 보여준 시인 김종삼은
오늘도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하여, 그의 시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내가 사랑하는 한국어의 현재형>이다.
-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