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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27] 인간의 자의식이 하느님과 성서 보다 먼저 있었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2067 작성일 2019-07-13 09:50 조회수 1371

기독교 교회는 교인들에게 하느님과 성서와 신앙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할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즉 성서를 읽기 전에 혹은 하느님을 믿기 전에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할 사실들이란, 인간이 속해 있는 우주와 수많은 별들 중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지구와 최초의 생명체의 탄생과 인간 생물종의 등장과 자의식을 지닌 인간의 출현에 대한 진화역사와 인간들이 왜 어떻게 유신론적 하느님과 종교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자의식을 지닌 인간 생물종은 오늘의 형태로 어느날 단번에 완성품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138억 년 우주진화 역사에서 빅뱅 이래 장구한 세월동안 진화과정은 계속되었으며, 최초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호모 하빌리스260만 년 전에 등장했고, 30만 년 전 자의식을 지닌 원시 호모 사피엔스과 등장했고, 4만 년 전 언어를 사용하는 현대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또한 특히 지난 수세기 동안 현대 인간의 자의식과 지적능력과 이성적 분별력은 급속도로 진화해왔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의식을 경험하는 것, 즉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실망과 절망에 빠지고, 새롭게 용기와 희망을 갖는 자의식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만성적으로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고대의 인간들은 자의식의 충격불안의식을 완화하기 위해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유신론적인 초자연적 하느님을 만들었다. 이 하느님은 질투하고 진노하고 편협한 하느님이었다. 또한 고대인들은 이 하느님은  인간의 외부에 즉 인간과 분리되어 이 세계 밖에 존재하는 타자이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녔다는 가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가정하고,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부여했다. 이렇게 유신론적 하느님을 만든 주요 목적은 안전한 보호와 축복과 은총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고대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이 받을 보호와 보상에 대한 조건을 첨부했다. 즉 이 하느님은 인간의 간청과 찬양과 영광을 받아야 하며, 따라서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기쁘게 해주어야 보호와 축복과 은총을 베푸는 존재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고대인들은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전적으로 보상징벌관계로 가정했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살아가는 과학시대의 현대인들은 유신론적 하느님의 확실성을 무작정 믿고, 교회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명령에 속아 넘어간 자기기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무용지물이 된 하느님을 신봉하는 유신론적 종교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지금까지 유신론의 원시적인 기능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으며,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한다. 다시 말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21세기에 인간의 자의식이 심층적으로 성숙해가는 일이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고대의 유신론적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떠나 보내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따라서 과학의 발견을 무시하고 보상심리의 노예가 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유신론적 종교가 어떠한 형태로 탄생하고 발전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종교는 인류사에서 어느 시점에 단번에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최초의 단계인 물활론(物活論, 모든 물질은 생명이나 혼,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연관범심론(汎心論)  형태) 단계를 거쳐 다신론(多神)에서 부족(민족) 유일신론(唯一神)으로 발전했다. 고대 인간들은 산, 바위, 동굴, , 시냇물, 동물, 천둥, 번개, 태양, , , 나무, , 바다 등 이 세계에서 그들의 자의식적 생활이 만나는 거의 모든 것들에 인격성을 부여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두려움과 공포와 이기심에 찬 고대인들은 그들의 생존이 걸려 있다고 믿는 초자연적인 힘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종교체계를 고안했다. 만일 생명력을 주는 영들이 자비를 베푼다고 믿게 되는 경우, 이 자의식적인 인간들은 그 영들의 축복을 받고자 했다. 만일 이 영들이 비호의적이거나 악마적인 것이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그 영들의 폭력적인 힘을 완화하려고 했다. 따라서 이렇게 새로이 자의식이 생긴 인간들은 여러 다양한 종교적 관행들을 만들어 이것들을 통해 인간의 필요에 응할 수 있도록 우주 안에 있는 초자연적인 힘들을 약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조정하기를 원했다. 이런 초자연적인 힘들을 의인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그 힘에 어떻게 순응해야 할지를 알았다. 즉 그들은 단지 인간의 기대와 실천적 관행들을 그 초자연적인 영역에 순응하도록 보조를 맞추면 되었다. 그들은 신의 뜻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 계속 그 뜻을 탐구하였고 따라서 그 유신론적 힘을 기쁘게 해주는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신적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신론적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믿음체계는 미사여구의 예배 언어를 발전시키고, 예배에서 마치 노예가 주인 앞에서 무릎꿇고 복종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한껏 비하한다. 그래서 이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고 비참한 범죄자입니다,’ ‘우리는 병들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당신의 치유만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자인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안타깝게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없이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축복과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속임수에 빠져 있다.

 

유신론적 종교체계의 특징은 그들의 특정 신만이 오직 진실하고 실재적인 존재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대로, 우리의 하느님만이 유일한 참된 신이며, 이 하느님의 진리는 오직 우리에게만 주어졌으며, 그것은 직접 계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 진리성을 의심할 수 없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주장은 자기기만무지함에 빠져있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들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즉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또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는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다는 주장은 우주진화 세계관의 불확실성의 우주 세계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무모한 욕구이다. 이 욕구는 인간 자의식의 불안한 마음을 다루려는 원시적인 고대 인간의 시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러한 시도는 효력이 없다. 확실성의 유신론은 인간의 생존의 두려움으로 인한 히스테리를 표층적으로 달래주는 데 이바지했다. 한편 그것은 인간의 공포 위에 경건한 외관을 씌워주었고, 비존재의 위협과 자의식의 충격을 다룰 수 있다는 거짓과 은폐였다. 이것은 유신론적 종교체계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혼돈과 착각 속에 빠지게 한 전략이었다.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추구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믿음체계는 죽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철저하게 믿어왔던 이 하느님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어떻게 자연계가 운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과학의 발견과 공개적 계시들이 한때 하느님이 독점했던 영역으로  진입했다. 처음에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간의 지식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해 주는듯함으로써 인간의 부족한 결함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부족함과 연약함과 결함들은 과학적인 지식의 발달로 인해 급속도로 약소화되었으며, 전지전능한 유신론적 하느님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유신론적 초능력도 무능한 것이 되었다. 영국학자 마이클 고울더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더 이상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할 일을 잃은 즉 실직한 신은 더 이상 하느님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오늘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우주 세계이다.

 

인간의 자의식과 유신론은 쌍둥이처럼 거의 동시에 탄생했지만 자의식의 원인이 되었던 진화과정은 유신론적 종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존재는 의식의 높은 수준으로 계속 진화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의식자체는 비유신론적 즉 무신론적 하느님의 의미를 탐구할 것이다. 또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자의식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심층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외부의 존재를 향한 초월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 새로운 인간성으로의 초월을 향해 자율적으로 창조적으로 자의식을 성숙하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부모처럼 우리를 돌보고 보살피며 보호해주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위한 영광과 이 하느님의 은총을 떠나 보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존중하고 성숙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유신론적 하느님을 즐겁게 해주려고 비굴하게 무릎꿇고 아부하던 우리의 과거의 패러다임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새로운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복종하고 맹신하는 대신에 이제 확대된 의식으로서 깨달아 알 수 있는 존재의 근원을 자아 속에서 만나기 위한 새로운 길이 우리 앞에 활짝 열려 있다.

 

과거에 조상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인간을 위해 보상심리의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또한 이분법적 믿음체계를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제도적인 구조들과 교리들에서 참된 인간의 의미인간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 살던 시대는 끝났다. 죽어가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소생시켜 보려고 우리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또한 바람직하지도 않다.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보수적인 근본주의는 미래로 가는 길이 아니고 과거에 머물러 과거를 부등켜 안고 숨넘어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헐떡거리는 꼴이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그것은 헛된 일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죽어가는 종교체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현실을 부인하는 것은 종교적 망상을 영속시키는 일이며 인류사회의 밝은 미래에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내세를 꿈꾸는 삼층 세계관적인 과거의 패러다임을 떠나 보내고, 우주진화 세계관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때가 되었다. 인간의 자의식을 성숙케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지금 여기에서 영원함을 깨닫고, 참된 진리를 탐구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상의 자리에 앉은 교리적으로 만들어진 하느님 예수의 믿음에서 이 길을 찾을 수 없다. 그대신 생선 비릿내가 물씬거리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리고 장터와 들판과 산에서 가르치고 몸소 살아냈던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서 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생존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오늘 인류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유신론의 죽음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가 출현하고 있으며, ‘하느님 없는 종교- 하느님 없는 윤리-교회 없는 사회라는 말들이 이상하지 않은 보편적인 말이 되고 있다. 하느님이란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실제(實際Reality)이다. [참고: 무신론적 實際) = 있는 그대로(사실) 경우·형편, 유신론적 실재(實在) = 상상이 아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 다시 말해, 하느님은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않으면 나쁜 일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온전한 삶의 방식과 표현이다. 오늘날 유신론의 죽음으로 새로운 인간의 의미와 생명의 의미가 탄생하고 있다. 인간의 자의식과 존엄성이 성숙해져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말대로, 인류와 세상을 위한 좋은 소식이고 인류에게 희망이 된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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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9-07-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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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의 주장들은 이른바 진보신학의 측면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글의 논조는 사회진화론을 닮았습니다. 즉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심히 오해하신 듯 합니다. 어떻게 생물이 138억년 부터 인간 의식의 단계까지 합목적적(teleological)으로 일관되게 진화했나요? 물리학적 세계와 생물학적 세계가 어떻게 쌈박하게 쉽게 연결되나요?

그리고 (우스개 소리지만) 종교라는 종(species)의 측면에서 볼 때, 이른바 진보종교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되고 있고 보수종교의 이기적 유전자는 아직까지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존능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무신론(the New Atheism)은 보수종교를 소멸시키기 위한 “종교우생학”(저의 용어)의 일환으로 인위적 환경을 만들고 있는데 어느 정도 효율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도킨스의 밈(meme) 이론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유전자를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종교는 유신론적 유전자들입니다.

결국 늘봄님의 생각들은 어쩌면 “자기소멸”을 향한 단말마적 외침일 가능성이 큽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종교에 대한 이해는 종교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생물학이 생물현상에 대한 과학적 관찰에서 발전되었듯이요. 자신이 만든 이상화된 틀을 미리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는 생각들은 편리할지 모르지만, 돈키호테식 접근일뿐 아니라 과학적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닙니다. (또 우스개 소리지만) 종교라는 종과 환경과의 관계에서 어떤 종교가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보수교회가 삼층세계관을 가졌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들이 진화론을 거부한다고 칩시다. 종교는 진화의 부산물이나 바이러스라고 칩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종교현상을 이른바 진화론의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느냐가 더 중요한 겁니다. 지질학이 땅에 대한 연구이듯이, 종교학(종교인류학, 인지과학, 진화심리학, 종교사회학 뭐든지….말씀이죠)은 종교라는 현상 또는 종(species)을 어떻게 분류하고 체계를 세우고 이론을 만들어 설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화의 대서사시”(the epic of evolution)는 새로운 신화, 또는 목적론적 (teleological) 이야기지 과학은 아니죠.

결국 늘봄님의 글의 문제는 진화론(사실이든 이론이든 중요하지 않음)적 사실에서 바로 점프(비약)를 감행해서 신학(형이상학)으로 넘어갔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늘봄님의 모든 글들은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보다는 목적론적 또는 사회진화론 신학이 앞서다 보니 신학적 형이상학 구축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물론 늘봄님의 글들이 보수근본주의자들의 글보다는 훨 낫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앞으로 늘봄님으로부터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또는 과학적 이해를 들을 수 있을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늘봄  |  2019-07-1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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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종교학의 전공자이신듯한데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내지는 과학적 이해를 씨엔드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저 보다는 님이 더 적절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종교학 영역은 신학을 전공한 저 보다는 최고 수준의 종교학을 공부하신 님이 저 보다는 독자들의 이해를 더 잘 도울 수 있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9-07-1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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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진화론과 과학을 등치시킨 이유는 여기서 진화론을 선교하신 분이 늘봄님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는 과학에 젓도 모르는 사람들이 과학을 이야기하고 급진적 발언만 쏟아낸다고 비판한 사람이 바로 소칼의 [지적 사기]라는 책입니다. 바로 그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대한 비판이죠. 이것과 동일하게 Paul Gross 와 Norman Levitt이 말하는 [높은 미신: 학문적 좌파와 과학적 다툼]도 이런 것들이죠. 늘봄님께서 자주 인용하신 에드워드 윌슨도 열나게 지적 좌파나 다문화주의를 향해 분풀이를 하거나 진화심리학에서 앞서 나가는 캐나다 출신 스티븐 핑커도 바로 급진적 좌파 지식인을 향해 냉소를 보내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늘봄님께서 자주 인용하시는 이런 사람들이 왜 좌파 지식인들을 향해 불편한 마음을 보낼까요? 그것은 그들이 과학과 형이상학을 너무나 쉽게 접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 이해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곡해하는데 있습니다. 저는 늘봄님의 테제, 즉 인간주의(humanism)을 향한 열정은 매우 높이 삽니다. 그런데 함부로 재단하시는 것을 보면서 글의 행간마다 불편함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현상에 대한 객관적 서술, 설명, 그리고 이해에 이르기 보다는 님께서 설정한 이념에 모든 것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님의 글에 서 왜 칼 융이 깨달음의 예가 되는지요. 즉, 님께서 융을 이해하셨다면, 어떤 융의 사상이 그런가요?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 때문인가요? 아님은 그의 상징이해 때문인가요? 어떤 곳에서도 님께서 왜 융을 인용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럼 키엘케골은 깨달음의 예로 드시는데 왜 그런가요? 왜 헤겔은 아닌가요? 매길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 철학의 출발점은 바로 헤겔 사상에서입니다. 님의 진보적 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사상에도 제대로 깊이 들어가지 않은체 단 큐핏 등이 열거한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전용하고 계시지 않나요?

그럼, 포이어바하를 들어 보겠습니다.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은 님의 경우엔 그냥 종교무신론를 말하면서 기존의 유신론을 까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어떻게 키엘케골의 유신론과 포이어바흐이 무신론이 쉽게 엮여 들어갑니까? 어떤 면에서요?

우리가 지적 사기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테제에 반대되는 예를 들면서 왜 나의 테제가 더 이론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적합한지를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균형있는 생각을 가질 때 바른 과학, 바른 역사학, 바른 인문학, 바른 신학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령 말씀이죠. 님께서 포이어바하를 열심히 예를 들으셨는데요. 인지과학과 인류학, 그리고 진화론을 접목해서 정리한 Stewart Guthrie의 [Faces in the Clouds: A New Theory of Religion]에서 종교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간이 초자연적 신이나 자연을 인간화시키는 능력, 즉 “의인화”(anthropomorphism; 어떻게 번역하든요. Anthropos는 희랍으로 사람을 말하니까 인간형태)라고 주장합니다. 가쓰리의 이론은 제가 그동안 찾은 이론 중에 가장 그럴듯한 종교 이론 중의 하나입니다. 가쓰리는 이런 아이디어를 바로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에서 찾습니다. 포이어바하는 이런 인간의 이상화된 투사가 바로 신이고 종교이며, 이런 투사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무신론이고, 이 "무신론"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죠. 즉, 신의 의인화를 종교로 한정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님께서 인용하신 포이어바하가 사실은 님의 이해와는 정반대의 종교이해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포이어바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인가요?

종교인류학이든, 종교사회학이든, 종교심리학이든, 종교현상학이든, 비교종교학이든, 이 모든 학제간적(interdisciplinary) 노력은 바로 종교라는 현상에 대한 제대로된 설명과 이해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문제시되는 것은 바로 진화론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급진적 신학자들 역시 문제는 종교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고민없이 소위 말해서 급진적 발언만 쏟아내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방해만 될 뿐입니다. 님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화의 실재를 제대로 이해해야 된다고 누누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와 동일하게 훌륭한 신학자기 되기 위해서는 누가 보더라도 이 사람이 인문사회과학적 소양과 겸손이 있구나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님의 열정에서 많이 배웁니다. 하지만 누구를 인용할 때 왜곡은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전에도 지적했지만, 님께서 너무나 자주 인용하신 Royal Rue의 진화의 서사시(the epic of evolution)는 책 본문 368 쪽 중에서 불과 양으로는 6쪽도 안됩니다. 그의 책의 압도적인 내용은 종교라는 진화된 현상은 바로 인간의 “감정”(emotion)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인간이 갖는 자비심, 공감의식, 죄의식 등등의 감정적 문제, 즉 인간의 행동의 동인으로서의 감정의 진화문제를 다룬 겁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그의 책 제목 [Religion is not about God]라는 제목만 똑 따 내서 신 따위는 필요없다는 투로, 즉 무신론적 기독교를 위한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사기를 치셨거나 아니면 왜곡 시키신 겁니다. 즉 루에 따르면, 각각의 종교는 핵심 신화가 있는데, 그 신화에 따라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등으로 발전했는데 각 종교의 감정적 행위나 반응도 다르게 나타났다는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저는 어느 종교인류학자, 현상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중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로 신에 대한 믿음을 상정해서 설명하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늘봄님의 문제는 진보적 이념을 고수했다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 등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거나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를 추구하거나 제대로 된 진화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신학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님의 종교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나 곡해는 이해를 돕기 보다는 또 다른 종파주의적(sectarian) 해석에 경도되어 정치적(politicized) 또는 진영논리적(polarized)이라는 데 있습니다.

늘봄님의 위의 답글은 감사하기는 하지만, 진화론의 선교사로서 이 게시판에 5년여에 걸친 진화론 선교활동을 벌인 분의 책임있는 글은 아닌듯 합니다. 정말 우리가 여기서 의미있는 토론을 하려면 먼저 늘봄님의 정치한 진화론과 종교 그리고 신학적 이해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토론이 되죠. 맨날 반대극에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까부수겠다고 하는 모습은 진화론과 신학을 제대로 모르는 급진적 좌파들에게는 먹혀 들어 갈 수는 있겠지만 건실한 모습은 아닌 듯합니다. 님의 진화론을 보여 주세요.

yongsan1  |  2019-07-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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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글을 읽고서 종교및 종교와 관련된 여러 부문을 좀 더 명확하게 구분, 이해하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9-07-1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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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님,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늘봄님의 종교와 과학의 양립가능성(compatibility)의 추구는 높이 살만하다고 봅니다. 요즘 자주 사용되고 회자되고 있는 “인지적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는 보수근본주의나 진보신학에 모두 해당된다고 봅니다. 보수주의는 인지적 부조화를 겪을 때 광신적으로 되고, 진보신학은 기독교 “성서”라는 신화적 텍스트(mythological texts)와 과학으로 대표되는 현대문화간의 간극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후자의 문제는 이것이 “종교”로 되기보다는 자기 소멸로 끝나는데 있습니다. 이런 자기 소멸을 막아주는 방패막이가 바로 유신론(theism)입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기독교무신론은 독립적인 종교운동이나 제도라기보다는 유신론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기생충입니다. 이런 기생충은 숙주가 죽으면 함께 소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무신론의 가치는 기독교라는 스펙트럼에서 소수 기생하는 기독교무신론자들이 겪는 인지적 부조화를 극복하는 역할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 소박한 생각입니다), 불교인들은 엄청 기분 나쁘실 것이고 동의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불교의 명상이나 수행 등도 초자연적 힘으로서의 윤회와 열반이 동반되지 않으면 종교로서의 가치는 소멸할 것이라는 저의 예측입니다. 즉 불교의 삼보, 즉 불, 법, 승의 3번째 요소인 승가 (또는 상가)는 전문 승려집단인데 이런 승려집단은 평신도의 지원이 없이는 존재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승려집단이 아무리 무신론적 깨달음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승가집단은 평신도에 의존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이 평신도들, 즉 불자들은 바로 윤회의 초자연적 힘을 믿는 사람들이죠. 이것은 테라바다 불교(요즘은 소승이라는 말의 히나야나는 영어권에서 사용하지 않음. 그래서 소승불교라는 말은 사라져야 함)나 대승불교(마하야나 불교) 공히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신을 상정하거나 초자연적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무아(anatman 또는 anatta)는 바로 평신도의 든든한 버팀목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것이죠.

기독교나 불교든 어떤 형태든 초자연적 (supernatural)또는 초인간적(superhuman) 추정(assumption)이 없이는 자기 소멸의 길을 걸으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기독교 유신론과 무신론은 대척점이 아니라 순환관계에 있고 불교의 삼사라(윤회)의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믿음과 무아의 실천과 구경각(究竟覺)은 공생관계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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