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과 일본이 미국을 상대하는 자세의 차이를 보면 뜬금없이 영화 ‘남한산성’이 생각난다. 영화는 김훈의 원작소설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김상헌과 최명길의 논쟁장면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명길은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쿠데타 주역이자 조청전쟁(병자호란) 당시 현실주의에 입각한 타협론을 제시한 조선의 관료다. 김한길의 부인 탤런트 최명길과는 다른 사람이니 혼동하면 안된다.
문재인 대통령을 움직이는 한국의 파워엘리트그룹은 4 월 들어 미국을 향해 정면돌파의 강경자세를 연타로 밀고 나갔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적 압박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회의 모욕적 청문회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굴복으로 얻을 것이 없다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한 것 같다. 강경자세를 밀고나간다고 해서 얻을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얻을 게 없을 바에야 굴복보다는 항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게 분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의 파워엘리트그룹’이란 정의용, 홍남기 같은 관료집단이나 이재명 같은 범여권 대권주자들이 아니라, 40 년 전통의 NLPDR 인맥을 말한다. 1986 년 사회구성체논쟁승리를 거쳐 1987 년 대선 당시 DJ 비판적 지지로 제도권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이래 그 인맥은 한국 리버럴 제 1 당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세월이 흘렀고 이념도 변했지만 그 거대한 집단은 ‘조직’ 보다는 ‘흐름’으로 한국사회의 일각을 장악해왔다.
지난 몇 주 동안 이어진 범여권의 대미 강경노선은 여권 정계핵심과 주변에서 기획하고 주도했지만 실상은 그 ‘흐름’을 대리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토요일 저녁(한국시간) 느닷없이 화이저와 화이저앤비욘텍 백신 4 천 만 회분을 새로 계약했다는 발표를 했는데, 이 새로운 계약이 문재인 정부의 지난 주 이어진 대미 강경노선의 댓가는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아직 화이저 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뿐 아니라, 미국정부가 백신 완제품과 백신원자재를 DPA-1950 상의 전략물자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에 물량계약과 물량인도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 될 수 밖에 없다.
많은 한국매체가 오해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미국정부는 화이저나 모더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 없고 민간기업의 거래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미국정부가 나서서 이 나라엔 이만큼만 계약하고 저 나라엔 저만큼만 계약하라 할 수 없다. Defense Production Act of 1950를 발동하여 비상시기 전략물자와 원료에 대한 수출제한을 하고 목표치의 생산물량을 강제로 매수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문재인 정부의 기습적이고도 돌발적인 파상공세는 바이든행정부를 크게 흔들어 댄 효과를 가져왔다. 미국측이 반격으로 대응할 지 한국측의 요구와 입장을 일부 수용할지는 아직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지금 미국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는 세력이 문재인 정부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으며, 이들이 결코 만만한 파워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든을 가장 격노하게 만든 건 문재인 대통령의 NYT 기자회견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6 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진행됐고, 인터뷰 내용은 기자가 작성한 기고문의 형태로 전 세계에 타전됐다.
문재인 대통령을 인터뷰 한 기자는 최상훈 NYT 서울지국장이었다. 1962 년 경남 울주군(지금의 울산광역시) 출신인 그는 노근리에서 벌어졌던 미국군 민간인 학살사건 추척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당시에는 NYT 가 아닌 AP 통신 기자로 활동했었다.
국무부를 당혹하게 만들고 바이든을 격노하게 만든 인터뷰의 핵심은 ‘2018 년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하지 않으면 실수하는 것’이라는 대목이었다.
그 말 자체가 함유하고 있는 파괴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도널드 J 트럼프를 사람취급조차 하고 있지 않은 바이든과 민주당 정부로서는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을 것이고, 졸지에 똥바가지를 뒤집어 쓴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최상훈 기자는 인터뷰를 기사화하면서 이례적으로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로 기사를 작성했다. 그 역시 사안의 중대성을 간파하고 혹시나 한국의 일부 매체들이 기사를 잘못 전달할 가능성에 대비해서 이런 조치를 했을 것이다.
한국의 정권핵심이 미국에 던진 또 하나의 조롱적 메시지는 기모란 씨를 청와대 방역기획비서관에 임명한 것이었다. 기모란 씨는 통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통일운동가 기세춘 씨의 딸로 미국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개발하고 있는 mRNA 기반 백신의 위험성을 한국정부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줄기차게 강조해 온 인물이다. 한국정부가 미국산 모더나, 화이저 대신 바이러스벡터 방식의 영국산 아스트라제네카를 주력백신으로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의료자문을 제공했다.
한국의 일부 얼빠진 보수매체들은 이 청와대 인사를 가리켜 고작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았었다. 이 청와대 인사의 핵심 메시지는 미국정부와 미국의 글로벌제약회사들에 대한 조롱적 경고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과의 줄다리기에서 손톱만큼도 양보할 의사가 없다는 외교적 선전포고라고 해도 무방하다.
때를 같이하여 러시아, 중국 등에서 제조한 비주류 백신들에 대한 검토의사에 대한 정보들이 언론에 무더기로 흘려졌다. 한국정부가 실제로 스푸트니크-V나 시노팜 같은 비주류 백신을 들여올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이런 정보가 한국정부를 통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미국에 대한 협박이었다.
즉 ‘너네(미국) 백신 없어도 되고, 우리는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지역 패권국가들과 모든 면에서 더 가까워 질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한국정부는 아직 날짜조차 확정되지 않은 5 월 후반기 미국방문을 취소할 각오를 하고, 나아가 주미대사를 소환할 각오를 하고 대중연합전선참여를 강요하는 무기로 백신을 이용하는 전술이 우리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여러가지 형태로 강경하게 백악관에 보내고 있는 중이다.
======================
그건 그렇고,
한국정부의 갑작스러운 대미자주노선 극대화운동의 여파로 일부 피해가 재외동포들에게 돌아가게 생겼다.
지난 주에는 한국 법무부가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미국시민권자들이 사전에 ETA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새 지침을 발표했다. 한국매체에서는 제대로 보도조차 하지 않은 이 새 지침은 4 월부터 실험적으로 시행하여 9 월부터 전면실시된다. ETA 란 Electronic Travel Authorization(전자여행허가)의 약자로 한국에 입국하려는 무사증 국가의 시민들은 사전에 한국 법무부에 여행계획을 보고하고 사전에 전자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미국 뿐 아니라 한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무사증 국가들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전자여행허가제는 현재 미국과 캐나다가 서로 양국(캐나다와 미국)시민들을 제외한 나머지 무사증 국가 여행자들에게 실시하고 있는 제도인데, 오는 9 월부터 한국이 전 세계 무사증국가 여행자들을 상대로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주요표적은 미국이다. 특히 불분명한 이유로 입국해 제멋대로 활동하며 돌아다니는 언더카버 미국 공무원들의 안하무인적 행태를 송두리째 뿌리뽑겠다는 의지표명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기류는 한국 국내의 외국인(특히 미국인) 토지보유에 대한 반감여론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주 국토교통부는 뜬금없이 국내 외국인 토지보유현황이라는 자료를 발표했다. 매년 발표하는 것이니 그 자체가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이번에는 통계자료를 구체적으로 발표하고 언론에 상세한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이 소유한 국내토지면적이 2 억 5 천 3 백 만 평방미터이며, 그 대부분이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4 개국 국적 교포들 소유라는 점들을 분명히 밝혔다.
전체의 60 퍼센트가 미국 국적자 소유라는 통계자료가 특별히 크게 보도되는 바람에 국내에서는 ‘검은 머리 외국인들’의, 특히 미국시민(대부분이 미국국적의 교포)들의 국내토지소유’에 대한 엉뚱한 반감으로 확산하고 있는 중이다.