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전도사를 알게 된 지 10년이 넘었다. 에드먼턴에서 처음 만났는데 요한복음을 배경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을 들고 북미를 순회 중이었다. 그는 모태 신앙인데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하고 연출가로 나서 세상 즐거움을 흠뻑 누리며 충무로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차 은혜를 받고 연출가 생활을 분뇨처럼 내버리고(마치 사도 바울처럼) 기독교를 배경으로 새상을 향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이 요한복음을 배경으로 만든 ‘아들의 노래’로 그의 복음주의가 녹아 있는 작품이다.
이성수 전도사를 다시 만난 건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해 연방정부가 용서를 빌며 화해와 진실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조직할 무렵이었다. 이 전도사는 화해와 용서를 바탕으로 피해자 원주민과 가해자 백인 사회를 영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수만 킬로를 운전하며 원주민 커뮤니티를 돌며 영상을 만들었다. 그의 열정과 헌신은 ‘Beautiful child’로 나타났다.
요즘엔 만나지 못하지만 서로 소식은 전하면서 살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기본정신인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일본의 만행과 용서를 그린 ‘용서를 위한 여행’을 만들었다.
예수의 정신을 본받고자 일본을 용서하자는 영상을 만들었지만 아직도 개인적으로 일본이 용서가 안된다는 이성수 전도사가 글을 보내왔다.
이성수 전도사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에드먼턴 화이트 에비뉴 ‘카페 1912’에서였다. 그때는 이성수 전도사 사모님도 같이 만났는데… 그 분, 사모님이라고 하면 무지 싫어 하는데.
이성수 전도사가 보내 온 글인데 본인의 동의 하에 퍼왔습니다.
요즘 위안부가 매춘부였으며 조선인은 하등 노동자였다는 논문에 더하여 심지어 간토대학살의 책임마저 조선인에게 돌리는 논문이 드러난 하버드 대학의 램지어 교수를 보며 역사에 있었던 두명의 미국인들이 생각난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당시 고종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두명의 미국인이 있었다.
한 명은 호머 헐버트로서 고종이 이상설, 이준, 이위종 3명의 특사를 극비리에 파견하는 것을 도왔고 자신도 제4의 밀사가 되어 헤이그로 날아가서 일본의 부당함을 질타했다. 그는 1895년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날 때 고종의 침실에서 언더우드, 에비슨과 함께 불침번을 서며 고종을 지키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 의해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전 미국을 다니며 한국의 분리독립을 호소했다.
그는 해방 후인 1949년 한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만에 그가 소원하던 유언대로 한국 땅 양화진에 묻혔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또 한 사람의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는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다. 그는 일본에 매수된 일본의 하수인이었다. 그는 일본제국의 을사늑약의 정당함을 알리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 세계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조선은 일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 어렵기에 일본의 보호국으로 있는 게 유익하다.”
그의 발언에 격분한 재미교포 전명운과 장인환은 그를 저격했고 병원으로 옮겨 진지 이틀 뒤 스티븐스는 절명했다.
요즘 학문을 빙자하여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들과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영혼들에 대한 모욕과 폄훼를 일삼는 램지어는 진실을 가리기 위해 살았던 더럼 스티븐스에게서 죽음의 허망함과 치욕을 깨닫길 바란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