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된다는 희망은 / 허순위 마른 스펀지 같은 이곳에 뿌리 내렸다는 것인가. 작은 순간조차 풀꽃을 향해 포복해 가겠다는 그것, 좋은 소식인가. 흔들리고 밟히고 꿈틀거리는 가축의 밥도 못되면서 긴 손가락과 찢어진 살 바람에 푸들거리면서 더러는 시도 잊고 살 일이다. 우연히 감는 눈까풀 위에 황초는 스멀스멀 유혹의 혀 낼름거리지만 묘지의 꽃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실신한 듯 견디며 듣는 저 투명한 종소리 이제 두려움이 없고 길 없는 하얀 꿈이 쓰러지는 낯선 곳에서 듣다니! 여기서 길 되찾기란 없다. 풀이 된다는 희망은 부탁이다, 나는 부디 치욕스러워 몸으로부터 오는 나의 삶을 믿지 말자는 쓰러지며 가슴에 핀 파르스름한 결심이다. 허순위 시인 1984년 <현대시학>에 산백일홍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1990년 무크지 <90년대 시>에 <그 길은 푸른 발자국만 뜯어 먹는다>로 등단 1992년 첫 시집 말라가는 희망 (고려원) 1999년 포도인 아이 (들꽃) 2005년 소금집에 가고 싶다 (들꽃) --------------------------- <감상 & 생각> 때로는, 유한有限한 삶이란 게 참 맹랑하다고 느껴진다 고작, 70 ~ 80년 정도 살다 가는 人生 (요즘은 100세를 말하기도 한다지만 그것도 삶의 質이 급격히 떨어지는 질병의 기간이나 검버섯 피어나는 노년기를 제외한다면 실상, 삶다운 것으로 남는 것도 별로 없겠다) 아무튼, 그 유한한 기간을 아둥바둥 살아가면서 희망이 활짝 피어나는 야릇한 꿈 하나, 값비싼 부적처럼 간직하고 平生을 두고 허덕이는 이 마땅치 않은 형식을 생각하자면 정말 그러하단 거 그리고 보니, 오직 꿈에서만 찬란했던 희망은 생애 최초로 짠 ! 하며 요란하게 등장했던 때로부터 꾸준히 말라만 가고 한 번도 살찐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또한, 이 너덜거리는 육신을 지탱하는 삶이란 건 정말로 질기고 완강한 形式이어서 그 누구인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건 깨달음을 입에 달고 사는 수행자들도 육신의 몸으로 사는 동안은 예외가 아니고 심지어, 30대에 이미 완전한 각자覺者가 된 부처도 그의 老年에 등이 몹시 아파 눕고 싶다고 그의 제자 수보리에게 하소연 했다) 육신이야말로 삶의 가장 현실적인 담보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것(육체) 때문에 속절없이 죽어가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하여, 시인은 차라리 몸으로 부터 오는 삶을 믿지 말자는 결심을 하나 보다 희망의 부피만큼 온전히 빠져나간 파르스름한 결심은 시인으로 하여금 숙명에 아랑곳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피어있는, 풀 한 포기가 되려고 한다 그렇게, 풀이 된다는 희망을 품게 되나 보다 헛되이 지녔던 공소空疎한 희망을 지나쳐 온통 결핍으로만 똘똘 뭉친 것들을 비로소 자신의 존재로 극명하게 받아들이는 아픔이 있지만, 동시에 모든 상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눈물겨운 선언이기도 하다 -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